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새날
민수기 21:4-9; 에베소서 2:1-10; 요한복음서 3:14-21
주변에 계신 분들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당신의 새날을 응원합니다. 교우 여러분의 여정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함께 하길, 또 그 여정에 선물로 찾아오는 새날에 그리스도의 평화를 경험하시길 소원합니다.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청년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환기하며 이 시대의 청년 예수를 묵상하는 주일이죠. 청년 대상으로 그들을 주인공이라 생각하고 예배드리는 주일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청년 세대 구분을 막론하고 모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는 모두가 청년이라고 생각하며 하늘뜻펴기를 하려 합니다. 이 자리에서만큼 모두가 청년이 되는 기적을 경험하시길 빕니다.
저는 새날청년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여기 새날청년회가 한데 모여 있는데요, 교우님들께서도 오고 가며 또 주보 사진으로 새날청년회를 보셨겠지만, 무얼 하고 있는지, 누가 있는지, 이들은 어떤 소망을 품고 살고 있는지 궁금하실 것 같았습니다. 맛죠? 그래서 새날청년회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새날청년회는 이렇게 구성돼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봐 왔던 교우님도 있을테고 새로운 얼굴도 있을 겁니다. 새날청년회 교우님들이 우리교회에서 좋은 경험을 통해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 부탁드립니다.
임원진도 선출했습니다. 2024년 한 해 동안 새날청년회를 이끌어 갈 캡틴 안서영 교우님입니다. 안서영 교우님은 교우 여러분들께서 다양한 현장에서 예배하고 연대하면서 우리교회를 알게 됐고 그렇게 등록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뿌린 씨앗의 결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부회장 피은호 교우님과 총무 이혜진 교우님입니다. 피은호 교우님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모두 잘 아시죠. 새청의 중심을 버티고 있습니다. 이혜진 교우님은 청소년부에서 진급해서 올라와 큰 열정을 보여주시며 총무로 힘쓰고 있습니다.
겨울들살이 다녀온 지 벌써 2주가 지났습니다. ‘새날’을 주제로 파주 헤이리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아낌없는 기도와 지원 덕분에 즐거운 시간 보내고 왔습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올라 멀리 있는 줄만 알았던 북녘땅을 코앞에서 보며 새날을 상상해 봤습니다.
새날청년회는 올해부터 매주 틀을 정해 놓고 번갈아 가며 활동합니다. 첫째 주에는 영화나눔을 합니다. 담당자는 3달마다 바뀌지만, 지금은 정준모 교우님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서로의 관점을 공유하며 우리의 이야기로 가져오는 체험을 합니다. 둘째 주에는 독서나눔을 합니다. 유진 교우님이 담당하고 있는데요, 지금 시대의 관점을 책을 통해 발견해서 오늘과 잇대는 활동을 합니다. 셋째 주에는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원래 소풍을 갈까 하여 비워둔 주일인데요, 보통 월례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넷째 주와 다섯째 주에는 성서나눔을 합니다. 12월에는 마태복음 1~2장(예수의 족보)를, 1월에는 빌레몬서를 읽었고, 2월에는 들살이에 가서 성서골든벨을 했습니다. 성서골든벨을 했는데요, 모두 잘 맞춰서 유아부부터 청소년부까지 신앙교육 제대로 받았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저희는 오순도순 모여 가장 쉬워 보이지만 발을 들이고 나면 그 깊이에 놀라는 영화를 보고, 늘 피하고 싶은 책을 함께 읽으며 멀어져만 갔던 거리감을 좁혀보고, 익숙하지만 낯선 성서를 함께 읽으며 신앙을 고민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효능감을 얻고 서로의 고민도 덜고 있습니다.
1. 에베소서 2:1-10(장차 올 모든 세대)
함께 하는 것, 질문하고 고민하는 것,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법, 성서는 이런 고민을 한 보따리 담고 있죠. 오늘 읽은 에베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에베소서 본문은 자신들이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고 고백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라고 고백하죠. 그 은혜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고, 그 사랑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셔서 하늘에 함께 앉게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작품으로 불리며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책무를 쥐게 됩니다. 이러한 은혜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에게 받은 은혜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선한 일을 함으로써 보여줄 책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볼 “장차 올 모든 세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 또는 아직 책임이 부여되지 않은 곧 청년이 될 세대를 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장차 올 모든 세대’의 핵심은 종말 신앙입니다. ‘장차 올 세대’, 고대 그리스어로 ‘아이오신 토이스 에페르코메노이스’인데요, 이것을 직역하면 ‘임박한 시대’, ‘잇달아 일어날 영원’입니다. ‘아이오신’은 모든 역사를 관통하는 ‘시대’를 의미하고, 또 과거와 현재를 모두 포함한 ‘영원’의 뜻도 있습니다. 또 에페르코메노이스는 ‘임박한’, ‘잇달아 일어날’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장차 올 세대’는 한글성서에서 이해할 수 있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이나 청년세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해하는 종말, 임박한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새로운 시대를 함축하는 영원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서에서 끊임없이 되뇌이는 폭력의 시대, 그것에 대항하는 전복적 상상력, 포로기부터 지금 로마제국의 억압까지 계속되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응축된 세계 앞에서 그 의미는 더욱 솟구치죠. 그렇기 때문에 이 대목은 에베소서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에 누적된 억압에서 벗어날 임박한 종말을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다’, ‘이것을 가능케 할 책무가 우리에게 쥐어져 있다’는 걸 일깨워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역사를 포함하고 시간을 초월하기에, 오늘의 억압은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오늘의 억압은 과거에서부터 누적돼 온 모든 억압의 총체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말하는 허물과 죄는 단지 지금 우리가 범하는 잘못만이 아니라 극복하지 못했던 과거의 허물과 죄도 포함돼 있습니다. 또 선한 일로 종말을 앞당겨야 하는데 이 사명이 신앙의 모범으로 익히 들었던 모든 세대를 생략하고 건너 뛰어와서 지금 우리 에베소 공동체의 과제로 넘어왔다는 한탄과 위기의식도 어렴풋이 보입니다.
2. 요한복음서 3:14-21(영생)
이러한 진단은 요한복음서 본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영생’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서 본문은 바리새파 사람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의 말미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또는 경험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설명하는데요, 그것은 ‘다시 태어남’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조건이면서, 21절에서 말하는 ‘빛으로 나아가는’ 실천의 토대가 됩니다.
여기서 요한복음서는 믿음과 빛, 불신과 어둠을 대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빛으로 나아가는 실천을 통해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선언을 하고, 그 영생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십자가에 달린 것을 믿는 자만이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불뱀을 통해 불신자를 죽이고 다시 살려내시죠. 여기서 이집트 탈출 이후에 광야에서부터 우리의 허물과 죄가 돼 버린 해방에 대한 불신, 제국의 문화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합니다. 에베소 공동체가 자책했던 신전의 고기와 제국의 인프라, 이것 역시 니고데모의 질문을 통해 환기한 다시 태어남에 대한 의구심에 응축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를 믿는 것은 이러한 허물과 죄, 불신과 어둠을 뒤로하고 ‘그 거대한 권력도 우리 메시아를 죽이지 못했다’, ‘우리가 승리했다’고 공표하는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영생으로 안내한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생을 흔히 알듯이 죽지 않고 오래 살 거나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이집트의 억압 그리고 바빌론 포로기부터 로마제국의 억압까지 이어지는 폭력의 경험 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은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믿음으로써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부활 신앙을 통해 드러난다는 종말 신앙입니다. 또 영생은 지금 허물과 죄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일상의 기적을 이스라엘 역사에 누적된 억압의 역사를 청산하겠다는 개인의 결단으로 삶에서 드러납니다. 이 토대 위에서 예수님은 다시 태어나고 빛으로 나아 오는 결단을 촉구합니다. 영생은 그 결단 이후에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것이죠.
3. ‘세대’와 ‘영생’: 종말 신앙의 요체
임박한 시대와 빛으로 나아가는 영생의 삶, 이 모든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합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누적되고 전가돼 온 시대의 과제라는 진단,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영생으로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는 이들의 강한 책임의식으로 연결됩니다.
저는 여기서 오늘날 청년들의 한탄을 듣습니다. 대개 청년문제로 불리는 것들, 일자리, 주거권, 여성, 퀴어, 군대문화 등이 있습니다. 대학교는 늘 군필자의 복학에 탈을 겪죠. 제가 다녔던 학교도 그랬습니다. 군필 복학생들은 군대의 문화를 학교로 옮겨와 재현하고 싶었고, 그 안에서 또 하나의 군대를 만들었죠. 학교는 단지 학문의 장이 아니라 또 하나의 사회로 많은 탈을 겪고 서로 대립하는 장입니다. 오늘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년세대를 막론하고 모두가 경험했을 테죠. 좀 더 요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에브리타임을 아십니까? 대학교별로 형성된 SNS 성격의 모바일 커뮤니티입니다. 여기에는 강의 후기, 학교 앞 식당 후기, 동아리 홍보 등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요즘 큰 화제가 된 사건이 있죠. 한 대학교의 학생들이 열악한 휴게실과 노동권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으로 학내에서 투쟁을 벌인 청소노동자들을 고소했습니다. 수업을 방해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에브리타임이라는 모바일 커뮤니티에서는 고소에 지지하는 수많은 글이 게시됐고, 지지 댓글도 다수였습니다. 청소노동자들이 왜 투쟁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헤아리기보다 자신의 소위 수업권을 앞세우며 고소를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했죠. 이러한 SNS 커뮤니티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혐오현상은 사회의 혐오현상을 온라인상에서 재현하고, 또 그것을 사회에서 청소노동자 고소와 같은 사건으로 재생산합니다. 이뿐만일까요. 모두에게 열린 유튜브 댓글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죠. 이 모든 것들이 청년뿐만 아니라 모두가 당면한 문제입니다. 그래도 청년세대가 한 가지 특수하게 당면한 건, 이렇게 자신들 세대 안에서 공회전 도는 혐오 현상을 포함한 여러 사회문제에 누구 보다 취약하게 또 한복판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두된 거의 모든 사회문제가 청년문제로 불리고 있죠. 그런데 과연 청년들만 해당된 문제일까요? 사실 모두의 문제입니다. 모두가 과제로 삼고 있는 문제입니다. 이전부터 있었던 모두가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 경험은 지금 청년세대 뿐만 아니라, 세대를 막론하고 거의 모두가 청년시절에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윗세대를 질책하는 게 아닙니다. 단 한 가지, 우리 모두의 과제이란 걸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청년 문제로 보이는 여러 사회문제들, 청년들이 헤쳐나갈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당면한 우리의 문제라는 거죠.
요한복음서의 영생에 대한 믿음은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나날이 부활하는 영생의 삶으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결단을 요청합니다. 시대를 거슬러 우리에게 온 수많은 과제들을 나날이 부활하며 빛으로 나아가겠다고 고백하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줄 뿐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결단만이 남아 있습니다.
4. 역사의 파도: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지난 삼일절에 우리교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을 다녀왔습니다. 산상기도회 후에 한 팀은 안산을 올랐고, 다른 팀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관람을 했습니다. 관람 첫 코스가 바로 저 설치미술을 보는 순서였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자리에 머물며 저 작품을 봤습니다.
이 작품의 이름은 “역사의 파도”입니다. 이배경 작가의 작품이고, 2021년에 설치됐습니다. 이 작품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기념하고, 일제에게 강탈된 주권과 국토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선열들의 고귀한 독립정신과 광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향후 계속될 미래 대한민국의 역동성을 표현하고 있다.” 저는 이 작품에서 역사의 흐름을 봤습니다. 저기 보이는 균일한 사선들이 연 단위로 시대를 나누는 연대기적 시간의 구분선이고, 그것을 가로지르는 곡선이 역사의 분기점이 된 사건들의 연결선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대개 숫자로 표현되는 연대기적 시간을 구심점으로 기록되고 기념되어 왔지만, 민중사건은 시간의 개념과 연대기적 시간의 구획을 뚫어 또 다른 사건을 일으키고, 그 사건이 나선형의 선으로 역사의 활화산맥을 선명하게 그어 냅니다. 저 작품의 연결선처럼 말이죠.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이 사진을 보시면 곡선에는 빛이 있는데, 그 빛이 끊어져 있죠. 역사의 파도가 순환돼서 끊임없이 흘러야할텐데, 그렇게 사건의 곡선이 순탄해야 종말을 경험할 수 있을텐데 빛이 끊어져 있는 지점이 보입니다. 저 끊어진 지점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 수 있죠. 국가보안법의 존재, 전쟁 위기, 혐오, 백래쉬, 무시. 한편으로는 해방의 대열에 따라오지 않는 주로 MZ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청년세대로 보일 수도 있죠. 하지만 늘 그래왔듯 우리의 역사가 놓쳐왔던 과제들의 빈자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당면한 청년문제가 모두가 풀어내야 할 숙제라면, 빛이 비어 있다는 걸 이제 봤다면 나날이 부활하는 영생을 통해 빛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그 책무를 수행하며 채워 넣어야겠죠. 그 과제의 목격자는 청년세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입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좌파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저서에서 이러한 말을 합니다. 이 말은 과거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와 은밀한 약속을 맺었고, 그 과거의 사람들로부터 거슬러 오는 미약한 메시아적 힘이 오늘의 우리를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과제, 그것을 전달받은 우리, 하지만 그것은 단지 폭탄을 떠넘긴 게 아니라 은밀하게 맺어진 약속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역사의 파도처럼 과거와 연결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역사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 사이에서 세대를 나눠 책무를 달리 부여하는 건 큰 의미가 없습니다. 또 이 은밀한 약속을 어기는 거겠죠.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우리가 전세대와 아울러 나날이 부활하는 영생을 빛으로 뿜어내야 하는 시점입니다. 그렇게 새날이 임박한 시대는 우리와 하나님을 끈끈하게 연결하는 메시아적 힘으로 가능할 겁니다.
하늘뜻펴기를 닫기 전에 우리 새날청년회 교우님들은 새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신지요? 근데 지금 이 자리에서 물어보면 아무도 하지 않겠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인터뷰 영상 보시겠습니다.
5. 날이면 날마다!
짧지만 강렬하게 말씀들 잘하죠? 우리 청년회의 이름인데 그걸 분리해서 그 뜻을 생각해 보자니 순간 어색하기도 했을 겁니다. 또 신학적으로 말하면 종말론적이기도 하고, 희망차기도 한 말이니 그 뜻이 거대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강렬한 메시지를 다들 말해줬습니다. 새날청년회에게 새날은 ‘날이면 날마다’, 새출발, 미완성이지만 앞으로 더 다양하게 채워나갈 공간 같은 것, 준비되지 않은 것,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면서도 의지가 반영된 새날은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나는 변하겠다는 의지, 또 매일매일이 새날이고, 설레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새날청년회는 이렇게 새날의 여백을 채워나가고 있습니다. 준비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저마다 당면해 있는 상황에서 매일매일 새 출발하며 변하겠다는 의지로 말이죠. 새날에 대한 이런 이해들이 유정 교우님이 말씀한 ‘날이면 날마다’로 정리됩니다. 새날을 ‘날이면 날마다’ 부활하는 영생을 통해 경험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새날을 향해 교우 여러분들도 새날의 빛을 발하며 나아가시길 빕니다. 새날청년회를 비롯한 이 땅의 청년들이 써 내려가는 새날의 이야기와 전세대가 분투한 이야기, 그리고 날이면 날마다 부활할 것을 결단한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가 역사의 파도에 합류하여 비어 있는 빛의 자리를 채우길 소원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합시다.
파송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죽음을 넘어 나날이 부활을 경험하는 영생을 허락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를 뒤로하고 일상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기적을 경험하십시오.
우리는 과거와 오늘을 연결하는 끈끈한 메시아적 힘에 의지해 빛으로 나아가렵니다.
나날이 부활하며 새날을 상상하는 자유인으로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