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한국 교회
예레미야서 5:18-31, 로마서 8:31-39, 마가복음서 8:31-38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3.1운동]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태화관과 파고다공원을 비롯하여 전국 8~9 지역에서 동시에 한국의 독립을 선포하면서 시작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그 뒤 1년여 동안 계속된 국내외의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총칭해서 말한다. 이 운동은 지역과 사회적 계층, 종교와 이념, 남녀노소를 넘어서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항일독립운동이다. 이 운동의 주체가 초기에는 종교인들이어서 그 종교사적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이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를 출발시켰기 때문에 ‘혁명’으로 간주되는 측면도 있어서 ‘3.1운동’은 그 정치사회적 의미 또한 ‘혁명적’이랄 수도 있다.
3월 1일을 거사일자로 잡은 것은 그 해 1월 22일에 돌아간 고종(高宗)의 장례일이 3월 3일로 정한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고종의 ‘독살설’까지 나돌았던 만큼 울분에 쌓인 백성들이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모였기 때문에 3월 3일 인산일(因山日)에 맞춰 거사일자로 잡은 것이다. 그 무렵 서울역에 하차하는 인원만 보더라도, 평소 매일 평균 1,500~1,600명이던 것이 2월 26일 3,000여명, 27일 6,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처음에 거사일자로 잡은 날은 장례 전날인 3월 2일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주일이어서 기독교인들을 배려, 하루를 당겼다. 천도교 측의 양해를 엿볼 수 있다. 3월 1일 낮 12시 경부터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인사동 소재 태화관에 모이기 시작, 오후 2시까지 길선주·유여대·정춘수·김병조 4명을 제외하고 29명이 참석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어서 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독립선언을 통고했다. 파고다 공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은 민족 대표들이 움직이지 않자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에 나섰다.
이날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은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정주,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이었다. 이들 지역의 만세운동은 기독교회가 중심이 되었고, 두 지역은 목사가 주도했다. 사흘 째 되는 3월 3일은 고종의 장례날임에도 불구하고 예산, 개성, 사리원, 수안, 송림, 곡산, 통천 등지에서 일어났다.
만세운동은 4월말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가 점차 퇴조하게 되었다. 일본 군경의 탄압이 가혹한 데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문제를 논의하지 않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4월 1일 전국 67개 지역에서 일어난 것을 정점으로,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곳 이상 일어났다. 50곳 이상 일어난 날만 3일이었고, 30곳 이상 일어난 날도 15일이나 되었다. 시위참가자는 서울의 수십만을 비롯하여 의주 3만명, 강화읍 2만명, 합천 삼가 1만명 등에 이르렀다. 이 통계는 일제가 50명 이상의 시위를 조사한 데 따른 것이다. 이 통계에 따르면 1919년 3-4월에는 1,214회 시위에 110만명이 참가했고, 1919년 3-5월은 1,542회에 202만명이 참가했으며, 전국 218개 군 중 212개 군에서 참가했다. 일제의 경찰 통계와는 달리 2천여회가 넘었다는 기록도 있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1년 간 1천만명이 참여했다고 증언한다.
처음에는 독립선언서 말미의 공약 3장에 따라,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총검으로 무차별 살륙하여 사상자가 많이 나자 폭력화한 곳도 있었다. 일제 측 통계에 의하면, 그 해 3월~5월까지 46,948명이 체포, 투옥되었고, 2만명에 가까운 이들이 미결수 혹은 기결수로 수감되었으며, 15,900여명이 부상당했고, 7,500여명이 살해당했다. 47개의 교회당과 2개의 학교, 그리고 715채의 한국인 민가가 소각당했다.
[원인과 배경] 불법과 폭력으로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언론, 결사, 집회의 자유와 정치, 사상의 자유를 박탈했고, 생존권을 위협하는 등 한국인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치안대책으로 태형을 부활하는 등 조선인의 일상생활을 겁박했다. 1911년 1만 8천여명에 달하던 즉결처분이 1918년에는 8만 2천명으로 늘어났고, 동맹파업도 1916년에 6건에 362명이던 것이 1918년에는 50건에 4,500여명으로 늘어났다. 쌀값도 1914년에 1석당 평균 15원선이던 것이 1917년 말에는 20원 선이 넘었고, 1919년 3월에는 40원을 상회하게 되었다. 이는 일제 강점 초기, 식민지 백성의 삶을 옥죄고 있던 사회 경제적 상황이 매우 비참하게 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18년 제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피압박민족에게 ‘민족자결’이라는 희망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 원칙은 오스트리아제국과 러시아제국 및 터키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유럽의 백인기독교 지역에 적용하려는 것이었다. 영국 프랑스 등 전승국의 식민지나, 아시아 아프리카의 비백인․비기독교도 식민지에 적용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유럽 지역의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8개국 나라들이 민족자결 원칙에 따라 독립을 맞게 되었으나, 영국 프랑스 등 전승국의 지배하에 있거나, 유럽 밖에 존재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피지배 민족에게는 이 민족자결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일본은 1차세계대전 때에 중국 청도에 있는 독일 조차지를 공격, 승리함으로 전승국 대열에 서게 되었다.
베르사이유 조약안 440개 조항 가운데는 조선 문제가 아예 포함되지 않았다. 민족자결 원칙이 전승국 식민지나 유럽 밖의 식민지에는 거의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조선에도 적용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은 전승국 제국주의자들의 이런 의도에 개의치 않고 세계사적인 반전을 기하려고 3.1운동을 일으켜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 ‘민족자결’이라는 복음이 조선민족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음에도 이를 “제 것으로 만들려고 용감히 일어선 최초의 민족이 우리 민족”이요 이 원칙을 자기의 운명에 적용시켜 궐기한 최초의 봉화가 3·1운동이었다.[노명식]
3.1운동의 배경에는 앞에 거론한 배경 못지 않게 한국인의 주체적인 활동을 무시할 수 없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세계사의 움직임을 간파한 해외독립운동가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중국에 망명한 여운형(呂運亨) 등은 1918년 8월 20일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그 해 11월 11일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파리강화회의에 대표파견을 서둘러 1919년 2월 1일 김규식(金奎植)을 상해에서 출발시켰다. 김규식은 3월 13일 파리에 도착, 평화회의 한국민대표관을 설치하고 독립청원서와 한국독립항고서 등 여러 문서들을 작성,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각국 대표와 언론에 배포했다. 그 해 일어난 ‘3.1운동’의 결과, 1919년 4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식의 신분은 신한청년당 대표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바뀌었다.
상해에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했다는 소식은 독립운동계를 고무시켰고, 파리에 파견된 대표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여러 곳에서 독립운동세력이 움직여야 했다. 신한청년당도 국내와 일본, 만주·노령 지역에 대표를 파견, 각지의 독립운동을 확산, 활성화했다. 선우혁이 국내에 들어와 이승훈·양전백·길선주 등 서북지방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이광수 등은 일본에 파견, 독립운동을 고취하고 ‘2·8독립운동’의 선언서를 작성한 후 상해로 돌아왔다. 여운형도 만주와 연해주를 방문, 파리의 활동을 전하면서 독립운동을 고양했다. 그 결과 3·1운동에 앞서 여러 곳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2월에 간도 노령 지역에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가 발표되고, 동경에서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이 발표된 것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3·1운동 발발의 준비단계로서 큰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해외의 움직임과 함께 국내에서는 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종교계가 중심이 되었던 것은, 일제 강점 후 대부분의 언론․사회 단체가 해산되어 민족운동을 이끌고 갈 수 있는 마땅한 조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종교단체는 집회가 가능했고 교단마다 산하 지방 기구가 조직되어 있었다. 천도교의 경우 1905년에 동학에서 천도교로 개명(改名)한 이래 전국적인 대조직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도 장로회는 1912년 9월에 총회가 조직되었고 지방에 9개의 노회가 있어 총회→노회→시찰회→당회의 조직으로 연결되었으며, 감리회의 경우, 북감리회는 연회 산하에 10개의 지방회, 남감리회도 연회 산하에 7개의 지방회를 갖고 있어 연회→지방회→구역회로 연결되는 조직망을 갖고 있었덤 셈이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각기 개별적으로 독립운동을 계획하다가 2월 중순부터 합작이 진행되었다. 천도교와 기독교와의 연대에는 105인 사건 이래 민족운동으로 촉망받던 이승훈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불교와의 연대에는 최린과 한용운의 노력이 컸다.
이렇게 종교계가 3.1운동의 중심역할을 한 데에는 일제 강점하에서 종교기관만이 ‘치외법권적으로’ 유일하게 합법적인 집회활동 공간을 가졌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또 주목되는 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를 경계하면서 선교사들이 ‘정교분리 원칙’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한국 기독교인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3.1운동의 의의] 3.1운동은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전에 위정척사운동과 개화운동, 농민운동으로 분화되었던 민족운동을 하나의 새로운 독립운동의 동력으로 만들었다. 3.1운동 후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항일무장독립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북간도에서는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 대한의용군, 광복군 총영 등이 조직되어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1920년에 들어서서 봉오동 전투(6월)와 청산리 전투(10월)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항일무장세력은 러시아와 중국 관내에까지 파급되었고 미주 지역에서도 조직되었다. 활발하게 전개된 해외독립운동은 국내 민족운동에도 자극을 중어 고등교육을 위한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고 조선산물품 애용과 근검․절제운동 및 실력양성운동,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 등도 일어나 독립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무엇보다 3·1운동은 한국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은 종래 독립운동의 성격만 강조되었고, 민주화운동의 측면은 간과되어 왔다. 3.1운동은 한국사에서 민주공화제 국가를 탄생시키는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3.1혁명’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주장도 있다. 한반도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고려시대에도 민중(노비)들의 신분해방운동이 없지 않았으나 주체로 등장하지는 못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민중들은 ‘홍경래의 난’을 계기로 ‘민란’형태의 농민운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1862년에는 ‘임술(壬戌)민란’으로 총칭되는 37건의 대소 농민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런 저항들이 온축되어 폭발한 것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이다. 그 뒤에도 민권신장을 위한 독립협회운동도 있었으나 지배자들은 오히려 황제권을 강화하여 대한제국을 탄생시키는 등 역사의 흐름을 역행시켰다.
그러나 3.1운동은 조선조 멸망 이후에도 여전히 잔존했던 양반 지배자 중심의 왕조적 질서를 걷어내는 계기를 만들었다. 독립운동계도 3.1운동 이전에는 옛왕조를 회복하겠다는 의미의 ‘복벽(復辟)운동’의 성격이 잔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7년에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이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곧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 최후의 날은 곧 신한국 최초의 날”이라고 천명한 것은 국민주권의 이론을 정립하는 데에 큰 계기가 되었다. 「대동단결선언」에 이어 「대한독립선언서」(1919.2)와 「2·8독립선언」(1919.2) 역시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했으며, 3.1독립선언에서도 독립할 새 나라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民主)‘의 나라임을 분명히 했다. 1919년 4월 11일, 비록 해외에서 이뤄진 것이지만, ’민주‘의 나라가 세워졌다는 것은 한민족이 출애굽의 역사를 시작한 것이며, 조선민족이 ’민주(民主)‘라는 새 생명을 가진 나라로 새로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독립선언서」를 통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조선민중은 1919년 4월 11일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건립했다. 이에 앞서 국내에서 ‘3.1운동’을 준비하던 이들은 현순(玄楯) 목사를 상해에 파견, 조선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리는 한편 독립선언 이후 정부 수립을 준비토록 했다. 국내 독립운동계의 파송을 받은 현순은 3월 1일 상하이(上海)에 도착, 여운홍 김규식 선우혁 김철 이광수 등과 협의, 해외 독립운동가들과 연락, 상해로 모으는 한편 ‘독립선언’에 따른 정부조직을 추진하게 되었다. 4월 10일 밤 29명의 조선의 각도를 대표하는 이들이 모여 밤새도록 토론[임시의정원], 그 이튿날 10개조로 된 임시헌장을 발표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이라는 임시헌장 제 1조는 몇 번에 걸친 개헌에도 그대로 유지되다가 1948년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로 계승되었다.
과거 황제의 나라였던 ‘대한제국’은 ‘3.1운동’을 통해 ‘백성이 주인인 나라’ ‘대한민국’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그러기에 선진들은 이러한 역사의식을 반영하여 ‘3.1운동’을 ‘3.1혁명’이라 불렀는데 ‘3.1혁명’이란 용어는 1930년대 전후하여 독립운동계에서는 자주 보였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민주의 나라’ 곧 ‘민주공화국’은 3.1운동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 추구했던 이상이었다. 3.1운동의 민족지도자 이승훈 장로는 재판과정에서,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했느냐는 일제 재판관의 질문에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3.1독립선언에서 천명한 민주공화정 이념은 1910년에 멸망한 ‘대한제국’을 ‘대한민국’으로 부활시켰던 것이다. 국토와 국민이 빼앗긴 상태에서 건립된 ‘대한민국’은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임시정부(행정부)와 임시의정원(의회)을 설치, 일제에 항거하면서 독립운동을 영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3·1운동은 그 세계사적 의미도 크다. 1차세계대전 후 전승강대국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어갔다. ‘베르사이유 체제’다. 이는 지배세력에 변동을 가한 구 체제의 연속이었다. ‘3.1운동’은 베르사이유체제라는 새로 탄생한 강권체제에 저항한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은 식민지 쟁탈을 목적으로 한 유럽권 내의 전쟁으로 이를 계기로 비유럽권인 미국과 소련에 그 주도권을 넘기게 되었다. 베르사이유 체제는 1차 대전에서 승리한 전승국이 그들 중심으로 세계질서를 재편하려는 또 하나의 제국주의 질서로서, 전승국 식민지와 유럽 외의 민족에 대해서는 민족자결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 때 한민족은 3·1운동을 통해 전승국 일제에 항거함으로, 1차 세계대전 후 전승국 중심으로 재편성된 침략․강권 질서에 도전했던 것이다.
3.1운동은 당시 피압박민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전승국 중심으로 재편성된 침략·강권적 국제질서에 도전한 것으로, 이에 자극받은 세계의 피압박 약소민족들이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중국에서는 이 해 북경대학생들을 중심으로 5·4운동을 일으켰는데, 이 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은 ‘조선을 본받자’는 구호를 외쳤다. 인도에서는 마하트마 간디를 중심으로 영국에 대한 인도의 독립운동이라고 할 비폭력․무저항의 ‘샤타 그라하’ 운동을 일으켰고, 필리핀․베트남․이집트 등지의 독립운동에도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3.1운동은 그 세계사적 의의도 높다고 할 것이다.
[삼일운동과 한국교회] 3.1운동에서 기독교는 천도교 불교와 더불어 이 운동을 선도했다. 그러나 기독교계가 당시 선도적으로 참여했음에도 역사의식의 결여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 나아가 3.1운동 후에 훼절한 기독교 인사들 때문에 기독교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3.1운동에서 기독교지도자들은 처음에 ‘독립청원’을 내자고 했으나 천도교와의 합작과정에서 ‘독립선언’으로 노선을 수정했다. 천도교 측도 ‘독립청원론’과 ‘독립선언론’이 혼재해 있다가 ‘독립선언론’으로 정리했다.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민족적인 대사를 두고 다른 종교와 합작할 수 있는가, 목회자가 정치운동에 참여해도 되는가 하면서 회의하고 주저한 이도 있었고, 3월 1일 당일에는 33인 중에서 독립선언 선포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도 있었다. 신석구 목사와 오화영 목사는 다른 종교와의 합작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지만 참여했고, 오기선은 그 한계를 넘지 못해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윤치호 김윤식 같은 원로들이 ‘독립불능론’, ‘시기상조론’ 등을 언급할 때,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래도 자신이 죽어야만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했다. 이런 태도는 공판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3.1운동은 준비·점화 단계에서 전국적인 만세운동 단계, 그리고 새로운 방향 설정을 모색하는 '정리 단계' 혹은 ‘정부수립 단계’로 넘어갔다. 우선 준비(점화) 단계에서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은 거사일시와 장소를 협의하고 거사에 따른 업무도 분담했다. 독립선언서의 기초와 인쇄는 천도교측에서 맡고, 지방 분송은 기독교측과 협력키로 했으며,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와 귀족원에 전달하는 업무는 천도교 측이, 미국 대통령과 파리 평화회의에 전달하는 일은 기독교측이 맡았다. 독립선언서명자를 모집키로 하여 16명의 기독교인이 서명했고 5명이 더 서명키로 했으나 시간이 늦어 취소했다. 점화단계의 48인 중 24명이 기독교인이다. 천도교와의 합작에 앞서 기독교계는 적어도 세 갈래(서북 장로교, 북감과 남감, 2.8독립선언에서 보이는 재동경Y 등)로 독립운동을 준비했고, 첫날 봉화를 든 것은 기독교계였다. 그러나 기독교계가 천도교로부터 5천원을 빌린 것(중국 일본 만주와 국내 여행경비 3,170원, 수감자 가족생계비 640원, 독립선언서 발송비 250원, 기타 80원)이나 당일 선언장소를 변경한 것 등에서는 그 한계성도 엿볼 수 있다.
‘3.1운동’의 지방화․전국화 단계의 기독교의 역할은 주목할 만하다.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가 있는 곳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3월 1일 첫날 서울 외의 7곳이 대부분 기독교계 중심이었고, 의주와 평양은 목사들이 주동했다. 천도교측과의 합작도 보인다. 주동세력이 뚜렷한 340곳을 지역으로 정리하면 311개 지역으로 나타나는데, 그 중 기독교가 78지역, 천도교가 66지역 그리고 양교 합작지역이 42개 지역이다. 이것은 기독교계가 25%-38%를 주도한 것을 의미한다. 전국화 단계에서 기독교인의 참여정도를 체포·투옥자 중심으로 본다면, 6월 30일까지 투옥자 9,458명 중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를 차지했고, 12월 말까지 복역자 19,525명 중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17%이며, 천도교인은 2,297명으로 11%였다. 이 통계는 바로 기독교인의 3.1운동 참여의 운동량을 계량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 지방의 투옥자나 복역자 가운데서 교회사 자료에는 기독교인으로 나타나는데 일제측 자료에는 기독교인 여부가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위에 언급한 통계를 당시 한국인의 인구와 관련시켜 보면, 기독교인의 역할이 더 분명해진다. 이 때 한국의 인구가 1,600만명, 그 중 기독교인은 1918년말 현재 21만2,700여명(장: 160,913, 북감:41,044, 남감:10,740)으로 나타나는데, 한국 인구의 1.3∼1.5%를 차지했다. 거기에 비해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주동세력면에서 25∼38%, 체포·투옥면에서 17∼22%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체포 투옥된 숫자와 관련시켜 보면,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대략 20∼30%로 계량화할 수 있다. 당시 기독교인이 조선 인구의 1.3∼1.5%에 불과했는데도 ‘3.1운동’의 운동량에서는 20%를 상회했다면, 3.1운동과 한국교회와의 관련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다시 천도교의 교세와 비교해 보자. 1919년 3월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법정 진술에 의하면(그러나 이 진술은 신빙성이 없다), 명부등재자 300만 명, 의무 부담자 200만 명이라고 했다. 그의 진술대로라면, 이는 기독교세의 10배에 달하는 교세다. 거기에다, 천도교는 19세기 말 이래 민족주의운동의 중요한 흐름인 민중사상계[東學]를 이끌어 온 세력으로, 사상면이나 교세면, 그리고 민중동원 능력면에서 광범위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3.1운동에서 활동한 역량은, 신자 수치에서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기독교인과 대비되고 있다.
기독교도의 참여가 이렇게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그 결과 일제의 박해도 다른 종교에 비해 컸다. 제암리교회당에서는 비신자를 포함하여 한꺼번에 29명이 희생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한 달이나 늦게(10월 4일 개회) 그것도 그 해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3.1운동으로 '미참'(未參)한 상황에서 열린 장로교 제8회 총회에서는, 사살·타살 52명(각 노회 보고), 체포된 신자 3,804명(이 가운데 목사·장로 134명: 장로교 전체 목사·장로 1,024명 중 13%에 해당)이나 되었다. 총회에 제출한 노회의 보고서에는 '대한(조선)독립운동' 혹은 '독립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운동이 전국화되는 단계에서 기독교계가 가졌던 문제 또한 없지 않았다. 3월 1일 선언 당일 기독교 대표 16명 가운데 4명이 불참했는데, 아무리 이유를 둘러댄다 해도 기독교측의 한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당일 서울의 독립선언 장소를 명월관[泰和館]으로 옮긴 것이 선교사 베커(Becker)의 제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도 기독교 운동의 한계로 지적된다. 일제가 폭력으로 나오는 데도 교단적 차원의 대응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도 있다. 물론 제암리의 만행을 세계에 알려 그 여론을 환기시킨 데는 선교사 스코필드(Scofield) 등의 노력이 있었다. 또 당시 장·감 연합기관지인〈기독신보〉의 보도 태도는 일제의 언론 검열때문이었다고는 하나 그 대응이 대단히 미약했다.
[기독교인들의 삼일운동 참여] 이처럼 기독교가 민족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기독교의 민족관이나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교육이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 점은 여기서 생략하고 다음 몇가지를 지적하겠다.
첫째 한말 이래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민족운동의 전통을 적극 참여의 배경으로 지적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아시아·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기독교 국가의 침략을 당하였으나, 한국은 일본이라는 비기독교국가에 의해 침략을 당함으로써 기독교 이념에 입각한 독립운동이 가능했다. 한국의 기독교 민족운동은 한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을사늑약이 이뤄진 1905∼1910년 사이의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을사늑약 파기운동과 관련하여 엡웟회(懿法會)의 활동, 전덕기의 을사오적 처단 미수, 대한문 앞의 상소운동(이준 등), 정동교회 교인 정재홍과 기독교인 홍태순의 순국자결, 장인환과 전명운이 친일미국인 외교관 스티븐스 저격, 안중근(가톨릭)·우덕순(기독교)의 이토 히로부미 포살, 이재명의 이완용 살해미수 등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한말의 기독교민족운동의 이런 전통은 독립협회→상동파 및 황성기독교 청년회→신민회→105인사건→신한청년당 및 송죽회로 이어지는 항일민족운동의 전통 위에서 3.1운동이 전개된다고 지적하는 이도 있다.
둘째 기독교계의 교단 조직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는데, 이점은 앞에서 지적했다. 또 일제는 강점 후 기독교회의 예배를 방해하고 설교에 제재를 가하는 등 종교적인 자유를 박탈하려 했다. 특히 금주·금연에 관한 설교나 '다윗과 골리앗'을 주제로 한 강론도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다 강점한 지 얼마 안되어 벌인 '105인 사건'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려 한 사건이었다. 1915년에는 사립학교법을 개정하고 포교법을 제정하여 기독교학교의 성경공부와 채플 등을 금지하고 선교를 방해했다. 이것은 한국인에 대한 생존권을 위협한 일제가 이제는 신앙의 자유마저 빼앗아 버리려는 것이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도 궐기치 않을 수 없었다.
끝으로 우리는 당시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움직임에서 신앙과 민족을 연관시키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교회에서는 모세·삼손·다윗·다니엘의 사적 등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우리 민족의 역사와 연관시켜 교육했다. 또 3.1운동의 만세시위가 한창일 때, 기독교회가 작성한〈독립단 통고문〉을 뿌리면서 시대의식을 민족운동과 연관시키려 했다. 그 ‘통고문’에는 ① 매일 3시에 기도하고, ② 주일은 금식하고, ③ 매일 성경을 읽는데, 월요일-사 10(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 화요일-렘 12(유다가 멸망한 원인에 대한 설명,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셨기 때문'), 수요일-신 28(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에게 침략받아 고통받게 되리라는 예언), 목요일-약 5(고난당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기도와 인내할 것을 권면), 금요일-사 59(죄지은 백성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다는 예언), 그리고 토요일-롬 8(성령이 주시는 생명,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등이었다. 여기서 민족운동을, 신앙고백과 신앙생활의 차원에서 연관시키려고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삼일운동 105주년을 기념하는 올해, 한국교회는 신앙의 선조들의 그런 신앙과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삼일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지역과 계층, 종교와 이념, 남녀와 노소를 초월하여 전개한 항일독립운동이었다. 특히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가 연대하여 이 거대한 운동을 폭발시켰다. 종교간의 이런 연대와 협력은 지금 한국 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삼일운동에서는 일제라는 외세의 침략 강점을 물리치고자 했는데, 해방 80년을 바라보는 오늘날은 외세의 지배를 완전히 벗어나 있는가. 기미독립선언은 분명히 한국의 자주국임과 한국민의 자주민임을 선언했는데, 지금은 어떤 상태인가. 오늘의 상태를 보는 한국 교회의 혜안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삼일운동과 기미독립선언문에는 평화를 강조했다. 그 일절이다.
“이천만 함분축원의 백성을 위력으로써 구속함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소이가 아닐 뿐아니라 이로 인하여 동양안위의 주축인 사억만 중국인의 일본에 대한 위구와 시의를 갈수록 농후케 하여 그 결과 동양전국이 공도동망의 비운을 초치할 것이 명백하니 오늘 우리의 조선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나와 동양지지자의 중책을 온전케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몽매에도 면치 못하는 불안공포로부터 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평화로써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 인류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이리요.”
오늘 날 한국의 분단은 주변 나라들의 평화 및 안위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동양평화 나아가 세계평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삼일운동 105주년을 맞아 한국이 세계와 역사에 줄 수 있는 귀한 선물이 한반도의 평화통일임을 다시 다짐하고, 이 분단적 삶을 평화적으로 극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을 구현하려고 노력했던 선진들을 되돌아보면서, 한국교회도 평화통일과 세계봉사의 가치를 새롭게 다짐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240225, 향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