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빵, 약속의 잔 | 박재형 | 2024-04-14

by 이민하 posted Apr 16, 2024 Views 8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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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4일 (부활절3)

 

기억의 빵, 약속의 잔

(이사야서 50:5-8, 빌립보서 1:27-29, 누가복음서 22:14-20)

 

우리는 애굽에서의 유월절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나긴 노예의 생활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펼쳐질 자유의 삶을 향하기 전날 밤, 이스라엘은 결코 훗날 웃고 즐거워하기만은 할 수 없는 기억을 몸과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얼룩진 비극을 등에 지고 광야로 나갑니다. 애굽 사람들은 온갖 자연재해도 모자라, 가장 소중한 자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눈앞에서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처음 난 것들의 죽음’. 제아무리 야웨 하나님의 심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너무나도 잔인하고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한 민족의 자유를 위해 그 대가로 또 다른 민족을 학살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공의인가?’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런 사건임에는 분명합니다. 아무리 수천 년 전의 먼 과거, 수백 킬로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그저 성서 이야기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사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누릴 자유의 대가로 너무나도 큰 삶의 무게를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유월절, 그것은 단순히 ‘재앙이 우리를 무사히 지나갔구나’하는 안도와 기쁨의 절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는 그런 절기입니다.

 

각 가문마다 한 마리의 일 년 된 어린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는 재난을 피할 표식으로 문설주에 바릅니다. 그리고 고기는 머리와 내장, 할 것 없이 모두 불에 구워 쓴 풀과, 누룩을 넣지 않은 빵, 거칠고 딱딱한 무교병과 함께 밤새 복장을 갖추고 뼈만 남기고 모두 먹어 치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주변에서 들리는 애굽 사람들의 비명과 절규를 들으며, 밤새 마르고 거친 음식을 꾸역꾸역 삼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애굽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삼키는 행위입니다. 비록 저들의 완악함에 대한 대가라고는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존속하는 동안, 언제까지고 저들의 희생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해방, 그 대가로 치른 생명의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야웨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매년 가장 아끼는 양과 염소를 희생제물로 잡아먹으면서, 그 맛을 느끼지 말고 오히려 그 희생의 아픔을 느끼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희열 대신, 누군가 당한 삶의 희생을 영원히 잊지 말라는 그런 명령 말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자양분으로 삼아 야웨와 맺은 약속을 실천하며 살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고 힘과 권력을 움켜쥐게 될 때, 자신들이 노예였다는 사실, 그리고 애굽인들의 희생을 대가로 자유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늘 상기하고, 애굽이 저질렀던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유월절 식사는 바로 이런 기억과 약속의 끊임없는 되새김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날 저녁,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유월절 식사 준비를 부탁합니다. 미리 준비해 놓은 다락방에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고 시간이 되자, 예수와 제자들은 함께 자리에 앉습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랐다.”

 

예수의 이 발언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제자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꺼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그 말 대신, 이 유월절 식사를 간절히 바랐다는 말을 가장 먼저 건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유월절 식사 장면에 있어서 만큼은 마태, 마가복음에서 보다, 누가복음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에 더 눈길이 갑니다.

 

예수는 자신이 희생당할 것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이 마지막 희생이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죽음 이후로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희생되지 않는

그런 세상이 오길 바랐던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다시는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이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우리말 성서에서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라고 기록된 부분은, 사실 “유월절 식사가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라고 번역되어야 맞습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는 유월절이라는 절기보다, ‘유월절 식사’라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래,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함으로써, 우리에게는 재앙이 닥치지 않고 지나갔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지속해 왔던 유월절 식사가, 예수의 시대에 와서는 그저 명절, 혹은 종교적 절기에 맞춰 그저 형식적으로 행하는 가족 식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에게 저 유월절 식사는 이제 자신의 안위를 위해 계속해서

다른 희생자를 필요로 한다는 그런 욕망의 관습적 표출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결국 유월절에 맞춰 예수를 이스라엘을 위한 희생제물로 선택했던 것 아닐까요?

 

이제 예수는 스스로가 유월절 희생제물이 되기에 앞서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만이라도 이스라엘이 메인 저 유월절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오늘, 이 마지막 식사를 끝으로 현재와 같이 제의적 상징에 그친, 그런 관습적인 유월절 식사가 계속 지속되는 한, 다시는 그것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유월절 사건에 대한 온전한 기억이 야웨와 맺은 약속을 통해 실현되기 전까지는 유월절 음식을 결코, 먹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이죠. 유월절 식사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완성된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다른 희생제물을 요구하지도 또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예수는 스스로 이스라엘을 위한 마지막 희생제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지막 희생을 기억하고

다시는 다른 희생제물을 요구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서 함께 나누어 마셔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절대로 마시지 않을 것이다.”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은 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피는 애굽에서 처음 난 모든 것들을 죽이던 그 파괴자가 그냥 지나가도록 했던 표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그 희생자의 피를 나눈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희생제물의 피를 대가로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그런 비극적 사태를 멈추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 때까지 더 이상의 다른 희생제물의 피를 요구하지 말고, 그 피를 내 안전의 표식으로 삼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유월절 식사를 나누면서, 여전히 다른 희생제물을 요구하는 저 예루살렘 성전 체제의 제의 종교와 그 전통을 거부하고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에, 잔을 그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이는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기억하며 행하는 ‘성만찬 예식’에서 매번 똑같이 나누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 구절이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는 10년 전에 일어났던 4.16 세월호 참사를 함께 기억하고자 모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그 참사의 진상이 규명되고, 그 죽음의 원인을 밝혀지기를 염원했습니다. 또한 그 억울한 죽음들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들이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밝혀진 것은 하나 없고 참사의 책임자들이 속속 사면받아 출소하는 기가 막힌 모습을 바라만 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이 세월호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해 왔습니까?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이 세월호 죽음 앞에서 어떤 약속을 했습니까? 어쩌면 우리 모두 그 억울한 희생을 대가로 무언가를 바라거나 혹은 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떤 이는 그 대가로 더 안전한 사회를 바라고, 또 어떤 이는 그 대가로 더 민주적인 정부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나요? 혹여, 그 죽음을 계기로 무언가를 해결하고 바라던 희망을 이루고자 했던 것은 아닌가요? 그리고 이를 위해 나도 모르게 그럴듯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며 기대하고 있진 않았나요?

 

예수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빵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이제 나의 희생을 마지막으로 내가 어떻게 희생되었는지를 기억하십시오. 이제 내가 흘린 억울한 피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이런 희생이 반복되지 않도록 싸우겠다고 약속하십시오. 예수는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이 구절은 예수의 죽음 이후, 그 죽음을 기억하며 그 부활에 동참할 것을 약속한 초대 교회 공동체가 고백한 신앙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지금도 이 신앙 고백 위에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정말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약속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빵을 떼며 되새깁시다. 결코, 그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라고. 그리고 잔을 나누며, 끊임없이 새롭게 약속하고 또 다짐합시다. 그 누구도 희생제물이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신앙으로 함께 싸우겠노라고.

 

우리에게 주신 하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십시오.

그리하여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나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 정신으로 굳게 서서,

한 마음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함께 싸우며, 또한 어떤 일에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나에게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조이고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

 

함께 말씀을 기억하며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 파송사 -

 

우리가 기념할 것은 누군가의 희생 덕에 안전한 우리의 현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할 것은 나중에, 좀 더 준비되면 실현될 그런 기약 없는 미래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는 빵은 그가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 주었다는 사실을 몸에 새기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잔은 그 기억에서 멈추지 않고 실천하겠노라 매일 매일 새롭게 갱신하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한다면, 그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우리가 함께 이룰 부활을 약속해야 합니다.

우리가 4월 16일, 세월호를 기억한다면, 진실을 밝히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다시 움직여야 합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의 기억과 약속이 진실을 가리고 거짓에 매달리는 저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멸망과 심판의 징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