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이 누구인가? ㅣ 홍성조 ㅣ 2024-04-28

by 김지목 posted Apr 29, 2024 Views 9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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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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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이 누구인가 ?

고 육우당 추모주일 설교 홍성조 집사

 

 

창세기 19:1-8, 21-28 / 고린도전서 13:8-13 / 마가복음서 2:23-27 / 마태복음서 22:37-39

 

안녕하십니까 !

홍성조 집사입니다. 일주일만에 뵙습니다.

 

저는 지난 목요일 저녁, “성공회 대학로 교회에 갔었습니다.

육우당 21주기 추모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기도회는 처음이라서... 교회에서는 나혼자만 가는거 아닌가?” 라는

걱정을 하면서 갔는데.... 여러교회에서 100여명의 사람들이 와있었고 섬돌향린, 강남향린등

형제 교회 분들도 계셨고 특히 우리교회 세분의 교역자분들과

여러명의 교회 청년들이 참석해 많이 반가왔습니다.

 

아마 육우당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교우분들도 있으실텐데요.

육우당21년전 2003, 18살의 어린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윤현석

군이 술, 담배, 수면제, 파운데이션, 녹차, 묵주 6가지만이 자신의 친구라며

지은 이름입니다.

육우당은 성소수자였으며,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반전 평화운동, 차별 철폐

운동,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였으며 안토니오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인

이였습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편견이 심했던 20여년전에

육우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여러분들이 다 예상하던 그대로입니다.

그는 성-소수자를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반 성경적이고 반인륜적

이며, 천주교를 사랑하고 하느님은 나를 받아 주실거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

을 했습니다.

육우당의 자살은 동성애에 대한 우리사회의 편견과 증오 그리고 소외 받는자

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믿는다는 한국교회의 방관에, 큰 경종을

울린 사건 이였습니다.

나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

 

오늘 제 설교가 어떤 교우분들에게는 좀 듣기 거북한 얘기일수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깨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과정

으로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용기를 내었습니다.

 

동성애 !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여자가 여자에게 더 끌리는 것!

이런 것이 동성애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교우님들은 동성애, 성서수자 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시나요?

에이즈, 특정 성행위, 퀴어 축제, 극우 개신교회들의 강한 반대집회 그리고

섬돌향린교회, 임보라 목사님 등등 이런 것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10년전에 성소수자가 많이 출석하는 섬돌향린교회가 분가 했을때도, 섬돌교인

들과 세계성만찬기념주일에 한신대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함께 식사를

나누었어도 저는 동성애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나는 섬돌향린교회를 인정한다”. “형제 교우들인 섬돌향린 교우들을

교우들로써 존중은 한다”. 이 정도가 저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였습니다.

 

아마 지금부터 13-4년전 일겁니다.

제 큰 아이가 새날청년회 였을때 일입니다.

어느날 큰 아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빠! 요즘 교회가 이상해졌어

새로온 아이들 중에 동성애들이 많은 것 같아. 짜증나!“ 하는 것 이였습니다.

저는 향린교회 모태신앙인 첫째가 새로운 청년들이 많이 들어오고 또 열심히

활동을 하니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나보다 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교회에서 모르는 청년들을 만나게 되면

저 애가 동성애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약간은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혹시 교회행사때 저 애들과 악수나 허그를 해도 괜찮나 ?”

저런 청년들과 숟가락을 같이 사용해도 되나?” 등의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교회 다른 몇몇 분들도 에이 섬돌향린은 글쎄... 난 별로야!” 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

 

여기 앉아 계신 교우분들은 이런 생각 안 해보셨나요?

저만 이런 생각 했었나요?

 

막내 이야기

 

많은 교우분들이 아시겠지만 저와 권집사 사이에는 3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방금전에 얘기한 첫째는 4년전에 결혼을 해서 알콩달콩 잘 살고 있고, 둘째는

축구도 잘하고 리더십도 뛰어납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건축가의 꿈을 키워왔던

막내는 영국에서 건축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막내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1년정도 지난 어느 날 아침.

저와 권집사는 막내와 톡전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엄빠! 가수 설리 자살한 거 알지?

엄빠는 내가 행복하게 살면 좋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놀라지 마!” 하더군요.

그 당시 설리의 자살사건으로 충격을 받았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얘기해봐. 무슨 얘기든 엄빠는 네 편이니 걱정하지 말고!” 했지만

막내는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몇 번이고 괜찮다며 말해보라고 했지만 막내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때 언젠가 막내가,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싱가폴 여자친구가

막내에게 입술을 갖다 대길래 막내가 확 밀쳐버렸다는 이야기가 순간 기억

났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혹시.... 혹시 너 머큐리아니니?” 하고 물었습니다.

막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맞아.... 나 동성애야했습니다.

 

머리가 띵 했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 그래.. 괜찮아이렇게 대답은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몇일 후, 첫째와 둘째를 불러서 막내 얘기를 했습니다.

너희들 놀라지 마!” “네 동생이 동성애자라네했더니

첫째는 으응... 알겠어. 근데 우리학교에도 그런 동아리도 있고, 그런 아이들

많아!” 라며 쿨한 반응 이였습니다. 정말 쿨하지요!

둘째는 .... 그렇구나. 예술하는 사람들 중에 동성애자 엄청 많을걸!”

건축은 예술이잖아! 간지나네!” 하며 오히려 응원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다행 이였습니다.

나와 권집사는 어차피 부모이니 결국은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를

보내겠지만, 첫째와 둘째가 아무런 편견없이 막내를 감싸주고 이해하니 말입

니다. 막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 일입니다.

국내 대학에 가지않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했습니다.

좋은 대학에 갈 자신이 없으니, 해외 대학으로 진학을 하려고 한 생각인줄

알았는데... 한국에선 편견이 너무 심해서 한국에서 살 자신이 없어서 그랬다는

것 이였습니다. 막내의 친한 친구들은 아직도 막내가 성수소자인줄 모릅니다.

평소에 친구들은 동성애자들을 악담하고, 이상한 사람들 취급하고, 증오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기 어려웠었다고 합니다

 

막내의 커밍아웃 이후, 저와 권집사는 거의 매일 아침, 막내와 통화를 합니다.

그날 있었던 일도 얘기하고, 좋았던 일, 기분 나빴던 일, 그냥 사소한 얘기들도

합니다. 새로 만나는 남자친구 얘기까지도 합니다.

영국은 퀴어축제가 이제는 하나의 국가적인 큰 축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상점들과 회사는 무지개 깃발을 걸어두고, 큰 회사들은 홍보 부스도

만들어 놓는답니다. 퍼레이드 때는 많은 시민들이 함께 즐기고, 정말 볼만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도 막내가 우울해하거나, 몇일 소식이 없으면 걱정이 됩니다..

 

에이즈에 대하여

이제 동성애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동성애는 선천적일까요? 후천적일까요? 아님 동성애는 질병일까요 ?

 

1983HIV가 에이즈의 원인 바이러스임이 밝혀졌고, HIV 감염이후 질병이

진행되어 여러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를 에이즈(AIDS)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에이즈는 동성애자들이 퍼뜨리는 것이 아니라 HIV 바이러스가 침투

해서 일어나며 HIV는 동성애 혐오자들이 주장하듯 동성애자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HIV에 감염되는 경우는 감염자의 체액을 통해서가 유일한데 이 경우도 침, ,

눈물 등을 통해서는 감염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HIV 감염자와 식사를 하거나 수건을 함께 쓴다거나 일상 활동을 함께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에이즈는 당뇨병이나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처럼 관리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당뇨환자나 만성질환자들을 혐오하거나 증오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건강관리 잘하십시요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동성애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세계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 특히 극우 개신교회들의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증오는 날이 갈수록 커져

가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극우 개신교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

그런데 같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인데 왜 극우 개신교회들은 동성애를

이리도 격렬히 반대할까요 ?

 

극우 개신교는 그동안 교회세습, 목회자 성폭력, 교회와 신학교 사유화, 금권

선거 등 부도덕한 행태가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 그 어느 집단보다도 더 보수화 되었으며, 이기적이 되었고, 돈을

하느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신교 교인수는 급격히 감소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극우 개신교회는 자신들의 부도덕과 무능을 반성보다는 사회적

소수자를 악마화 함으로써 외부의 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과거에는 일차적인

대상이 종북 좌파였다면 이제는 동성애자를 그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제가 청년때일때만 하더라도 교회에서는 청년들에게 혼전순결은 반드

시 지켜야 하는 계명으로 가르쳐 왔으나 지금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습니다.

극우 개신교회들이 성서의 해석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제대로(?) 해석하여

혼전순결을 주장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극우 개신교회에서 혼전순결을 주장하면 청년들이 교회에서 떠나

가기 때문에 더 이상 얘기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의 스킨십이나 사랑의 행위가 터부시되고 금기시 하는

것이 어찌 하느님의 뜻일까요?

이는 시대 상황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혼전순결을 더 이상 얘기하지 못하게 된 극우 개신교가 사회적 약자인

성소수자들을 악마화하고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성서속의 동성애

성서는 2,000여년 전에 쓰여졌습니다.

우리는 2,000년이 지난 현재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서를 이해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할까요 ?

 

극우 보수교회들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성서를 문자 그대로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불리한 문자 그대로의 성경 구절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입맛대로 다르게 해석

합니다. 성서는 오늘날의 윤리적인 도전과 현실에 입각해서 성서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문자에 대한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성서를 살아있는 사람들의 하느님 경험에 대한 이야기로

읽어야 합니다.

 

성서에는 동성애와 관련된 구절이 몇군데 나옵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19장은 교우님들도 잘아는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입니다.

이 성서 구절을 근거로 극우 개신교회들은 성이 문란하고 동성애로 타락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하느님이 불과 유황으로 벌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소돔에 두 천사가 지나가다 하룻밤을 소돔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롯의 간청에 천사들은 롯의 집으로 들어가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됩니다.

이때 소돔남자들이 몰려왔습니다.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그 집을 에워싸고 롯에게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하며 천사들을 내줄 것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상관은 성폭행을 의미합니다. 천사들도 우리 머릿속에 인식되어 있는

날개 달린 여자가 아니라 남자 천사들이였습니다. 나그네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극우 개신교회들은 타락한 소돔 남자들이 남자들과의 동성애를

연결시키며 소돔사람들이 동성애와 성이 문란하여 하느님이 불과 유황으로

파괴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롯은 남자를 한번도 가까이 안한 두 딸을 내어줄테니 그 두 남자들을

끌고가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만약 소돔 사람들이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어찌 롯이 두 딸을 내어 준다고 하겠습니까?

창세가 9장은 동성애와 성의 문란 때문에 소돔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롯의

나그네에 대한 극진한 접대와 나그네를 거부하고 헤꼬지 하는 소돔 사람들을

비교하며 나그네, 이방인, 소외받는 자들을 환대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마가복음 223절 이하의 말씀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는 예수 제자

들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안식일에 하지 말라는 것을 어찌 당신의 제자

들이 하느냐며 항의하는 대목입니다.

문자주의적인 경건주의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

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질타하

십니다. 또한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죄인으로 치부되었던 세리, 창녀들과 함께

거리낌 없이 식사를 했고 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이 계명보다 우선합니다.

 

사랑이란?

저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교우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

왜 남녀간의 사랑은 정상적이고, 동성간의 사랑은 안되는 거지요 ?

여러 교우님들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

 

사랑을 깊히 생각해보니 그건 다름아닌 끌림입니다.

남자인 제가 매력적인 여자에게 끌리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저 여자에게 끌릴거야 !”

저 여자를 만나면 내 가슴이 콩닥콩닥 뛸거야 ?”

저런 여자랑은 평생 함께 있고 싶을거야 !” 등등의 생각들을 제가 이성적으로

하게 되는 걸까요? 아닙니다.

 

나에게 끌리는 이성을 보면 그냥 본능적으로 좋아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감정이 싹트는 순간 도파민이 자동적으로 분비되는 것처럼 말입

니다. 그것은 본능이고 타고나는 것입니다.
미국 소아과학회는 동성애자들의 성적취향은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선택해서 우리 집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태어나지는 것

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동성애 역시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서로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헌신

하는 관계입니다. 국가든 교회든 개인의 성생활을 개입할 권리가 없습니다.

무슨 권리로 국가 또는 교회가 누구는 사랑해도 되고 누구는 사랑하면 안된다

고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무슨 권리로 어떤 사랑의 행위는 되고 어떤 행위는 안된다고 결정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정하는 것 입니다.

 

막내의 꿈

우리 막내는 한국에서 살기 싫다고 합니다. 한국은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가

너무 심하고 또 그 편견이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고 합니다.

막내의 꿈은 가정을 꾸리는 것입니다.

아이도 키우고 싶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결혼을 할 수 없고, 입양도 불가능하니....

우리 가족들은 너무 좋지만... 한국에서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합니다.

 

저와 권집사는 한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막내를 결혼시키는 것입니다.

가정을 꾸리고, 알콩달콩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외롭지 않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사실 오늘 육우당 추모예배의 평신도 설교는 작년 말에 제가 김목사님에게

먼저 요청을 했었습니다. 오늘 저의 설교가 교회설교의 취지에 부합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저의 개인적인 얘기를 너무 많이 한 것 같기도 합니다.

제 감정을 조절하지도 못한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소외받는 이웃들을 위해 오셨다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소외받는 우리의 이웃은 누구일까요?

저는 단연코 성소수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우리 아들, 딸들이며, 우리 교우들이며, 우리 이웃입니다.

 

사회는 점점 진보하고 있고 편견과 증오를 걷어내고 있는데, 현재 한국 교회들

은 가장 앞장서서 성소수자들을 향해 혐오와 증오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온갖 멸시와 편견, 증오를 받아가며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난주 안병무 도서관 개관식에서 안선생님의 마지막 설교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안선생님을 잘 모릅니다만 향린교회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설교의 모습은 얼핏 기억납니다. 노약한 노신학자의 모습이였지만, 확신에 찬

나지막한 목소리였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를 따르려면 본격적으로 그를 붙잡고 그 산으로 올라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은 놓치지 마세요

 

예수의 길을 따르려고 무던히도 애쓰시는 향린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꼭 붙잡고 저 광야로 나아갑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신 예수의 길을 따라서 소외받는 우리

이웃들과 함께 나아갑시다.

지금 우리 이 모습, 그대로우리 이웃 모습, 그대로

주님은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예수의 길을 따르려는 우리들의 다짐과, 진정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

 

침묵으로 기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