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9일 성령강림후3/총회선교/6.10민주항쟁기념 하늘뜻 펴기
믿음의 영으로 사는 삶
안녕하세요, 교우 여러분? 청년남신도회 김영민 집사입니다. 생뚱맞은 사람이 올라와서 하늘 말씀을 나눈다는데, 누군지는 대충 아셔야 할 것 같아서, 간단히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먼저 신앙생활은 어머니의 인도로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예장 통합 교단에 속한 교회에서 쭉 해오다가, 2001년 1월에 향린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향린에 와서는 주로 성가대를 하긴 했지만, 청년신도회와 청소년부 교사로도 활동하였습니다. 하는 일은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족은 아내와 아들 그리고 저 이렇게 세 식구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걷기, 음악 들으면서 자기, 독서, 새로운 것 배우기, 줄 맞추어 정리하기, 족구, 배드민턴, 볼링, 언어유희, 아재 개그, 쫄면, 떡국 등이 있습니다. 싫어하는 것은, 붐비는 지하철, 좀비 영화, 손톱 밑에 때 끼는 것, 시간 죽이기, 갔던 길로 다시 오기, 비꼬거나 빈정대는 유머, 음식 남기기 등이 있습니다. 혈액형은 B형, MBTI는 ESFJ입니다. 특이 사항으로는 공황장애가 있습니다.
제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후 세 번째 주일이자 총회선교주일이자 6.10 민주항쟁 기념주일입니다. 제1 성서 사무엘기상 8장, 제2 성서 고린도후서 4장, 그리고 복음서 마가복음 3장의 본문 말씀을 가지고 ‘믿음의 영으로 사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제가 묵상한 내용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믿음의 영으로 사는 삶이란 감사가 넘치는 삶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4절과 15절을 보시면,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세워주시는 것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50편 23절에도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항상 얼굴에 웃음이 넘칠 뿐만 아니라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기독동아리 활동을 했었는데, 그때 항상 웃고 다니는 동기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믿지 않는 같은 과 친구가 “넌, 어떻게 항상 그렇게 웃고 다니니?”라고 물었을 때, 제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늘 함께하시거든.”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저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랐고, ‘나라면 과연 저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참 순수한 신앙을 가진 그 친구는 지금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하는 모습을 어여삐 보실까요? 제가 생각해 보니까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에게 물질적인 어떤 것이 필요하실까요? 전지전능하신 그분에게 고상한 지식이나 지혜 또는 탁월한 능력이 필요하실까요? 더군다나,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번드르르한 아첨이나 입에 발린 말 따위는 씨도 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당신을 향한 우리의 진실된 마음을 가장 귀하게 여기실 것이고, 그러한 마음을 표현하는 최고의 방식이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 또는 영화와 결부되어 말해지고 있습니다. 유명한 기독교 교리서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1번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대해서 묻고 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1번 물음에 대한 답으로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최고의 방법이 바로 감사입니다. 그러한 감사를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나 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감사를 하고 싶은데, 도저히 감사의 이유나 내용을 못 찾으시겠다고요? 그렇다면 제가 쉽고도 확실한 방법을 하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참 쉽습니다. 마음을 차분히 하시고요,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감사(danken)는 깊은 생각(denken)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스님들이 염주를 돌리거나 합장을 하면서 ‘나무관세음보살’ 하시는 것을 들어보셨죠? ‘관세음보살에게 귀의(歸依)합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불교에 ‘나무관세음보살’이라는 염원을 담은 주문이 있듯이, 저희 개신교에도 있습니다. 제가 한번 해 볼 테니까, 교우 여러분들께서는 아~멘~으로 화답해 주시면 됩니다. 먼저 가슴 앞에 기도 손 하시고요, 항/기/쉬/말/기/범/감~~~ (아~~멘~~).
항기쉬말기범감. 뭔지 감을 잡으셨나요? 맞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 나오는 말씀인,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에서 첫 글자를 딴 것입니다. 18절 뒷부분을 마저 읽어 드리면 이렇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 덕목인 것입니다. 성령에 이끌려 항상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믿음의 영으로 사는 삶은 낙심하지 않고, 날로 새로워지는 삶입니다. 이어지는 고린도후서 4장 16절과 17절을 보시면, 믿음의 영으로 사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고 겉사람은 낡아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차 올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겪는 고난을 일시적이고 가볍게 여기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서 마가복음 3장에는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잡으러 와서 사람을 들여보내어 예수를 불렀을 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외부적인 핍박이나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포함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받는 거절과 무시와 홀대는 더욱 쓰라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영으로 사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고, 욥처럼 “나의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중국의 은나라를 세운 탕왕은 자신이 상요하는 세숫대야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겼다고 합니다.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 진실로 날로 새로워지고,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져라. 주의 성령과 동행함으로 우리의 속사람도 일신우일신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서 구절 가운데,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주님의 일을 하다가도 때때로 지쳐 쓰러지거나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도 있듯이, 어찌 보면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 낙심과 고난이 따라오는 것은, 물체에 그림자가 따라오는 것처럼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23절부터 25절에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낙심하고 있거나 고난받고 있는 교우들과 이웃들에게 마음을 써서 다가가서 사랑과 선행을 베풀고 격려하는 향기 나는 이웃 향린 교우들이길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영으로 사는 삶은 역설(逆說, paradox)의 길을 걷는 삶입니다. 마지막 부분인 고린도후서 4장 18절과 5장 1절을 보시면, 믿음의 영에 의해 이끌리는 사람은, 땅의 장막집이 아닌 주님이 예비하신 하늘의 영원한 집을 소망하며,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영적인 각성 내지는 눈뜸, 개안(開眼)을 하게 된다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하긴 영적인 각성과 눈뜸 없이 어떻게 역설의 진리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한 성자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합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밝은 새날이 온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어떤 제자는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알 수 있다고 대답했고, 다른 제자는 동창이 밝아 사물의 형체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영적인 스승은 다 아니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새날은 저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의 형제자매로 보일 때 비로소 온다. 주변을 한번 돌아보시겠습니까? 앞뒤좌우에 앉아 계신 분들이 누구로 보이십니까?
노자의 도덕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19장] 당무유용(當無有用): 비어 있음으로써 쓰임이 생긴다.
[37장]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45장] 대교약졸(大巧若拙): 크게 솜씨가 있는 것은 마치 서툰 것과 같고,
대변약눌(大辯若訥): 크게 말을 잘하는 것은 마치 더듬는 것과 같다.
진리의 핵심 내지 정수(精髓)는 역설(paradox)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크게 솜씨가 있는 것은 마치 서툰 것과 같고, 크게 말을 잘하는 것은 마치 더듬는 것과 같다. 비움이 쓰임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해낸다. 이러한 노자의 역설처럼, 기독교와 불교, 이슬람을 포함한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진리는 역설의 길을 갈 때, 찾을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선불교의 역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꼴찌가 되고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역설, 약할 그때가 가장 강하며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역설, 구원의 길은 찬란한 영광이 아닌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과 희생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역설 등등 이 모든 역설을 기꺼이 감당하고 그 길을 걷기 위해서는 믿음의 영에 이끌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제2 성서 고린도후서 4장 13절부터 5장 1절의 본문을 중심으로, 믿음의 영으로 사는 삶이란, 감사가 넘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삶, 영적인 각성을 통해 역설의 길을 기꺼이 걷는 삶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제1 성서 사무엘기상 8장에는 믿음의 영이 아닌, 육신 또는 세상의 영에 속한 삶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나옵니다. 영의 사람 사무엘은 늙었고 그 아들들이 사무엘의 길을 따라 살지 않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에게 와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사무엘이 마음이 상하여 주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주님은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주되, 엄히 경고하여 그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이 어떠한 것인지 알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영이신 하나님 대신에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그 왕이 행사하는 권한을 통해 세상에 속한 삶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지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이스라엘이 요구한 그 왕은 백성들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와 말을 다루게 하고 천부장과 오십부장으로 임명하고 무기와 병거를 만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병거와 말은 전쟁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육의 영, 세상의 영에 이끌리는 삶은 반평화적인 삶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는 여덟 가지 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의 영에 이끌리는 사람은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전쟁 같은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지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 그 왕은 이스라엘 백성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유도 만들게 하고 요리도 시키고 빵도 굽게 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갈 것이라고 사무엘은 전합니다. 이는 약탈과 착취의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영이 아닌 육의 영, 세상의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약탈과 착취의 대상이 되어 피폐한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약탈과 착취의 주체가 될 수도 있음을 늘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왕은 이스라엘 백성의 곡식과 포도, 그리고 양 떼 가운데서 열에 하나를 거두어 갈 것이며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종으로 삼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한 것은 ‘열에 하나’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신명기 26장에 보면,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서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따로 구별된 사람들로 오늘날로 치면 목회자를 말하는 것이고, 객과 고아와 과부는 오늘날의 사회적 약자들을 말할 것입니다. 세상의 영, 육의 영을 따르는 삶의 모습이란 십일조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것을 침범하는 삶이요, 그것은 곧 이웃 사랑 실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드려야 할 하나님의 것을 드리지 않고, 이웃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삶의 결말은 어떨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왕의 종이 되는 것처럼, 결국에는 자유인에서 종으로 전락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 23절에는 믿음의 영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두의 자기소개에서 잠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제가 향린에 오기 전에는 소위 보수적인 교회에서 이십 대 중반까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마 저와 비슷한 신앙생활 이력을 가진 교우분들께서는 아시겠지만, 중고등부 수련회를 가게 되면 끼니마다 밥을 먹기 전에 요절(=중요한 구절) 암송 시간이 있었고, 그걸 조별로 1열 횡대로 나란히 서서 외우지 못하면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전문용어로 빠꾸(?)를 당했고 빠꾸의 무한 반복 과정을 통해 결국 조원 모두가 외우게 되면 뿌듯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식판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갈라디아서 5장, 22, 23절도 그때 암송 요절 가운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한 번 외워 볼까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인내)과 자비(친절)와 양선(선함)과 충성(신실)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23절 말씀. 아멘! 이렇게 해야 먹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앞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새번역 성경에서는 희락이 기쁨, 오래 참음이 인내, 자비가 친절, 양선이 선함, 충성이 신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성경공부를 하다가 두 가지를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열매는 삶에서 순차적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한 덩어리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NIV 영어 성서에도 열매를 뜻하는 단어 fruit은 단수 형태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친절하지 않고 선하지 않고 충성스럽지 않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하나는, 공교롭게도 성령의 열매의 순서가 사랑에서 시작해서 절제로 끝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섯 가지 맛이 난다는 오미자보다 더 다양한 맛이 나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의 달콤한 맛에서 시작해서 절제의 상큼한 끝맛으로 마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맛이 나는 열매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겠죠?
말씀을 요약하고 맺겠습니다. 믿음의 영인 성령으로 사는 삶이란, 감사가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삶, 영적인 각성을 통해 역설의 길을 기꺼이 걷는 삶입니다. 하지만 주의 성령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반평화적인 삶, 약탈과 착취의 삶, 하나님의 것을 침범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종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 또는 세상의 영에 이끌리려는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지만, 믿음의 영에 이끌리는 우리의 속사람은날로 새로워져서,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영인 성령을 주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일에 사용하도록 합시다. 매 순간 성령에 이끌리어 살아가면서 성령의 열매를 가득 맺고, 그 힘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