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꿈을 품고 산다는 것은 ㅣ 박희규 ㅣ 2024-06-16

by 김지목 posted Jun 17, 2024 Views 7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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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꿈을 품고 산다는 것은

민수기 36:1-11

 

고등학교 때 공부가 참 재미없을 때가 있습니다? 근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재미없으면 안한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미없는 것을 재미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제 고등학생 때 영어 선생님은 키가 크신 멋쟁이셨는데 우리에게 멋진 영시나 팝송을 자주 알려 주시던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주겠다.” 자 그러면 고등학교 생활에서 어떻게든 재밌는 요소를 찾아내야 하는 저는 어떻게 했겠습니까? 적어 놔야죠. 혹시라도 선생님께서 잊어 버리고 저 얘기를 안 해 주실지도 모르니까 말이지요. 그러고 다음 시간이 되었습니다. 수업 시작하자마자 저는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이번 시간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하고 말씀 드려야지요. 그렇게 쏠쏠한 것을 그냥 넘길 수 없거든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잘 들어 보렴하시면서 다음 지문을 읽어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찰리 채플린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습니다. 미국이 대공황을 겪고 있을 때 찰리 채플린은 한 손에는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에는 깡통을 들고 뉴욕 시내를 구걸하고 돌아다니며 연명했다고 합니다. 어렵게 살던 그 시절 그는 뉴욕의 거리를 걸어 다니며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다.” 어리둥절해 하는 우리에게 선생님께서 찰리 채플린이 중얼거렸던 문장을 다시 읽게 하셨습니다. “I am the greatest actor in the world.” 우리는 문장을 읽고 선생님을 쳐다 봅니다. “이 문장의 시제를 보렴. I will become the greatest actor in the world가 아니고 I am the greatest actor in the world라고.” 그는 거지로 살면서도 자신이 이미 훌륭한 배우라 생각하면서 훌륭한 배우의 삶을 살고 있었다고. 꿈을 현재로 살아내고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이제 이쯤 말씀드리고 나면 아 이제 설교가 끝났구나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이야기라는 것은 이렇게 멋진 결말이 있어야 듣는 맛도 있고, 하는 맛도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민수기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결론인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민수기는 사실 참 재미있는 책입니다. 특히 레위기 읽다가 민수기로 넘어가면 뭔가 읽는 맛이 나지요.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보호 받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광야 생활을 하는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불평 불만도 나옵니다. 요단강가에 와서 가나안 땅으로 정탐군을 보내 놓고 그들의 보고를 듣고 달달 떠는 이야기도 나오고요. 그러던 그들이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다시 요단강가에 돌아와 건너편 가나안에서의 생활을 준비하며 겪는 것들을 담은 책이 민수기입니다. 이런 이야기의 결론은 어떻게 맺어야 할까요? 그들을 그곳까지 인도했던 모세가 어떻게 죽는지를 서술했으면 어땠을까요? 모세의 리더십을 여호수아에게 인수 인계하는 장면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런데 정말 재미없게도 민수기의 마지막 장들에서는 여러 명령과 규례가 선포됩니다. 그 후 가장 마지막 장에 나오는 것은 그 명령과 규례에 대한 불평이 나옵니다. 저번에 이렇게 명령하셨는데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는 불평이 나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여자들이 받을 유산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장면이지요. 욕심 많은 여자들의 치맛바람의 이야기일까요? 도대체 어떻게 이런 내용이 민수기의 결론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수기 27장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 같이 민수기 271절에서 11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민수기 271-11절 말씀

요셉의 아들 므낫세 종족들에게 므낫세의 현손 마길의 증손 길르앗의 손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의 딸들이 찾아왔으니 그의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
2 그들이 회막 문에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지휘관들과 온 회중 앞에 서서 이르되
3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로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5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아뢰니라
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7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8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딸에게 돌릴 것이요
9 딸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10 형제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아버지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11 그의 아버지의 형제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주어 받게 할지니라 하고 나 여호와가 너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판결의 규례가 되게 할지니라

 

이 말씀에는 오늘 읽은 구약성서 본문에 나오는 슬로브핫의 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슬로브핫은 애굽을 나온 세대에 속했던 사람이고 그는 딸만 다섯인 딸부자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말라, 노아, 호글라, 밀가와 디르사, 이들은 요단강 건너편에서 모세가 각 지파가 받을 땅을 분배해 주었을때, 그들의 아버지인 슬로브핫의 몫으로 분배된 땅이 아들이 없어 자신들의 세대로 전해지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고 모세에게 나아와 항의했습니다. 그들의 항의는 하나님께 정당하다는 판정을 받고 딸만 있고 아들이 없는 가문에는 딸이 땅을 상속받을 수 있는 법이 생겼습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와 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시대에 상당히 놀라운 결정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민수기 본문에서는 다시 이 다섯 딸들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 부분에는 요셉 자손의 종족 중 므낫세의 손자 마길의 아들 길르앗 자손 종족들의 수령들이 나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수령들이 누구인지 이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된 문헌인 성경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등장할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무시하고 지나갈 때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아서, 즉 그들이 뭔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수령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다른 이들이 이름이 나옵니다. 이 다섯 딸들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여성들의 이름이 나오면 그것은 자세히 눈여겨 봐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남성중심 고대사회에서 여성의 이름은 웬만하면 묻히기 마련이기에 뭔가 절대 무시못할 역할이 있었다는 것을 그 이름들이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나오고 수령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은 분명 그 수령들이 하는 말이 사실은 이 여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땅에 목숨을 매는 욕심 많은 여인들의 치맛바람에 가문의 우두머리와 모세가 흔들리는 모습. 그게 민수기의 결론일까요? 뭔가 이상합니다. 계속 생각해 보면서 그들의 주장을 좀 자세히 들여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도대체 땅을 이미 유산으로 받은 여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주장했기에 이 이야기가 민수기의 결론이 되었을까요? 본문을 잘 들여다 보면 우리는 그들의 주장의 핵심이 희년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희년은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던 제도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안식을 취하셨던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본받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던 주님은 7번째 돌아오는 해도 안식년으로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온 식솔들과 가축까지 안식을 취하길 원하셨던 하나님은 안식년에는 땅도 쉬게 하십니다. 아무것도 심지 말고 땅을 놀게 하라고 하십니다. 땅이 놀면 농경사회에서 무얼 먹고 살까요? 아니나 다를까 레위기 2520절에 일곱째 해에는 씨를 뿌려도 안 되고, 소출을 거두어 들여도 안 된다면 그 해에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하고 너희는 물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에 하나님은 여섯째 해에, 내가 너희에게 복을 베풀어 세 해 동안 먹을 소출이 그 한 해에 나게 하겠다.” 고 하십니다. 왜 삼 년간 먹을 소출을 여섯째 해에 주신다고 하셨을까요? 한 해치가 나오면 수확한 그 다음해 동안 먹으면 되고, 두 해치가 나오면 수확이 없었던 그 다음해에 먹으면 되지 않겠어요? 이 삼 년 어치의 소출은 희년을 염두에 두신 것이었습니다. 희년은 안식년을 7번 세고 나면 7번째 안식년 다음해를 다시 안식하며 쉬라고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 해에는 그러나 쉬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희년이 되면 모든 백성이 저마다 그 조상이 분배 받은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향에 돌아가 모두가 새 삶, 새 출발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도가 성립되려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야 했습니다. 우선 땅값을 계산하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49년이라는 세월은 참 긴 세월입니다. 강산이 5번은 바뀌었어야 하는 시간이지요. 그 시간 동안 어떤 이들은 분배 받은 땅에서 잘 살고 있을 수도 있고 애를 너무 많이 낳아서 아님 너무 적게 낳아서, 받은 땅이 비옥하지 못해서, 재난이 나서 등 여러 이유로 어떤 이들은 가난해 질 수도 있는 시간입니다. 가난해 진 사람들 중 빚을 져야 하는 이들이 나올 수도 있고 빚을 졌는데 그 다음해에 빚을 못 갚아 점점 더 큰 빚을 지는 사람들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빚을 돈이나 소출로 갚지 못하고 땅을 팔아 갚는 이들이 생길 수도 있고 노동력으로 갚아야 하는 이들도 생겨 남의 집 노비로 들어가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희년이 되면 그들의 땅이 회복되고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희년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땅 값을 계산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즉 희년까지 20년이 남았으면 그 땅값은 20년의 소출에 해당하는 값이 될 것이고 같은 땅이라도 희년까지 5년밖에 안 남았으면 그 값은 5년의 소출을 계산해야 하니 훨씬 싸지겠지요. 노비의 값도 마찬가지로 희년까지 남은 시간으로 계산하게 됩니다. 즉 희년이 생기면 모든 경제 생활의 판이 새로 짜지는 것입니다. 긴 세월을 지내며 경제적으로 매인 이들이 속박에서 풀려나와 귀향을 하고 자유를 얻는 은혜의 제도였습니다.

 

이 희년 제도는 실제로 실행되었을 가능성이 적다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실제로 이렇게 큰 일이 실행되었을 때 생겼을 거대한 사회적 충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희년이 성사 되려면 있는 자가 자신의 소유가 된 것을 내려 놓고 포기해야 하는데 그것을 해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없는 자는 희년을 목을 빼고 기다리겠지만, 있는 자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 희년이기 때문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 말라, 노아, 호르가, 밀가와 디르사는 없는 자였다가 있는 자가 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법을 놓고 철저히 준비하고 계산을 해보았습니다. 계산과 계획은 우선 안식년을 준비할 때 꼭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식구들이 얼만큼 식량이 필요한지 철저히 계산해서 저장을 해놓아야 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지요. 그와 같이 그들은 먼 미래를 바라보며 희년까지의 자신의 삶들을 계획해 보았습니다. 장래 어머니가 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이 주신 희년의 비전을 철저히 계획해 본 여인들은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던 처녀들이었던 이 다섯 자매는 자신들이 가까스로 지켜낸 아버지의 땅이 자신들이 누구와 결혼하냐에 따라 그 운명을 달리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50년 후에 자신들은 살아 있을지 죽었을지 모르나 자신들의 자식들은 슬로브핫이 분배 받아 자신들이 상속받은 땅으로 돌아 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그들은 그들 아버지의 땅으로 돌아가야 하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파가 다르면 어머니의 땅을 잃게 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너무나도 어머니다운 계산을 해본 이들은 희년의 법이 제대로 성사되기 어려운 구멍을 찾아내어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설득하고 모세를 설득해 낸 것입니다.

 

이들의 계산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희년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그려본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희년의 꿈을 꾸시는데 그 꿈을 같이 꾸고 현실적으로 계획해 본 유일한 사람들이 슬로브핫의 딸들, 말라, 노아, 호르가, 밀가와 디르사였던 것입니다. 정의가 물같이 흐르기를 원하시던 하나님의 꿈이, 가진 자들의 욕심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현실 속에서, 이 희년의 꿈은 저항의 꿈으로 남아 이사야서에서 목소리를 찾고 낮은 자를 찾아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꽃을 피웁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으로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당에 가셔서 읽으셨던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교독문에서 우리가 함께 교독했던 이사야서 61장 말씀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이 백성이 도둑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굴 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되돌려 주라 말할 자가 없도다 (이사야 43: 22) ”라고 한탄하시며 가슴 아파하십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며 약자에게 공의가 주어지길 원하시는 하나님은 간절하게 희년을 이루어 줄 이를 찾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음이 담긴 이사야서 61장을 두루마리에서 찾아 읽으십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여기서 은혜의 해가 바로 희년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억눌린 자의 자유와 해방을 꿈꾸시는 하나님의 꿈을 현재로 선포하시고 살아 내십니다. 말라, 노아, 호글라, 밀가와 디르사가 계산해서 계획했던 그 희년의 꿈, 면면히 이어와 예수님께서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렇게 내 인생을 계획하고 내 자식들이 살아가는 모습들을 그려볼 때 하나님의 꿈이 펼쳐진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계산을 해야 하고 그것에 따라 나의 일상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 지를 생각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꿈을 품는다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생활방식입니다. 우리말로 종말론이라는 말은 매우 어둡게 들리지만, 종말론은 eschatology라는 신학용어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에 들어 있는 eschaton이라는 명사는 이사야서에서 반복되는 그 날이 오면의 그 날이고, 은혜의 해가 도달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종말론은 종말이기도 하지만 은혜이기도 하고, 희망이기도 합니다.

저번에 제가 이 자리에 섰을 때, 기후위기 속에서 역사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인류에 절망하여 대학에 안 가겠다는 우리 딸 이야기를 나눴었는데요, 그 녀석이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있네요. 그 아이가 중학생 때 자신에게 30년 밖에 안 남아있다고 자신의 삶의 기간을 한정했던 절망감을 활기찬 대학 생활 속에서 잠시 잠재우고 나니, 양가 부모님께서 이리저리 몸이 좋지 않으신 연세가 되어 계시고, 얼마의 시간이 남았는가 고민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각자의 한정된 시간의 eschaton을 바라보며 살아가면서, 요즘 삶에 희년과 같은 시간 제한을 두어 보는 연습을 해보고 있습니다. 나에게 1년이라는 시간만 남아 있다면 나는 그 1년 동안 무엇을 하며 살것인가? 5년이라는 시간만 남아 있다면, 10년이라는 시간만 남아 있다면, 30년이라는 시간만 남아 있다면, 나는 현재를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계속 고민해 보고 있습니다. 제가 깨닫는 것은 1년이냐, 5년이냐, 10년이냐, 30년이냐 하는 시간대 별로 해야 하는 숙제가 매우 구체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계산하다 보면 마음이 가난해지고, 몸도 가난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럴 때 하나님의 꿈을 살아내기에 적합한 사람이 됩니다. 찰리 채플린이 대공화의 열악함 속에서 꿈을 현재로 살아냈듯이 하나님의 꿈을 품은 이는 일상에서 하나님의 꿈을 실현된 상태로 살아냅니다. 즉 슬로브핫의 딸들, 말라, 노아, 호글라, 밀가, 디르사처럼 하나님의 꿈을 계산하고 살아냅니다.

그렇다면 민수기의 결론은 결국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희년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낸 여인들의 이야기로 맺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은 이렇듯 하나님의 꿈이 실현된 현실을 현재에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이 바로 민수기의 결론입니다. 민수기의 결론 멋지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희년의 꿈이 이루어진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떤 현실을 살아 나가시겠습니까? 우리 모두 어딘 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치열하게 살고 계신 삶 속에서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사신다면 어떻게 달리시겠습니까? 오늘 어떻게 사랑하시겠습니까? 오늘 어떻께 공의를 행하시겠습니까? 오늘 어떻게 억눌린 자가 해방을 얻고 어떤 아픈 이가 치유를 받고 어떤 이가 자유를 얻겠습니까?

제 결론은 여러분이 어디선가 들어보셨음직한 이야기로 맺겠습니다. 어느 마을에 비가 너무도 오랫동안 내리지 않아 깊은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어느 날 교회당에 모여 비를 내려주시기를 합심해서 기도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모두 함께 모여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 시원시원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한 소녀 외에는 아무도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그 소녀는,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면 비가 올 것이어서 우산을 챙겨왔어요라고 말합니다. 꿈이 현재와 만난 삶을 사는 말라, 노아, 호글라, 밀가와 디르사와 같은 소녀입니다. 어린 거지 찰리 채플인이최고의 배우의 삶을 대공황 중에 현재형으로 살아냈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상황이 어떠하던 하나님의 꿈을 현재형으로 살아내 봅시다. 사랑하는 교우님 여러분의 삶 속에 이렇게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이제 잠시 침묵 속에서 마음에 가라앉는 말씀을 짚어 봅시다.

세상으로 보냄

민수기의 결론을 말씀드렸으니, 민수기에 나오는 기도로 여러분을 세상으로 보내는 말씀을 나눕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고자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꿈을 현재형으로 살아내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원하오며, 여호와께서 그 얼굴로 우리에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우리를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