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부활 7주일, 승천주일, 향린교회 창립 기념주일
하늘을 바라보다
행 1:1-11, 엡 1:17-23, 막 16:11-20
반갑습니다. 오늘 향린교회 창립기념주일을 맞는 교우 여러분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70년 긴 세월 교회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은혜이며 또한 교우님들, 집사님들, 권사님들, 장로님들과 교역자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교우들의 기도와 노고를 기억하시고 크신 은혜를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향린교회는 저의 믿음의 뿌리이고 청년 시절을 빛나게 했던 저수지였습니다. 제가 예전에 향린교회를 다녔고 현재 임시당회장이라는 이유로 창립 주일에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설교자로 초청해주셔서 기쁘고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창립기념주일이면서 동시에 승천주일이어서 승천주일의 본문을 읽었습니다. 말씀을 읽으실 때에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나 단어가 있습니까? 저는 사도행전 1:11절 말씀에 나오는 ‘하늘을 바라보는 제자들’을 상상해보면서 ‘하늘을 바라보다’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주님을 기억하며 살았던 제자들의 삶을 상상해봅시다.
1. 오늘 창립기념주일을 맞아 교회와 관련하거나 주님과 관련된 기억이 있습니까? 어떤 일들이 기억나십니까? 역사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지 않는 과거는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다보면 씁쓸한 일도 있고 또는 즐거운 일도 있습니다. 과거는 기억해야 살아나고 힘이 됩니다. 역사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야기만 아니라 너와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창립기념주일인 오늘 교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서로 나눠 보십시오. 향린교회와 내가 얽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향린교회에 다닐 때 자주 듣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새 교우가 오면 하던 늘 하던 질문입니다. ‘어떻게 해서 향린에 오셨어요?’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에는 보수적 교회에서는 답을 찾지 못했던 것을 찾기 위해 향린에 왔다는 자신들의 경험이 녹아 있습니다. 또한 향린에서는 보수적 교회와는 다른, 신앙의 자유를 찾았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향린에서 함께 살다보면 답을 찾게 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이런 자부심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선배들에게 이어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시작한 안병무 선생님과 홍창의 장로님을 비롯해 신앙의 선배들이 품었던 문제의식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설립 초기 1953년을 돌아봅시다. 당시에는 전쟁의 아픔과 치유라는 시대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기장 서울노회 안에도 1953년에 창립된 교회들이 여러 곳이 있습니다. 전쟁의 포화가 멈췄을 때 서울로 돌아와서 곳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동족상잔인 한국전쟁 속에서 세상은 무너지고 질서가 무너졌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였습니다. 도움을 받으려면 하늘에 호소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대, 같은 고통, 같은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향린의 선배들은 다른 길을 갔습니다. 다른 모양의 신앙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왜 달랐을까요? 기성 교회를 반복하지 않겠다, 대안을 찾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다른 모습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교회를 세우자, 새로운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기성교회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향린교회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많은 신앙인들이 향린을 찾아왔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해서 향린에 오셨어요?’라고 질문하는 전통이 생겼다고 봅니다. 창립 71주년을 맞는 오늘도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 향린에 오셨어요? 오실 때 품었던 질문에 대한 답은 찾으셨습니까?
2. 향린의 역사는 홍근수 목사님이 부임하면서 큰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홍목사님에대한 평가나 호불호는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홍목사님 시절은 향린의 방향이 확고하게 세워진 큰 전환점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홍목사님께서 부임하시던 1980년대 후반은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열망이 뜨거운 시대였습니다. 똑같이 군사 독재 정권시대를 살았지만 교회들은 서로 다르게 응답했습니다. 그 때도 향린은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항린은 민주주의와 통일이라는 시대의 요구에 적극 응답하였습니다.
저는 그때를 돌아보면서 당시 선배님들이 참 용감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족보로 말하면 중시조쯤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은퇴하셔서 노쇠하고, 세상을 떠나신 분도 계시지만 참 대단한 용기였습니다. 그 선배들이 교회의 중심을 지켜주셨습니다. 당시의 정치 사회적 풍토와 나이를 감안해보십시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청년들과 함께 집회도 하고, 거리행진도 했습니다. 구호도 외쳤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집회나 가두행진, 구호 외치는 것을 싫어했거나 어색하고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고,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나이도 체면도 두려움도 어색함도 떨쳐버렸습니다. 자기 틀을 넘어섰고 자기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실천을 통해 교회는 힘을 얻었고 새로워졌습니다. 민주주의와 통일 운동을 실천하는 오늘의 향린교회로 방향을 확고하게 세웠습니다. 향린을 시작하신 선배님들과 중간에 방향을 정립한 선배님들 모두 시대의 아픔에 응답하는 믿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간직하고 기억하는 향린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고 간직한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서로 달라야 이야기하는 재미도 있고 더욱 풍성해지지 않겠습니까?
3. 오늘 읽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은 주님에게 묻습니다. “나라를 되찾아주실 때가 지금입니까?” 제자들은 주님이 신비한 능력을 발휘해 세상을 바꿀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숙제만 남겼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주님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곧 주님이 떠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우주복을 입거나 권두운이나 양탄자를 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늘로 갔겠습니까? 어렸을 때는 문자에 매여서 올라가는 방법과 올란 간 장소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의미를 묻습니다. 주님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죽지 않았다는 것이고 동시에 주님은 우리 곁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 거룩하고 존귀한 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 얼마나 든든합니까?
사도신조에 승천과 관련한 구절이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입니다. 사도신조를 두고 낡은 시대의 기도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사’는 공간에 대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주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늘에 오르신 주님은 죄인과 무리들의 친구로 살다가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죽지 않았고 사라지지 않았고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죄인들의 친구이며 나를 알고 계시는 주님이 하늘에 계시고 내 편이 되어주십니다. 주님이 내 편이 되시니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래서, 나도 주님 편이 되어 살겠다’고 다짐하게됩니다. 사도신조는 낡은 기도문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빽이 없던 가난한 민중들이 드리는 생생하고 간절한 기도문입니다.
로마 원형경기장에 끌려나와 사자밥이 되고 검투사들의 칼에 난자당하는 초대 교우들을 상상해보십시오. 그분들이 죽음 직전에 무엇을 했겠습니까?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십시오. 무슨 기도를 드리고 있겠습니까? 주님, 저는 지금 죽습니다. 하지만 최후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나를 받아주실줄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 편이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이 나를 알고 계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며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 죽음을 이겨냈습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 주님에 대한 희망이 그리스도인들을 희망의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믿음을 깨달았겠습니까? 사도행전 1:11절에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하늘을 쳐다보면서 서 있느냐?’고 말씀합니다. 하늘만 쳐다보고 있음을 책망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본동사는 서있다, 멈춰 있다, 붙잡혀 있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즉 하늘을 바라보면 몀춰서 있었습니다. 그 때에 천사가 일깨워줍니다. 왜 여기에 멈춰 있느냐, 왜 붙잡혀 있느냐고 말씀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붙잡혀 있는 것, 아무 일하지 않는 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늘을 바라보고 힘을 얻었으면 거기에 머물러 있거나 멈춰 서 있지 않아야 합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 하나님이 주시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향린은 ‘실천하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향린은 하늘을 바라보지만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지 않았습니다.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교회였습니다.
4. 마가복음 16장 9절 이하 말씀은 해석이 분분합니다. 각주를 보십시오. 8절로 끝나는 고대 사본과 20절로 끝나는 사본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9절 이하는 2세기경에 나오는 사본에만 나옵니다. 내용을 보시면 황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손으로 뱀을 집어들고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떻습니까? 황당하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았습니까? 이것을 문자대로 믿어야 잘 믿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말씀대로 믿습니까? 초대교회 때나 지금이나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만사형통하며 모든 고난을 피해가고 있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초대교회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들도 고난을 당합니다.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2세기경은 대박해를 받던 시대였습니다. 네로, 도미티안, 트라얀, 히드리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에 많은 교인들이 죽임당했습니다. 대박해를 경험했으면서도 마가복음에 이렇게 추가 기록한 것입니다. 왜 추가했을까요? 왜, 예수의 제자는 손으로 뱀을 집어들고, 독약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고 단언했을까요? 사실로 믿었기 때문일까요?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구절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순교자들의 울부짖음입니다. 다시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사자의 이빨에도 검투사의 칼끝에도 굴복하지 않았다는 순교자의 당찬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순교 당한다면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주님께서 내 편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자신에 찬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후에 끌려갈 동료들과 후대 교우들에게 전하는 따뜻한 사랑의 위로가 들리지 않습니까?
마가복음에 추가하신 분은 로마 군대의 칼날에 굴복하였을까요? 배교했을까요?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배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뱀을 들어도 독약을 마셔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교우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따뜻한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대 신앙인들에게도 말합니다. 손해가 오고 고통을 겪어도 주님의 뜻을 따르며 살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손해를 보고 고난을 당하더라도 주님을 위해 뱀을 손으로 들고 독약을 마실 수 있습니까? 자기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까?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습니까?
5. 지금까지 향린의 70년 역사는 담대한 믿음의 선배들에 의해 이어져 왔습니다. 앞으로 역사는 어떻게 될까요?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응답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현재, 2천년대는 민주주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개개인의 존엄성과 발전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더 넓은 인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변해 실천할 과제가 너무 다양해졌습니다. 무엇 하나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마치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사람이 길을 잃었을 때 정말 잃은 것은 무엇일까요? 길을 잃었을까요? 정신을 잃었을까요? 길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정신을 잃은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면, 정신을 다잡으면 길은 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향린의 선배들이 보여줬던 믿음과 정신을 다잡으면 길이 보이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복음을 지키는 향린정신을 기억한다면 길은 보일 것입니다.
향린의 선배들은 손해를 보면서도 길을 갔습니다. 오늘 향린교회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증거입니다. 70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향린의 정신과 복음을 지켜온 지도자들과 교우들을 기억합시다. 향린의 역사를 돌아보면 뱀을 들고 독약을 강요받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해를 입지 않았고 능히 헤쳐나왔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지켜냈습니다.
이제 무엇을 하겠습니까? 하늘의 뜻을 묻고 하늘을 바라보는데서 시작하면 됩니다. 하늘은 멀리 두어도 하늘이고, 가슴에 품어도 하늘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을 품고 살아가십시오.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희망을 노래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군중의 함성이라는 노래입니다.
오랜 시련에 헐벗은 저 높은 산 위로 / 오르려 외치는 군중들의 함성이
하늘을 우러러보다 그만 지쳐버렸네 / 산을 에워싼 강물은 유유히 흐르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당신의 뜻이라면 하늘 끝까지 따르리라
저 높은 산에 언덕 넘어 나는 갈래요 / 저 용솟음치는 함성을 좇아갈래요
하늘만 바라보다 시들어진 젊음에 / 한없는 지혜와 용기를 지니게 하옵소서
살다보면 지칠 때도 있습니다.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큰 힘을 받게 될 것입니다. 향린의 새로운 70년, 새로운 시대를 향해 출발하는 여러분 지치지 마십시오. 실망하지 마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하나님께서 새 힘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영이 늘 동행하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합시다.
(파송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늘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희망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며 살아가십시오.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함께 웃으며 지켜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