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지만 한 걸음 내딛을 때 ㅣ 유연희 ㅣ2024-03-24

by 김지목 posted Mar 25, 2024 Views 10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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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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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교회; 2024Palm/Passion Sunday

 

두렵지만 한 걸음 내딛을 때(11:1-11; 50:4-9 상반절; 2:5-11)

 

Greetings!

안녕하세요? 오늘 종려주일, 고난주일에 주님의 평화와 사랑이 향린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향린, 향기로운 이웃 교회 성도님들, 반갑습니다. 향린교회란 일찍이 넘나 예쁘게 지은 이름입니다. 요새는 교회 이름을 몇 번씩 바꾸기도 하던데요, 어떤 교회는 처음 이름이 원두막교회여서 새로 바꾸었더라고요(예수인교회). 음 바꿀만한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향린은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이름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의미 있고 예쁜 교회 이름입니다.

다만 도전이지요. 교회 전체가, 교인 하나하나가 향기로운 이웃으로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부르심을 늘 코앞에서 대하니 도전이지요. 그러면서 이 도전은 영예로운 초대입니다. 보통은 생존에 급급해서 나 자신, 내 자식, 내 가족, 내 자손 살길만 챙기기 바쁜 인생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자는 초대입니다. 그 초대를 적극 받아들인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향린교회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감동인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향린 성도님들은 이 교회 나오는 것이 일상이고 몸에 배어 잘 못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밖에 있는 사람들은 향린과 교인들에 대해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종려주일/고난주일

오늘은 교회력에서 가장 성스러운 주간(Holy Week)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종려주일, 고난주일로 지킵니다. 영어로 Palm/Passion Sunday라고 표기합니다. PalmPassion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왕의 입성을 축하하는 축제일로서의 종려주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길을 시작하는 고난주일입니다. 수난과 영광, 죽음과 부활이 동전의 양면인 것입니다. 오늘을 시작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그의 고난과 죽음을 지켜보며 아파하고, 우리 삶 속 고난과 죽음을 음미하고, 마침내 그와 함께 일어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를 묵상하는 향린 성도 여러분, 마음을 열고 고대와 현대, 한국과 세계, 나와 타자를 두루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무언가 꼭 행동할 필요가 있는 것인데, 두렵지만 한 걸음 내딛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생각하고 힘을 얻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겉바속촉 이야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빌려온 어린 나귀를 타고 승리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을 압축하는 사건이므로 너무 중요해서 네 복음서는 이 얘기를 포함해야 했습니다.

보통 종려주일 이야기는 어린이들의 즐거운 환호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낮은 나귀를 타고 천천히 오시는데, 어린이들과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예수님을 찬양한다는 이미지, 예수님이 아빠미소? 같은 표정으로 찬양을 받으신다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예수님이라는 대중적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는 어린이들이 명시되어 있지 않고 군중이라고만 나옵니다. 아마 몇 가지 잘 알려진 찬송 때문에 즐거운 환호, 어린이들, 따뜻한 축제 이미지가 부각된 것 같습니다. 어린이 찬송가에도 나왔다고 기억하는데요, 한국어 가사는 기억이 나지 않고 영어로만 기억나네요.

“Tell me the stories of Jesus I love to hear.” 제가 어린이 버전으로 불러보았는데, 음치인 것을 간파당했네요. 우리 찬송가(141)에도 호산나, 호산나 다 노래 부른다. 수많은 아이들이 즐거운 노래로.”라는 가사가 있지요. 3절까지 기쁨 가득한 가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성 이야기는 겉으로 신나지만 속으로는 무거운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그 무거운 발걸음을 두렵지만 내딛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겉바속촉(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이야기, 또 다른 의미의 겉바속촉한 이야기, 아픈 눈물로 속이 촉촉한 오늘 이야기는 스가랴 9장의 빛 속에서 그 촉촉한 속내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분명 예수님이 스가랴 99절의 예언 말씀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스가랴 9:9-12

기원전 6세기 말 유다가 바빌로니아 손에 망했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류층을 중심으로 바빌로니아에 끌려가 강제 이주 생활을 했습니다. 스가랴서는 그런 강제 이주 생활을 마치고 유다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의 현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처음에 고향땅에 돌아왔을 때는 유다가 독립국이 되고 다시 다윗 왕정을 회복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가 지배를 이어갔습니다. 페르시아는 유다 사람들이 고향 땅에 돌아가게 해주고 재건 사업도 지원하는 등 얼핏 바빌로니아보다 유화정책을 편 것 같지만 무거운 세금과 군사력으로 유다를 철저히 지배했습니다. 제국과 식민지 관계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스가랴서 1장에서 8장까지는 포로에서 돌아온 직후의 수십 년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9장에서 14장까지는 페르시아의 통치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4세기에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시기에 기록된 느헤미야서 속 기도문에 그런 상황이 엿보입니다. “현재 우리는 종입니다. ... 우리 땅에서 종이 되었습니다. 이 땅의 풍부한 수확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주께서 우리에게 세우신 이방 왕들에게 돌아갑니다. 그들은 또한 우리의 몸과 가축을 마음대로 관할합니다. 우리는 큰 고난에 처해 있습니다”(9:36-37).

그래서 스가랴 99-12절 말씀은 위로의 말씀입니다. 오랫동안 유다의 회복을 갈망했는데 제국의 지배가 점점 더 견딜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스가랴가 이런 예언을 한 것입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너에게는 특별히, 너와 나 사이에 피로 맺은 언약이 있으니, 사로잡힌 네 백성을 내가 물 없는 구덩이에서 건져낼 것이다. 사로잡혔어도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아, 이제 요새로 돌아오너라. 오늘도 또 말한다. 내가 네게 두 배로 갚아주겠다.”

스가랴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점점 희망을 잃고 있었습니다. 이생망이다. “이번 생은 망했다하면서 종말론적이고 저세상적인 구원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스가랴의 예언은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점점 더 실현 가능성이 보이지 않더라도 희망이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예언에는 정의롭고 공평한 정치 질서가 이 세상에서 여전히 가능하다는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공의롭고, 구원을 베풀고, 겸손한 왕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왕은 말을 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옵니다. 왜 나귀일까요? 성서시대에 나귀는 매우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나귀는 지구력이 좋아 짐을 잘 나를 수 있었고, 밭갈이를 하거나 연자매를 돌리는 데도 쓰였고, 사람들의 이동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나귀는 기초 필수품이어서 웬만한 가정에 나귀 한 마리 정도는 있었습니다. 한 사회가 나귀를 얼마나 보유했는가는 그 사회의 상대적 번영을 평가하는 기준이었습니다.

말은 어땠을까요? 유력한 정치인이나 군인들만이 말을 탔습니다. 물론 나귀도 군사적으로 쓰임새가 있었지만 평민의 삶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은 대개 국가가 소유했습니다.

스가랴가 말하는 앞으로 오실 왕은 기존 왕들과 다른 게, 평민의 동물인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다른 왕들은 군마와 병거를 늘리고 활과 창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었는데, 이 왕은 그런 군사 장비들을 다 없앱니다.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화친을 선언합니다. 이 왕은 땅 끝까지 평화로 다스리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땅에서 종이 된 유대 사람들이나 아직 귀환하지 않은 디아스포라가 희망을 잃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평화의 왕이 그간의 고생에 대해 두 배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까 성도님들이 성경구절 한절을 다함께 읽으셨죠.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여기서 다윗의 나라라는 구절에 뭔가 거부감이 들으셨을 수 있습니다. 지금 팔레스타인을 무차별 공격하는 이스라엘이 떠올라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에서 다윗의 나라 그리고 그 나라의 왕이란 역사적 왕국과 개인을 뜻하기도 하지만 메시아적인 비전에서 나오는 상징적인 용어로도 자주 쓰입니다. 여기 스가랴서가 그 한 예입니다. 앞으로 도래할 다윗의 나라, 메시아적인 왕을 선포하는 것은 전복적입니다. 현재의 왕과 그의 통치는 억압과 폭력이 가득하고 평민은 죽어나가니 틀렸다고 외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거리공연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아예 스가랴의 예언 내용을 무대에 올려 공연을 하셨습니다. 거리에서 군중에게 거리 공연을 통해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스가랴의 예언을 알고 있는 사람들, 현재 로마의 압제와 유대 지도층의 억압 속에서 층층이 억눌려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을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들, 볼 눈 있는 사람들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환호한 군중이 그러한 기대를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스가랴서에서 도래할 왕이 온순하다고 번역했고,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겸손하다고 번역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예수님의 도발적인 공연 메시지라고 본다면 온순과 겸손은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아니는 구약성서에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을 자주 가리킵니다(10:2; 140:12). 그렇다면 온순하게 (또는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가 아니라 가난하고 (또는 가난해서) 나귀를 타고라고 번역해야 더 정확합니다. 스가랴는 아니라는 말을 써서 메시아적인 왕과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동일시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의도적으로 서민의 나귀,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온순하고 부드러운 것과 연결하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처음 한 일은 성전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11절에 예수님이 거기서 모든 것을 둘러보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에 들어와 맨 먼저 성전에 들어가셨을까요? 성전에서 모든 것을 둘러보시며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공관복음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하신 첫 행동 중 하나가 성전에 가셔서 상인들의 탁자와 의자를 뒤엎으며 성전을 정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21:12-13; 11:15-17; 19:45-46). 성전 정화 본문은 마가복음에서 바로 아래 15-19절에 나옵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하는데 너희가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셨지요. 바로 이런 언행을 하시는 분은 온순이라는 단어와 그리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죽으러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저 겸손하고 온순하게 고개를 숙이고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알았고, 그게 정말 쉽지 않았지만 결국 그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강도들의 소굴운운하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대놓고 나 잡아가라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예수를 없애버릴까 하고 방도를 찾게 되었습니다.

스가랴는 제왕과 제국에 반대하며 그와 대비되는 평화의 왕과 그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온몸으로 전유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과 그 후에 겪을 일에 대해 두려워했고 분명 입성을 많이 망설였을 것이고, 어려운 발걸음을 내딛으셨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겟세마네 이야기가 그 예를 보여줍니다.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힘든 심정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위한 십자가

오늘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종려주일 예수님의 행동과 스가랴의 예언을 접하고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이 말씀은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는 거라서 따르기 쉬운 말씀은 아닙니다. 스가랴든 예수님이든 공통점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평화의 세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는 그런 세상을 제시하는 지도자이지 메시야 자체를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야만 믿고 끝나는 신앙이란 온전한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한국 기독교의 전반적인 문화와 신학을 꾸짖는 듯합니다. 부당한 체제에 도전하기보다는 불평등한 평화를 유지하려는 모습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억압받는 자들과 연대하기보다는 개인의 겸손과 영성을 선호하는 교회를 비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과 성전, 사회와 종교를 늘 예리한 눈으로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은 세상을 대표했고, 성전은 종교를 대표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시는 모습을 통해 로마의 지배와 그에 기생하는 유다 지배층에 정면 도전하셨습니다. 또한 성전에 들어가 거기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예수님은 종교에 대해, ‘이건 아니다라고 최종 판단하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을 둘러보고, 교회를 둘러봅니다. 희망이 보이십니까?

 

희망을 말하기

희망을 말하기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향린교회 성도님들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평생을 바쳐 연구하고 투쟁했습니다. 그러나 빈부격차는 더 악화되었고, 전쟁은 빈번하고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또한 절체절명의 기후재앙을 경고하고 탄소감소를 위해 애쓰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80%는 기후위기를 전면 부인하는 트럼프를 두 번째 지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40년간 볼 수 없던 인플레로 세계 곳곳에서 어려운 사람들은 더욱 벼랑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했던 하나님의 나라, 평화와 사랑, 나눔과 용서, 사랑의 돌봄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 그런 공동체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런 세상과 공동체를 위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고난의 잔을 마셨고 목숨을 바쳤는데 우리는 그런 공동체,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로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을까요? 우리의 교회만이라도 그런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교회는 성 소수자를 죄인이라고 하고, 성소수자를 축복한 목사를 출교시킴으로써 스스로 몰락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마무리

세상을 돌아보고, 교회를 돌아볼 때 희망을 말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말하고 행하는 것이 오늘 종려주일의 가르침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두렵지만 한 걸음 내딛을 때라고 했습니다. “두렵지만의 다른 표현은 싫지만, 귀찮지만, 어렵지만, 염려가 있지만, 시간이 없지만, 돈이 없지만, 나이가 많지만, 나이가 어리지만등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할 때라는 말에는 두 가지 쓰임이 있습니다. “지금은 두렵지만 한 걸음 내딛을 때다라는 시간의 의미도 있고, “두렵지만 한 걸음 내딛을 때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신다와 같이 조건의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한 걸음 내딛을 필요가 있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향린의 성도님들은 개인 차원에서 두렵지만,’ ‘어렵지만,’ 한 걸음 내딛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향린교회 차원에서, 한국 차원에서, 세계 차원에서 어렵고 두렵지만 한 걸음 내딛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적지는 않을 듯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세상에 희망을 보여주시려고 희망이 되셨습니다. 이 거룩한 한 주 동안 예수님이 십자가의 무게로 고통 받는 모습을 아프게 지켜보면서 우리도 함께 우리 삶의 어떤 부분에서든 두렵고 어렵지만 한 걸음 내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향린 성도님들이 한 걸음 내딛을 때,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승리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