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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자유와 절제 ㅣ 최필수 ㅣ 2024-01-28

by 남일송 posted Feb 03, 2024 Views 9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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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01-28

 

자유와 절제

고린도전서 8장 1~13절

 

 

고린도전서 8장은 제가 어린 시절 성경을 읽을 때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데 그걸 먹으라는건지 말라는건지 헷갈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의 말씀을 듣고 여러분들께서는 무슨 말인지 대략 감을 잡으셨겠지만 당시 개역한글판의 어려운 한자투의 성경을 읽던 저는 그 감을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우상은 나쁜 것이니까,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은 먹지 말라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뭔가 복잡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게 제겐 어려웠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성서에 대해, 바울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교회에 대해,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서 이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바울은 두 번에 걸쳐 우리에게 관념의 도약을 촉구합니다. 첫 번째는 말초적 미신에서 보편적 신앙으로의 도약입니다. 이 첫 번째 도약을 바울은 지식이 있다(possess knowledge)”라고 부릅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심을 압니다. 반면 지식이 없는 사람은 여기저기에 신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우상숭배의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이 유일한 궁극적 존재이며 우리 모두가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그를 위해 살고 있음을 압니다. 반면 지식이 없는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우상이 진짜인줄 알고 그것을 두려워하고 숭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지식 즉 첫 번째 도약은 기독교가 인류에게 준 위대한 선물입니다. 일본 초기 기독교인이었던 우찌무라 간쪼는 그가 기독교를 처음 믿게된 후 제일 먼저 느낀 것은 해방감이었다고 말합니다. 지나는 길에 있는 나무와 돌과 같은 온갖 사물들에게 나름대로의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며 지냈는데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나니 그것들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태양이 뜨면 촛불이 필요 없듯이, 우주의 창조자를 알고 나면 온갖 피조물들은 그 빛에 의해 드러나는 피사체일 뿐입니다.

 

이러한 각성은 기독교에게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공자도 이런 각성을 가지고 살아간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왕손가 라는 사람이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아랫목 신에게 잘 보이기보다 차라리 부뚜막 신에게 잘 보이는 것이 낫다는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왕손가가 한 이 말은 당시 속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뜻은 지위가 높은 사람하고 친한 것보다 실세하고 친하게 지내는게 좋다는 것입니다. 아랫목에는 제일 높은 신주단지를 모시게 마련인데 그것보다 실제로 먹을 거리가 나오는 부뚜막 신에게 잘 보이는게 실속 있다는 거죠. 오늘날 빗대서 풀이하자면 사장님에게 잘 보이는 것보다 총무팀장에게 잘 보이는게 낫다라거나 교회에서 당회장님께 잘 보이는 것보다 봉사부장님께 잘 보이는게 낫다는 정도의 뜻입니다.

 

왕손가가 공자에게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공자가 어딜 가나 최고 지도자를 만나서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공자의 이상이 한 나라를 제대로 다스려서 천하의 본보기가 되도록 만든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왕손가는 굳이 왕을 만나려고 애쓰지 말고 자기가 모시는 실권자를 한 번 만나보시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들은 공자는 불쾌했을 겁니다. 자기를 어디 한 자리 차지하려고 기웃거리는 사람 정도로 취급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공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획죄어천 무소도야(獲罪於天 無所禱也)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어떻습니까? 왕손가의 질문에 대한 답 치고는 논리적 비약이 있습니다. 왕손가는 아랫목과 부뚜막을 비교하고 있는데, 공자는 하늘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늘은 윤리일 수도 있고, 역사일 수도 있습니다. 상벌을 주관하는 궁극적 원리일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처럼 천지를 창조한 인격신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있겠지만 어쨌든 동방에서 일컬을 수 있는 가장 초월적인 존재가 하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하늘에 죄를 지으면 아랫목이고 부뚜막이고 간에 어디다 대고 빌 데가 없다는 말입니다. 공자는 잡신을 논하는 왕손가에게 하늘의 논리로 답을 한 것입니다. 2000년 뒤에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와서 기독교를 전파할 때 그 논리가 너희들은 본래 유일신을 믿고 있었는데 지금 그것을 잊어버렸다고 한 것도, 동방에서 하늘이란 말이 기독교의 하느님과 잘 통한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왕손가에서 공자로의 도약, 잡신에게서 하늘로의 도약 - 이 도약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약을 이뤄낸 사람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아니 그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부정합니다. 바로 두 번째 도약입니다. 바울은 1절부터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되냐 안되냐에 대한 논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먹어도 된다는 논리에 대해서 바울은 충분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은”, 즉 하나님이 유일한 초월자임을 아는 사람은 그까짓 음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죠. 8절에 우리를 하나님 앞서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될 것도 없고 먹는다고 해서 이로울 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과 우상은 서로 관계가 없다는 과학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우상이란게 실체가 없는 거니까 그 자체를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지혜로운 태도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말한 첫 번째 도약이었죠.

 

그럼 먹으면 안된다는 논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식이 없는 사람을 배려한 것입니다. “양심이 약한 사람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 것이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관념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 아마 대부분 고기였던 것 같습니다만 을 먹으면 그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하는 죄의식을 가진 채로 그 음식을 따라 먹을테니 그 사람을 망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절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 양심이 아니라 남의 양심을 배려하는 두 번째 도약입니다. 고린도전서를 처음 읽었던 고등학생때 저는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던 데는 이야기 자체가 복잡하기도 하지만, 당시 제가 다니던 교회가 많은 계율들을 충실히 실천하려는 보수적인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술ㆍ담배를 하지 말라는 건 기본이고 주일날 돈을 쓰면 안된다, 십일조를 철저히 해야 한다, 가요나 팝송을 부르면 안된다, 심지어 구약에서 부정하다고 한 돼지고기는 삼가는게 좋다 등등 믿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사항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즉 성경에서 하지 말라는건 하지 말자는 단순한 믿음을 충실히 지키며 사는 교회였기 때문에, “사실은 해도 괜찮지만 남들을 위해서 하지 않겠다는 바울의 고차원적인 논리가 와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떠난 후부터는 계율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소위 말하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금기시하던 것들이 사실은 금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은 해방감을 주기 마련입니다. 말하자면 첫 번째 도약의 기쁨을 제 청년 시절에 만끽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고민하게 된 시점은 제가 중국에서 유학을 할 때였습니다. 거기서 새로 친구들을 사귀고 서로 알아가면서 제가 교회 다닌다는 얘기를 했더니 그 친구들이 신기해 하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을 처음 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황당한 질문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진짜 너한테 말씀을 하시냐는 둥, 천사를 진짜 봤냐는 둥 말입니다. 제 큰 아이가 설교문 초안을 먼저 읽고는 이게 황당한 질문이 아니라 근본적인 질문일 수도 있지 않냐고 하더군요. 그렇죠. 초월적 존재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궁금해 하는 것은 근본적인 질문일 수도 있죠.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라면 근본적인 질문이건 황당한 질문이건 간에 교회 다닌다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에 한 번쯤 가보기도 했을테고 주위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봤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우러러 보거나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저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처음 봤다는 사람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이었다면 어떠셨을 것 같습니까? 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 친구들이 한국에서 온 교회 다니는 이 남자를 온갖 상상을 하며 바라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의 행동이라는 각인을 할 것입니다. 이를테면 제가 술을 먹으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술을 먹네 라고 생각할테고, 제가 욕을 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욕을 하네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결국 저는 제 양심 때문이 아니라 중국 친구들의 양심 때문에 본의 아니게 경건한 삶을 좀 살았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사석에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나는 술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지만 내가 술먹는 모습을 보고 시험에 드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자리에서는 술을 먹지 않겠다.” 사실 그 목사님의 말씀이 오늘 하늘뜻펴기의 결론이나 다름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8장에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한 것도 같은 뜻이죠. 첫 번째 지식의 도약 뿐 아니라 두 번째 사랑의 도약을 이루고 살겠다는 것이지요. 나 하나 양심 지키며 살겠다면 첫 번째 도약으로 충분하지만, 선교의 사명을 수행하며 교회를 이루어 살겠다면 두 번째 사랑의 도약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론을 맺기에는 오늘날 우리나라와 향린교회의 상황은 좀 더 복잡한 것 같습니다. 저도 어떤 결론을 가지고 교우 여러분께 권면을 드릴 재간이 없어서, 평소 제가 고민하고 있는 바를 함께 나누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신앙생활의 실천을 해야 한다면 오늘날 향린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과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매우 다릅니다. 오늘날에는 바울이 말한 지식, 즉 첫 번째 도약이 보편화됐습니다.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을 절대시하면서 그 도약을 이뤘지만 오늘날은 과학을 절대시하면서 그 도약을 이뤘습니다. 이제 점을 치거나 미신을 믿는 행위는 종교인이건 비종교인이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때 가장 합리적인 종교로서 기독교에 남아 있는 종교적 의식들조차 비합리적이라고 여겨지곤 합니다.

 

윤리적으로도 청교도적이라는 말이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습니다. 얼마전 이선균 배우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도하면서 프랑스의 한 매체는 한국에는 청교도주의가 존재한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 말이 맞고 그르고를 떠나 청교도주의라는 말이 쓰이는 맥락에 주목해 보십시오. 절대적인 신앙에 충실하여, 금욕적인 가치를 자기 뿐 아니라 남에게 강요하는 폭력적 사상 이게 프랑스 매체가 비판했던 청교도주의 아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향린교회의 색깔과 지향점은 사회적으로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와 예수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종교적 금기들을 털어내고, 관용과 합리성의 새로운 신앙실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회적 대안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선교의 매력 포인트이기도 합니다. 종교적 비합리성과 폭력적 청교도주의에 지친 비신앙인과 신앙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향린처럼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그 이미지는 향린교회를 확장시키는 선교적 의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향린처럼이라는 그 색깔이 어떤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될 겁니다. 자기의 실존적 문제 속에서 강력한 신이 자기 인생에 개입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말입니다. 치료자, 구원자로서의 뜨거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향린다움이 그런 사람들에게 어필하지 못 한다는 것이 향린의 한계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두루 어필하겠습니까? 그런 목마름이 있는 사람은 그런 교회를 찾아가면 되겠죠. 향린이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안타까와 할 필요는 없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안타까와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단언하지 못하고 없을 수도 있다고 말끝을 흐린 것에 제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혹시 과학적 합리성이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이 시대에 오히려 초월적 신앙에 대한 목마름이 점점 커져가는 것은 아닐까?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자유롭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뒷풀이 하는 걸 보고 신앙인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까? 그리고 제가 교회학교 교사를 오래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우리 교회 아이들에게 과연 향린같은 쿨함이 독일까 약일까? 뜨거운 신앙을 가졌다가 나중에 쿨한 신앙을 가지게 되는 수는 있지만, 처음부터 쿨한 신앙을 가르치면 나중에 그냥 신앙이 없어지는 것 아닐까? 그리고 쿨한 신앙을 가진 우리가 뜨거운 신앙을 가르치거나 흉내낼 수 있을까?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교사들과 그리고 교역자분들과 많은 고민을 나누고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해야 겠습니다. 바울이 말한 두 번째 도약의 핵심은 나를 위한 신앙에서 남을 위한 신앙으로의 전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시대 향린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뜨거움일까요 쿨함일까요? 자유일까요 자유의 절제일까요? 제가 답을 드리지 못하고 질문을 드리면서 마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게 평신도 하늘뜻펴기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여러분과 저에게 2천년 전에 오셨던 영원한 현대인, 예수님의 영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남을 위한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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