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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십자가라는 증거 ㅣ 황푸하 ㅣ 2024-03-03

by 김지목 posted Mar 03, 2024 Views 12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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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03-03

십자가라는 증거

출20:1-17, 고전1:18-25, 요2:13-20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저는 망원동에 있는 새민족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황푸하라고 합니다. 교단은 다르지만, 향린교회는 늘 투쟁 현장에서 만나던 든든한 친구였습니다. 또 저는 옥바라지선교센터라는 도시 운동 단체를 함께 만들어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규모가 작은 단체들에게 늘 커다란 예배 공간을 내어주던 교회도 향린교회였습니다. 여기 내수동에 새 건물을 짓고, 처음으로 빌린 사람들이 또 저희이기도 했습니다. 또 이렇게 강단에서 뵙게 되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저도 전에 일하던 교회에서 건축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중간에 시공사가 엎어지는 바람에 골조 이후부터는 모든 것을 직접 해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 교회 전도사였는데, 매일같이 시멘트를 말고, 망치를 두드리는 일이 저의 일이었습니다. 교인들과 나무도 직접 사와서 심고, 몰딩도 직접 작업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건물 짓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성전을 엎어버리십니다. 이제 막 새 건물을 지은 교회에서 읽기에는 조금 민망한 본문인데요. 어쨌든 성전을 엎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판매하고, 환전소까지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올 때는 소나 양,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와 같은 제물을 가져와야 했습니다. 집에서 먼 예루살렘까지 걸어오면 어떤 이는 몇 주일도 걸릴 겁니다. 그때는 자동차나 비행기가 없었으니까요. 성전 입구에서는 그가 가져온 양을 검사합니다. 제물에는 흠이 없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라? 오면서 긁혔는지, 양에게 작은 상처가 났다고 트집을 잡습니다. 그렇게 빠꾸를 먹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몇 주일을 걸려서 왔습니다. 그것도 집에서 키우던 가장 좋은 양을 데리고요. 그런데 빠꾸라니요. 다시 집에 다녀올 수가 없습니다. 얼른 근처 시장에 가서 양 한 마리를 사옵니다. 그런데 그 양도 흠이 있다며 빠꾸를 당합니다. 어떡하죠? 그때 성전 뜰을 보니, 거기서 양을 판매하고 있는 겁니다! 처음부터 그걸 샀다면 검사를 받지도 않았을 것을! 그이는 성전 뜰에서 환전도 하고, 그것으로 양도 샀습니다. 성전은 그렇게 불의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엎을만 하죠? 예수는 채찍으로 그 뜰 안에 있는 양과 소를 모두 성전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환전소는 엎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화가 난 예수는 씩씩댑니다. 이 장면은 아마 복음서에서 예수가 보여준 가장 과격한 장면일 겁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수습을 해야 하잖아요. 지금 요한복음 2장이에요. 이제 사역을 막 시작했는데, 끝내야 할 판이에요. 화를 이기지 못했는지 처음부터 너무 과격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사람들도 예수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누구도 이런 짓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나봐요.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사람들은 예수를 바로 연행하지 않고, 표징을 물어봅니다. 혹시 이 사람이 비록 나사렛 출신이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혹시나하는 마음에 증거를 물어본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예수에게는 하늘에서 가져온 마패 하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전을 한번 허물어봐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사람들이 콧방귀를 뀝니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당신이 어떻게 이것을 사흘 만에 세웁니까?” 예전에 마술사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자유의 여신상을 사라지게 했다가 다시 세운 적이 있거든요? 예수가 데이비드 카퍼필드도 아니고, 어떻게 사십육년 동안 지은 이 커다란 성전을 삼일만에 다시 짓겠습니까? 사람들은 의심합니다. 그리고 그가 진짜 그리스도일 가능성이 만에 하나라도 있더라도 사람들은 성전을 철거하지는 않을 겁니다. 증거 하나 보려고 성전을 부순다. 리스크가 너무 크잖아요.

 

신대원 시절, 제가 대자보 게시판을 만들어달라고 학교에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학교 직원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대자보 게시판을 만들면, 학생 같은 사람이 명성교회 욕을 쓸거고, 그러면 명성교회가 학교에 지원금을 끊을텐데,” 저보고 책임을 질 수 있겠냐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우리 이 건물을 허물고, 운동장에서 텐트치고 공부해보자고 했습니다. 신학교가 결국에 만민이 공부하는 집이지, 장사하는 집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저는 예수처럼 교학처를 엎지는 못했습니다. 졸업은 해야했기 때문이에요. 아마 예수도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요? 이럴거면 차라리 성전을 허물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전을 허물지 않았고, 예수는 거기서 표징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표징, 하늘에서 온 증거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제가 이 강단에서 아무리 이것이 하늘 뜻이라고 호소하더라도, 이것이 진짜라는 증거, 여러분에게 보여줄 표징이라는 것이 저에게 있느냐는 말이에요. 아쉽게도 그런 것은 없습니다. 신학자들은 각주를 달 뿐이고, 예술가들은 표현할 뿐이고, 예언자들은 소리칠 뿐입니다.

 

오늘 구약성서에서는 십계명이 나오는데요. 십계명은 유대인들의 최고 상위법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헌법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법은 해방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는 첫 번째 계명입니다. 그리고 신에 대하여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 뒤를 이어 나옵니다. 하나님 외에는 모든 것이 우상이며, 그 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금한다는 것이지요.

 

해방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의 해방 이외에 다른 것들, 그러니까 국가와 민족, 권력과 재력, 그러니까 무한해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유한한 그런 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대로 그런 것들을 우상으로 만들고, 기득권을 형성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십계명을 받들어 눈에 보이는 신상들을 다 우상이라며 파괴했습니다. 그렇게 타종교를 혐오하기도 했고, 교회 벽에 그린 성화를 지우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벽에 걸어둔 십자가를 떼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십계명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런데, 이 십계명 돌판도 결국에 형상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형상화한 거잖아요.

 

율법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거나, 우상이 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제물을 살 돈이 없어서 제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했던 사람들, 소중한 비둘기 한 마리를 가져와도 부정한 것이라며 거부당해야 했던 사람들, 안식일에 일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가 없었던 그 사람들은 천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아니어도 모든 날을 쉴 수 있었던 부자들, 성전 뜰에서 큰 손이라 불리며 환전도 크게 하고, 양과 소를 몇 마리씩이나 살 수 있었던 그 부자들은 구원을 몇 개씩이나 얻어냈습니다. 댓글 몇 마디, 기사 몇 줄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죽여도 그런 사람들은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십계명이 이 모든 판결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지금 율법이 우상인지, 아니면 진정 정의로운 하나님의 말씀인지,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는 그 율법이 도리어 우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발하며 항변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수는 죽는 순간까지 조롱을 당했습니다. 예수는 그 어떤 하늘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그렇게 죽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을 저주 받은 죽음이라고 욕했습니다. 나무에 매달려 죽은 사람은 저주에 받았다는 율법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죽음을 어리석다고 욕하기도 했습니다. 스스로를 하늘에서 온 메시아라고 선전하는 사이비들도 하루라도 더 연명하기 위해서 건강에 신경을 쓰는데, 예수는 스스로 십자가로 걸어갔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온 그리스도는커녕, 그냥 힘없는 나사렛 노동자였습니다. 표징은 없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저 그 나약함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렇게 우습게, 수치스럽게, 예수를 매달은 십자가는 저주와 어리석음의 형상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에 똑똑한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십자가 앞에 다 나와보세요. 유대 사람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철학자들은 지혜를 찾으나, 나는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십자가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이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진정 거짓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압제 앞에서, 바리새인의 우상숭배 앞에서, 독재정권의 폭력 앞에서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죽임을 당했지만, 그는 끝까지 참으로 떳떳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평생을 연명하며 거짓된 죽음의 삶을 살아가지만, 어떤 이들은 하루를 살더라도 진실하게, 영원토록, 생명의 삶을 누렸습니다. 여러분, 영원한 생명과 부활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십자가 안에 있는 것입니다.

 

191931, 수많은 청년들이 이른 새벽부터 독립선언서를 배포했고, 탑골공원에서는 오천명이 넘는 청년들이 집결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일제의 압제 앞에서 청년들이 떳떳하게 일어났습니다. 그 청년들은 거짓된 세상 안에서 진실을 외쳤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또 많은 이들이 연행되어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어리석은 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누가 이 고귀한 행진을 저주 받은 것이라며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진다는 것, 그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실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해방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는 3.1운동 이후 1945년에 해방을 맞이하게 되지만, 저는 이미 그 해방은 191931, 오후 230분경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청년들이 탑골공원에 죽으러 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정 삶을 살아내려고 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허물고, 삼일만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하신 그 말씀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시는 참된 표징이고, 증거가 맞습니다.

 

존경하는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다음 주일은 청년주일입니다. 저는 새민족교회 담임목사이기도 하지만, 나이가 젊으니 청년 목사지요. 저는 오늘 여기서 청년의 목소리를 대변하거나, 교회에 청년이 많아지는 방법을 얘기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오로지 여기서 십자가를 말합니다. 오직 이 십자가만이 여러분 구원의 증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 뒤에 걸려있는 저 작은 십자가들이 여러분 안에도 세워지길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마흔여섯 해 동안 지었던 그 성전이 무너지고, 사흘만에 다시 세워집니다. 70년의 세월을 이겨낸 향린교회, 만약 그 안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있었다면, 그래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혹시 장사하는 집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면, 다 허물어봅시다.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지난 역사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과 함께 봉기할 수 있었던 것을 자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 안에서도 차별과 혐오 앞에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 진실을 노래하는 향린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이 시대의 청년들은 그런 교회를 꿈꾸고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고난 받는 이웃에게 향기가 되어주는 향린교회 가운데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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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송사

 

 

고상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고, 지혜 있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었지만, 우리 이 십자가만을 자랑합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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