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되살리기의 반(反)역사성

by 통일둥이 posted Mar 15, 2024 Views 10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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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들판

이승만 되살리기의 반()역사성

강정구 전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mindle@mindlenews.com

 

민들레 들판

입력 2024.03.15 09:48

수정 2024.03.15. 11:30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585

 

역사적으로 사장(死藏)된 인물 다시 끄집어내서야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윤석열 정권의 극단적 역사퇴행성에 올라탄 이승만 되살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영상시대를 맞아 건국전쟁이라는 영화를 통한 역사 되짚기의 경박한 움직임 또한 우려스럽기 짝이 없다. 여기에 편승하여 송현동에 이승만 찬양소를 만들겠다는 정치인의 포퓰리즘적 발 빠름 역시 개탄스럽다.

 

이에 이승만에 관한 역사적, 더 엄밀히는 민족사적 평가를 체계적으로 내릴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미 19953<한국사연구 88>이승만에 대한 민족사적 평가를 내린 긴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 짧은 글에서는 축약적인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예상 밖의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12일 서울 시내 영화관 매표기. 2024.2.12 연합뉴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생애와 정치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예상 밖의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12일 서울 시내 영화관 매표기. 2024.2.12 연합뉴스

이승만의 생애는 조선조 말 일제의 조선침략이 본격화하는 시점에서부터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분단, 한국전쟁, 전후복구기, 4월혁명, 하와이 망명기간에까지 걸친다. 이 가운데 우리들과 민족의 삶과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한 시기는 해방공간과 남북분단이 실현되는 제1공화국 수립기다. 그 다음으로는 분단정부 수립 이후 나라의 기틀을 갖춰나가는 이승만의 집권기다. 이 세 기간에 그는 가장 선봉에 선 장본인이다. 그 외의 기간 그의 족적은 미미한 것으로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 세 시기는 우리 민족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역사행보를 하는 역사 갈림길 또는 민족사적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는 그 이후 수십 년 또는 백여 년의 역사방향을 거의 고정시킨다는 점에서, 곧 운명을 가른다는 점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기이다. 그래서 더더욱 중요할 뿐 아니라 제대로 된 평가가 요구된다.

 

먼저 해방공간을 보자. 해방은 조선 사람에 의한, 조선 사람을 위한, 조선의, 사회를 새로 만드는 새판짜기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일제 식민지잔재 청산을 이뤄야 한다. 왜냐면 해방이전의 정치·경제·사회 구조는 조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자를 위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이를 조선 사람을 위한 새 구조로 탈바꿈 시켜야 한다. 또한 그 구조 속에 제국주의 일본의 앞잡이 역할을 자행한 부일(附日)협력자들을 청산하고,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정의롭고 유능한 조선 사람으로 완전 교체해야 한다.

 

, 완전히 새로운 집을 짓고 또 그 집주인도 완전히 바꿔야 하는, 사회개벽(開闢)을 일구어야 하는 시기가 바로 해방공간이다. 그에다 미국이 주도하여 조선을 38도선에서 두 동강 낸 지리적 분단을 타파하여 민족통일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여기에다 나라의 주권을 외세에 의해 무력으로 탈취 당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새로운 나라를 철저히 민족자주적인 나라로 건설하여야 한다. 또한 당시의 인류사적 보편 규범이었던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져야 한다. 아울러 도탄(塗炭)이 난 민생의 삶을 구제하는 민생민중경제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바로 이 길이 당시 해방공간의 우리 민족사가 요구하는 당위적 역사행보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추구한 길은 이러한 우리 민족사의 올바른 길을 완전히 배반한 반역(叛逆)의 행로였다.

 

첫째, 친일청산에서 이승만은 부일협력자에 대한 청산은커녕 이들을 정부 요직에 등용했다. 국내 권력기반이 없던 그는 귀국하자마자 부일협력자 집산체인 한민당과 손잡고 친일파를 옹호하며 자신의 권력을 키워나갔고, 정부 수립 후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과 이에 따라 설치된 반민특위를 해체시켜 친일파 청산을 좌절시켰다. 더 나아가 이들을 중용하여 친일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고 정착화하였다. 새판 짜기가 아니라 옛 판을 더욱 친일파 중심으로 공고히 한 것이다.

 

악명 높은 일제 고등계 형사인 노덕술 석방을 대통령이 직접 강요하고, 반민특위 부위원장인 김상돈 의원 해임 동의안을 내고, 경찰의 6·6 반민특위 습격사건을 일으키는 등등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와해 작전을 펴 결국은 친일파 청산을 무산시켰다. 더 나아가 한승주가 밝힌 것처럼 장경근·한희석·이익흥·임철호·김익중·최인규 등 일제치하 사법부와 경찰 등에 근무한 부일협력자들을 중용하여, 이들이 3·15부정선거를 일선에서 주조(鑄造)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 친일파가 권력행사 기관, 특히 공안기관의 고위직을 압도적으로 장악하였다. 치안국장은 1대 이호에서 7대 윤후경까지, 서울시경찰국장은 2대 김태선에서 7대 변종현까지, 합참의장은 1대 이형근에서 14대 노재현까지, 육군참모총장은 1대 이응준에서 21대 이세호까지, 대법원장은 2대 조용순에서 7대 이영섭까지 모두 친일파들이 잇따라 장악했다.

 

특히 내무부장관은 1대 윤치영에서 7, 9, 11, 12, 13, 14, 15, 17, 18, 19, 20, 22, 23, 24, 25, 26, 27, 28, 30, 31, 32, 36, 37대 김치열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거의 독식했다(한겨레신문 1995.2.25.). 참고로 북의 경우 일제의 경찰·사법·검찰 등 공안 관련 친일파는 재생의 기회를 절대 허용하지 않고 사회 격리시켰다. 단지 기술직에만 재생의 길을 허용했을 뿐이다.

 

둘째, 친일 물적 및 제도적 구조청산에서도 이승만은 인적 구조청산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실행하지 않았고 또 지연시켰다.

 

이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는 미국의 대() 조선 군사정부에 있다. 그렇지만 그 이후 국가 주권을 장악한 이승만 또한 이에 못지않게 책임질 일이다.

 

물적 구조청산은 무엇보다 일본인과 친일파 재산을 몰수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민생도탄을 덜어주고, 치안유지법 등 일제의 잔악한 악법 철폐 등을 서둘러야 했었다. 그러나 친일파재산은 제대로 몰수된 적이 없고, 민생을 위한 토지개혁은 미루다가 해방된 지 5년 뒤에서야 늑장으로 또 비() 철저하게 이뤄졌고, 치안유지법 등 악법은 국가보안법 등으로 재활용 및 강화되었다.

 

대조적으로 북측은 19463월 혁명적인 토지개혁을 완료했고, 810일자 산업, 교통, 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관한 법령으로 기존 일본인 소유는 물론 민족반역자 소유의 모든 산업·상업·문화 시설들을 몰수했고, 모든 일제의 악법을 일소했다. 남측의 늑장부린 토지개혁도 당시 조선민중이 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현재 소작지 중 남측은 37.5%만 분배했고 북측은 99%를 몰수·분배했다. 남측의 경우 토지개혁을 5년 동안 지연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지주의 강매 등으로 거의 20% 넘게 소작지가 토지개혁 이전에 이미 사라졌다. 또 토지개혁 중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 일가처럼 용도변경이나 범법행위로 면제를 받았기 때문에 기존 소작지 60% 이상이 토지개혁의 대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 결과 전체 인민의 65% 가까이를 차지했던 농민, 곧 소작농민과 자영농의 삶이 향상될 조건을 제대로 갖출 수가 없었다.

 

셋째, 민족통일정부수립에서도 마찬가지다.

 

해방과 동시에 이뤄진 38선을 경계로 한 지리적 분단이 남북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정치적 분단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으로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했다. 그렇지만 유아독존적인 이승만은 분단을 고착화하는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독립청원기부터 무장투쟁을 배격했고, 중국 주재 임시정부의 김구·김원봉을 테러노선이라고 비난했고, 해방공간 압도적 우세를 점유했던 좌익을 친일분자처럼 대하겠다면서 좌·우 연합정권 가능성을 봉쇄했다. 더 나아가 19466월 이른바 정읍발언 등으로 분단 실행의 앞잡이였고 주역이었다.

 

여운형·김규식 주도의 좌우합작이 탄력을 받자 그는 미국을 방문하여 좌우합작 와해와 단독정부 조기수립을 위한 청원외교를 벌였다. 1948년 초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망설이자 친일파 무리인 모윤숙, 박순천, 김활란 등을 동원한 미인계로 이들을 포섭하는 파렴치(破廉恥)를 자행했다. 모든 좌익과 김구 중심의 우익, 김규식 중심의 중도세력까지 보이콧한 5·10단독선거를 축하하는 축하국민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이처럼 민족분단을 통한 권력 장악에 혈안이었고, 그의 이러한 반()민족성과 반()통일성은 1공화국까지 지속되었다. 무력 북진통일론을 정착시켰고, 진보당사건으로 조봉암을 사형시켜 자주적 평화통일논의 자체를 원천봉쇄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넷째, 민족자주 구현도 마찬가지다.

 

해방은 외세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러한 비극의 역사적 전철을 되밟지 않기 위해서는, 민족의 자주를 절대규범으로 올려놓고, 그 구현을 위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해방된 뒤에도 더욱더 외세 의존적이었고, 권력 장악 후에도 민족자주 국가의 구현을 배반했다.

 

그의 외세의존성은 일관된 독선적 외교제일주의에서 두드러진다. 우리의 문제를 좌우합작이나 남북협상을 중심에 두고 이를 근거로 삼아 외세활용을 꾀하는 것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상해임시정부 시절 그는 조선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감히 독단적으로 제안하였고, 194612월 미국을 방문해 독립에 대한 유일한 가능 방도는 미국 국민의 호의에 호소하는 데 있다면서 철저히 외세인 미국의 예속하에 분단정부수립을 꾀했다.

 

그의 반() 민족자주의 극치는 195411월 발효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그 부속문서인 한미합의의사록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는 군사주권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대미예속을 구조화 한 것이다.

 

이는 정전협정 460(평화협정과 외국군 문제 해결 조항)을 위배했을 뿐 아니라 미국 자의에 의해 언제든지 무력행위나 전쟁이 가능하고(2), 한국의 사전 동의 없이 미국 헌법 절차만 지키면 선전포고나 무력행위 가능하고(3), 한국 영토 어디든 한국 사전 동의·협의 없이 미국 임의로 군사기지화, 군사배치, 이동 등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해방 80년이 되려는 지금까지도 글자 하나 변경되지 않고 있다.

 

이의 부속문서인 한미합의의사록 또한 포괄적으로 국가주권을 제약하고 미국에 예속되는 합의다. “국토통일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 미국과 협조한다로 민족통일까지도 외세인 미국과 사전 협의하도록 했다. “국제연합군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위한 책임을 부담하는 동안 대한민국 국군을 국제연합군사령부의 작전지휘권하에 둔다로 작전지휘권을 넘겨 군사주권도 제대로 없는 나라로 만들었다. “투자기업의 사유제도를 계속 장려한다로 자본주의를 강요당했다. ”부록 B에 규정된 바의 국군병력기준과 원칙을 수락한다로 국군의 병력 수까지 통제당했다. 이는 그토록 우리가 갈구했던 민족자주와는 180도 어긋난 길이다.

 

다섯째, 민주주의 기틀 다지기에서 이승만은 반()민주의 극치를 달렸다.

 

1948121일 반()민주 대표 악법인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이어 1949년 한 해 동안에 118620명이 투옥되었다. 또한 시민사회를 국가의 들러리조직으로 묶어 관제 대중동원이라는 전체주의적 통치유형으로 나아갔다(이호재, 1988). 이 관제 대중조직은 그의 사조직이었던 독립촉성회를 확대한 국민회(관제 데모와 관제 국민대회 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 여러 청년단체를 통합한 2백만의 대한청년단, 중고등에서 대학까지 모든 학생을 묶은 학도호국단이었다.

 

이러한 반()민주 파시즘적 통치는 미국의 ECA 경제고문이었던 번즈박사가 "현재의 경찰국가적 경향은 530일로 예정된 선거가 경찰과 청년단체에 의해 지배될 것이기 때문에 위원단으로 하여금 선거를 감시할 것을 장려하는 게 바람직스럽다고 제안할 정도였다.

 

번즈가 예측한 대로 19505·30선거에서 불법·탄압·관권이 판을 쳤다. 옥중 당선된 근로인민당 부당수였던 장건상의 증언은 이를 입증한다. “경찰이 간섭하였고 평양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모략도 있었다. ‘장건상은 공산당이니 국회의원으로 뽑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였다....나의 선거운동을 하던 30여 명의 동지와 친지들이 잡혀갔음을 알았다. ... 선거 후 전국에서 제2의 득표수로 당선된 내가 감옥에 수감된 것을 안 미국 영사와 유엔측 대표는 이 대통령을 찾아가 내가 수감된 죄목과 정확한 증거를 요구했다.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나는 원내에서 발언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불법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집권 2년 뒤 실시된 19505·30선거에서 이승만은 엄정한 역사의 심판을 받아 권력상실은 시간문제였다. 전체의석 210석 가운데 집권여당인 대한국민당은 24, 국민회 등 친여세력을 합쳐도 겨우 57석이었고, 무소속이 무려 126석으로 60%를 차지했다.

 

또한 서울의 성북구에서는 상해임정의 조소앙과 미군정의 대명사였던 조병옥이 대결해, 조소앙이 전국 최다득표를 했고, 전국 제2의 득표는 여운형 직계인 위의 장건상이 부산에서 차지했다. 이는 한국전쟁 이전인 1950년 당시의 유권자가 보수보다는 진보세력을 전폭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이렇게 권력상실이 가시화하자 이승만은 1952년 전쟁 중에 친일파 군인 원용덕을 동원해 계엄령을 선포하고는 군과 경찰로 국회를 위협해 불법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과시킨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에 <런던 타임즈>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개탄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195411월 사사(四死) 오입(五入)이라는 반올림 셈법을 악용한 억지논리로 초대 대통령 중임 제한규정을 철폐시켜 종신 독재집권의 길을 열었다. 그렇지만 유례없는 3·15불법·부정선거로 드디어 4월혁명에 의해 축출되었다.

 

여섯째, 이승만은 수없이 많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러 인간의 절대적 인권인 생명권을 앗아간 반()인권의 대명사였다.

 

인권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제반 조건을 부여받을 권리이다. 여기에는 생존권, 평등권, 자유권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 그렇지만 남녀노소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값진 것은 생명이다. 그래서 지구촌 어디든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은 가장 엄격히 다뤄지는 범죄이고 생명지상주의와 같이 절대적 인권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절대적 인권인 생명권을 무수히 많이 짓밟은 자가 바로 그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집권 3개월째인 194811월부터 제주에서, 해안선 5km 이상 떨어진 지역을 무조건 적성(敵性)지역으로 지정하여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미군정에서부터 이승만정권에 이르기까지 무려 3만여의 제주도민이 이 4·3항쟁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다. 대부분은 무고한 민간인이었다.

 

당시 19485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실시된 5·10선거에서, 제주도의 2개 선거구가 무효화되어 선거자체의 정당성이 문제가 되었다. 제주 4·3항쟁 때문이었다. 여기에다 대한민국 수립 2개월째인 19481019일 여순항쟁이 발발하여, 이승만정권의 생존가능성이 국제적으로 의문시되었다.

 

유엔의 5·10선거 승인에 즈음하여 미()선거 상태인 제주도의 선거구가 걸림돌이 되었고, 김구나 김규식 등의 지도하에 통일운동이 활성화되는 등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 상실과 생존위험성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에 초토화 작전을 통하여 긴급히 4·3항쟁을 평정하고 재선거를 실시하여 정권기반을 강화하고 분단을 고착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19481019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 2개월 만에 여순항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이승만정권은 22일 법제화도 되지 않았던 계엄령을 선포하고, 한 달여 동안 육··공 합동 진압작전과 2개월간의 관련자 색출작업을 진행했다. 이 색출과정에서 보복적인 테러, 학살, 약탈, 방화가 대대적으로 행해졌다.

 

전체 주민을 학교 등 공공장소에 집결시켜 놓고 주로 머리가 짧은 자, 군용팬티를 입은 자, 손바닥에 총을 든 흔적이 있는 자 등외모에 의하여 부역자를 골라내었다. 일부는 즉석에서 곤봉, 개머리판, 체인 등으로 무참하게 타살되거나 또는 총살을 면치 못하였으며” “백두산 호랑이로 소문난 제5연대 김종완 대대장이 교정의 버드나무 밑에서 일본도를 휘둘러 즉결 참수처분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식으로 최소한 1만 이상의 민간인이 무고하게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7월 초부터 감행한 보도연맹원 약 20-30만의 학살도 있었다. 이 보도연맹원에 대한 초기의 집단적이고 대대적인 학살은 그 이후 연쇄적 학살의 고리를 형성했다. , 보도연맹에 연루되어 학살된 유가족이 그 이후 진주한 북한인민군에 힘입어 남한의 공무원, 경찰, 지주계급 등에 대한 보복살인을 자행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바로 수복 후 국군과 우익 측 보복의 악순환을 가져와 더욱 더 동족상잔(同族相殘)을 부추겼다.

 

이러한 보도연맹회원 외에도 한국전쟁 초기에 형무소에 있던 좌익세력 등이 수없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데일리 워커(Daily Worker)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 기자가 쓴 책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에서 다룬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저질러진 대전 형무소 수감 좌익세력 학살사건이 대표적이다. 1950628~7173차에 걸쳐 7천여 명이 집단 사살된 사건으로 지금도 유해발굴이 진행되고 위령비 건립 문제가 논의 중이다.

 

이러한 민간인학살은 고양, 함평, 영광, 문경, 대구, 경산, 부산, 함양, 산청, 거창, 충무, 거제 등등 전국적, 조직적, 체계적 현상이었다. 4월혁명 이후 거의 남한 전역에 걸쳐 구성된 유족회, 국회진상조사단의 조사 등으로 그 역사적 진실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고 정희상·이태섭 등은 약 1백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5·16쿠데타 이후 이들 유족회는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침묵을 강요당해왔고 역사적 진실 또한 은폐되어왔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하에서 설립된 진실화해위원회 발족을 계기로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으나 지금 윤석열 정부에서는 극우인 김광동의 위원장 부임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지금까지 선택적으로 살펴본 데서도 확인되지만, 이승만은 우리의 민족사를 반()민족, ()민주, ()통일, ()민중, ()자주, 친일친미의 친()외세, ()인권으로 이끌어 왔던 반()역사의 주인공이다. 이러한 이승만으로부터 비롯된 민족사의 훼손을 치유하기는커녕 윤석열 정권의 무도함은 이미 역사적으로 사장(死藏)된 이승만을 다시 끄집어내어 미화운동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응당 우리 모두가 나서서 이승만이 우리 민족사에 남겨놓은 오욕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내고, 그 뼈아픈 상처를 치유하여, 우리 민족사를 청아하게 일구는 역사바로세우기와 겨레바로세우기에 나서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