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공동체가 살아남는다. | 박정범 | 2024-04-07

by 박정범 posted Apr 09, 2024 Views 129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24-04-0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다정한 공동체가 살아남는다.

 

사도행전 432-35, 시편 1331-3,

요한111-22, 요한복음서 2019-31

 

함께 읽는 말씀 : 요한117

 

7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주님의 부활을 기리는 부활주일, 그리고 향린에서 1주년을 맞이하는 이번 주일에 이렇게 하늘뜻펴기를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과 제가 조그마한 부분이라도 소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의 첫날 그 두려움>

오늘의 본문 중 요한복음 20장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첫 날 저녁,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집 안에 있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말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들에게 전해준 말을 믿지 못했다가 예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인사말을 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믿지 못하고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두 손과 옆구리를 손수 보여주시며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야기를 잠시 샛길로 돌려서 이 본문을 보면서 저는 옛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군의원 선거에 나가신적이 있으십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적, 초등학교 입학할 시점 정도로 기억됩니다. 아버지는 민주당 텃밭인 전라도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진 못하셨습니다. 무소속으로 군의원 선거에 입후보를 하셨던 거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민주당 후보의 당락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기세가 좋으셨나봅니다. 그렇게 선거가 진행되던 어느 날 부모님께서 아주 불안해 보이셨습니다. 갑자기 외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집으로 오셨고, 전 당시에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부모님과 함께 무안군에 있는 모텔로 이동했습니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민주당 공천을 받은 후보 쪽 사람들이 저희 집을 습격할 수도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던 것입니다. 예전 선거는 참 야만적이었습니다.

 

집에 있는 가족들은 모두 문을 걸어 잠구고 불을 끄고 집 안에서 혹시나 모를 습격사건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부모님은 집안을 단속 하신 뒤 저와 함께 무안군에 있는 모텔로 피신을 가신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나선 저도 모텔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아침이 밝아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제자들과 조금은 비슷하게 느껴지시죠?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고 그 불안한 공기 속에서 어린 저도 잠이 쉽게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참된 평안이 되었던 것은 바로 아버지가 사오신 돈까스였습니다. 당시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돈까스는 감히 먹을 수 없는 고급음식이었습니다. 뭐 지금 그때를 되돌려 생각해보면 일회용 용기에 담긴 말라 비틀어진 돈까스였지만, 당시엔 저의 모든 근심과 불안을 한 방에 날려버린 최고의 음식이었습니다.

 

흔치 않은 경험이긴 했지만, 또 오늘 본문의 상황과 똑같다고 할 수도 없지만 저는 제자들이 문을 닫고 숨죽여 숨어 있었다는 본문을 읽으면서 갑자기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돈까스 하나에도 평안을 얻을 수 있는데, 돌아가신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셨다는 것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면서,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자,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두려움이 기쁨으로, 불안이 평화로 바뀐 것이지요. 예수님은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시고,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고 약속하십니다(20,21-23).

 

오늘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세상이 두려워 문을 잠구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죄가 넘치고 두려움과 불안으로 가득 찬 문 밖의 세상으로 다시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숨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마치 창조의 과정에서 숨을 불어넣은 것처럼, 제자들에게 성령의 숨을 불어 넣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제자들이 행할 일은 하나님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처럼, 이제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다정한 예수님>

여기 다른 한 본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뒤에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믿음이 없고 마음이 무딘 것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5 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마가복음서 1614)

 

제가 지금 읽은 본문은 비슷한 상황에서 마가복음의 본문입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이 제자들이라면, 요한복음의 예수님과 마가복음의 예수님 중 누굴 택하실건가요? 전 멘탈이 약해서 마가복음의 예수님에게는 정이 가지 않을 거 같습니다.

 

시점도 야속합니다. 하필 음식을 먹을 때에 와서 호통을 치셨다는 겁니다. 밥이라도 편하게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 먹고 따로 불러 이야기 하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면박 주고 호통 치시고는 이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면 제자들 입장에서는 부글부글 끓지 않겠습니까? 지금 세대에서는 꼰대의 끝판왕이라 지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다정해 지셨습니다. 호통치시던 예수님이 아니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몸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평안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한 사람, 저와 같이 엄숙 근엄 진지 모드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한 줄기 숨 쉴 구멍이 되어 준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도마입니다. 오늘 본문 중 도마가 나오는 부분의 소제목이 바로 도마의 불신앙입니다. 하지만 저는 도마가 좋습니다. 저같이 연약하고 소심한 사람에게는 도마의 이 행동이 멋있습니다.

 

마치 믿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상황, 혼자 딴소리하면 핀잔 받을 거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히 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런 그에게 내 손을 만져보고, 내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몸을 내어 주는 다정해진 예수님, 이 공간에 호통과 저주, 질책과 비난은 없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질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한공동체는 예수님을 실제로 본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실제로 보지 않았더라도 믿는 너희들에게 더 큰 복이있다는 축복의 말씀인 것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가 가지고 있을 두려움, 불안함을 해소하고 그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빌었던 다정한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또 새로운 평화의 숨을 불어 넣어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쥐어주신 용서라는 무기와 함께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입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맞다 틀리다의 문제를 떠나서 전 이렇게 희망하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 4장의 말씀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의 말씀이 소유를 나누고 가난을 없앴다는 것에 중점이 되어 해석됩니다. 그것도 참된 공동체의 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한 마음과 한 뜻이 전제가 되지 않았다면 소유를 나누어 살아간다는 것은 일회성 이벤트에 그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야 나의 소유와 다른 이의 소유가 보일 것입니다. 내 맘과 너의 맘이 보이고 소통하여야 내가 아닌 다른 이의 필요가 보이게 됩니다. 군림하고 정복하고 경쟁해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그것, 문을 닫고 웅크리고 있으면 볼 수 없는 그것은 우리가 우리 안의 문을 열고 접촉하고 왕래하여 사귐을 가질 때에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

 

한 마음 한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언제나 위기였지만, 우리는 그 위기를 조금씩 헤쳐나가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그때마다 우리가 가진 생각들을 나누고, 함께 연대하면서 살아내었죠.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사회는 아픕니다. 강한 말들이 넘쳐나고, 서로와 대화하려하지 않으며, 상대를 죽이고자 합니다. 세력을 없애고, 무너뜨리고 승리를 쟁취하려는 욕심이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서 피어나고 있습니다.

 

예전 감신대 이정배 교수님의 글 중에서 동학교도들에게 배운 언총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마을이나 국가에 어려운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언총, 곧 말 무덤가에 모이곤 했답니다. 서로 다투고 비난하고 헐뜯고 욕하고 파괴적인 말들이 난무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공동체가 걱정되면 다시 모인곤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쏟아놓은 모든 험하고 사나운 말들을 한데 모아 말 무덤에 파묻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런 말들이 다시는 밖으로 뛰쳐나오지 못하도록 의식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다툼질과 언쟁, 갈등이 수그러졌고 평화가 도래하는 것을 경험하곤 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일종의 말 장례식을 치룬 것이지요. 자기의 의식대로 뱉은 말을 죽이는 의식을 거행하면서 자기를 죽이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살림의 의식을 치룬 것입니다.

 

힘만 키우려는 세상, 서로 대화하지 않으려는 세상, 자신의 주장만 되풀이하는 세상 속에서 차라리 그냥 다 한 곳에 모여 했던 말들을 다 묻고 죽여서 다 같이 살아내는 의식을 치러봤으면 좋겠다. 하는 바램이 듭니다.

 

선거의 기간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호감의 정치가 아니라 비호감의 정치가 득세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대상이 좋아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이 싫어서 지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해 봅니다.

 

언제까지 이런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까요? 계속 비호감인 세력을 서로 제거해 내면 정말 평화로운 세상이 도래할 수는 있는 것일까요?

 

이런 고민 끝에 갑자기 문득 너무 뜬금없이 용서와 다정함이 저의 마음에 탁하니 붙어버렸습니다.

 

<다정한 공동체>

여러분도 사귐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요한113~7)

 

오늘 본문의 요한1서가 강조하는 사귐은 생각과 영혼을 나누는 일입니다. 사귄다는 것, 친구를 사귀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귄다는 것, 이 얼마나 설레고 우리의 가슴을 벅차게 하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평화의 영을 불어주신 후, 우리에게 주신 무기는 바로 용서입니다. 물론 우리는 용서하지 않음을 통해 심판할 수 있는 무기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 용서하지 않음에는 용서와는 다른 더 큰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용서하여 주신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용서에 인색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용서의 무기를 통해 세상을 구원해야 합니다. 힘만 키우려는 세상, 대화도 하지 않으려는 불통의 세상, 자신의 주장만 이야기하는 세상을 심판도 해야겠지만 그럴 때 일수록 나의 평화, 우리의 평화, 세상의 평화를 위해 어떠한 무기를 가지고 싸워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어주신 평화의 숨을 통하여 내 안의 두려움과 불안을 없애고 평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안의 평안을 세상 밖으로 가지고 나가 다정히 서로의 평안을 위한 일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속한 아주 작은 공동체라도 그 안에 안전과 평안이 숨쉴 수 있도록 새 숨을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본질은 모든 생명의 평화, 공동체의 평화입니다.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생명과 평화를 누리는 삶을 향하여, 서로에게 새 숨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혹 용서하지 않음으로 심판하는 것에만 치우쳤다면, 용서함을 무기로 사귐을 통해 죄를 지워내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이 행할 일은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고, 나를 죽여서 새로운 관계를 살리는 부활을 반복해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함께 살아 숨 쉴 것입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시편 133:1-3)

 

그렇게 용서를 품은 다정함은, 그리고 다정한 공동체는 살아남습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다정한 마음으로 서로의 평화를 빌며, 모든 죄에서 자유한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우리가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죄에서 깨끗해 질 것입니다. 매일 주님이 주시는 평화의 숨을 통해 부활을 경험하는 삶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축복의 기도를 함께 나눕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