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평화가 살 길이다
시편 120:6~7, 마태복음서 5:23~24, 에베소서 2:14~18
한기양 목사(NCCK 화해와통일위원장)
위기에 처한 평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세계교회가 함께 드리는 남북평화통일기도주일입니다.
지난 6월19일 조선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가장 시선을 끈 내용은 제4조로서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들로부터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연방의 법에 준하여 지체 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부분입니다.
이는 북·러가 사실상의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지체 없이”라는 표현은 ‘자동개입'을 연상시킵니다. 동시에 유엔헌장 제51조와 각자의 법을 언급한 부분은 해석상의 여지를 남겨 놓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다른 상호방위조약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상호방위조약과 비교해 보면,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조는 제3자의 무력공격 시 “각자의 헌법상의 수속에 따라 행동할 것을 선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미일상호방위조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헌법상의 수속은 대체로 국회(의회)의 동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동개입이 조약상의 의무는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32개 회원국이 집단방위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는 어떻습니까? 북대서양조약 5조는 ‘동맹국에 대한 외부의 무력 공격을 나토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골자로 합니다. 5조에 대한 나토의 공식적인 해석을 보면, 회원국의 원조가 “반드시 군사 원조일 필요는 없고… 기여 방식은 회원국의 결정에 따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선이 중국과 1961년 7월에 체결해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조약 2조에는 “조약 일방이 어떠한 한 개의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조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호방위조약과 달리 사실상의 자동개입 조항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 조약과 북·러 조약을 비교해 보면, 주목할 만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북·러 조약이 상기한 조약들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한 부분들을 모두 원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에서 언급된 국내법, 나토에 담긴 유엔 헌장 51조를 북·러 조약에 담은 것은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북·중 조약과 비교해 보면 “유엔 헌장 제51조와 북·러의 법에 준하여”라는 표현만 포함되었을 뿐 조항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북·러 관계가 북·중 관계에 준하는 수준으로 강화되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 신냉전의 한복판으로
북·러 조약은 한반도와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정세가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선 조선은 자체적으로 ‘안보 3중장치'를 갖게 되었다고 확신할 것입니다. 기존의 북·중 조약과 고도화를 거듭하고 있는 핵 무력에 이어 군사강국이자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와의 동맹도 사실상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의 자체적인 군사력 강화, 한미동맹 강화 및 사실상의 한미일 삼각동맹 추구 등과 맞물려 한반도가 신냉전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남북관계마저 전쟁위기를 말할 정도로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반도엔 냉전시대의 잔재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윤석열 정부와 김정은 정권이 이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신냉전의 한복판으로, 그것도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처럼 총체적 위기에 빠진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북미관계, 미중관계, 한일관계도 먹구름이 잔뜩 껴있는 상황입니다. 지난 2018년 우리는 한반도 평화가 바로 목전에 있는 것처럼 들떴던 적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볼모가 되어 있음을 참담하게 자각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분단된 지 79년이 된 지금, 비록 평화의 불빛은 가물거리고 있지만, 우리는 화해와 평화의 꿈은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다’라는 말을 꼭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더불어 산다는 것
오늘 구약의 본문 시편 시인의 탄식이 요즘 새삼스럽게 아프게 다가옵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도 오랫동안,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왔구나.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평화를 말할 때에, 그들은 전쟁을 생각한다.”(시120:6~7)
한편, 예레미야는 처연한 심정이 되어 자기 시대를 고발합니다. “내 백성의 혀는 독이 묻은 화살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말뿐이다. 입으로는 서로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서로 해칠 생각을 품고 있다.”(렘9:8)
요즘 우리 국민들도 아마 조중동을 비롯한 종편방송과 극우 You Tube 및 수구언론들이 쏴대는 독 묻은 화살에 맞아 정신이 혼미해지고 분노가 치밀고 있습니다. 평화는 모두의 꿈이지만, 그 꿈은 꺼질듯 위태롭기만 합니다.
인간은 누가 뭐라 해도 ‘함께 나란히 있는 존재’입니다.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지향과 성격과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때때로 갈등이 발생하고, 갈등이 증폭되다 보면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폭력은 파괴적인 에너지입니다. 그것은 감정적으로 분출되기도 하고, 안으로 스며들어 멍이 되기도 합니다.
만남과 공존은 늘 어렵기만 한 것일까요? 누군가가 이 세상에 있을 권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있음을 기뻐하는 것이 평화의 시작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꿈’
오늘 서신서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또는 비슷한 상황에 놓인 여러 초대교회들을 향하여 호소한 눈물의 편지입니다. 이렇게 편지를 쓴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교회 내 집단적 대립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들은 이런 서신을 회람하면서 문제해결의 방향을 잡아갔습니다.
개인감정을 해소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집단 사이의 증오를 화해로 바꾸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에게도 지역감정은 오래 전승되면서 심각한 사회갈등을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초대교회들이 마주한 여러 과제 중에는 집단감정의 문제가 드러나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유대인들에 의해, 유대인들만을 대상으로 전파될 때는 집단갈등의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는데, 사마리아와 소아시아로 확산되면서 교회 안에서 대립이 곳곳에서 발생했습니다.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유대교적 환경에서 낳고 자라난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예수님을 믿은 비유대인(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서로 다른 관습과 사고방식을 지닌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서로 다른 언어, 문화, 전통, 관습, 가치관 등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신약성경의 여러 서신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결과였습니다.
바울이 간곡하게 양측의 화해를 호소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데,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유는 화해를 통해 하나 되는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엡2:16)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만드셨고 나아가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들도 화해로 이끌어 한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십자가의 은총을 입은 우리는 마치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탕감 받은 감격으로 이웃들과의 작은 문제를 해소하여 원수가 아니라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아래 서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으니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무슨 이유라도 십자가로 원수를 소멸하고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삶에서나 집단적 생활에서나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고 기뻐하며 하나 되는 세상은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의 꿈이었습니다. 그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교회요, 교회는 자신 안에 그리고 세상을 향해 원수를 소멸하고 평화의 공동체를 만드는 거룩한 사명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서의 증언
성서의 복잡한 율법을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이웃사랑이라는 통로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어떻게 대하느냐의 관계 개념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인 복음서의 본문의 말씀도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형제와 먼저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화해는 우리의 사고와 태도를 바꾸고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한반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성서가 말하고 있는 화해와 평화입니다. 분단 79년의 아픈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화해이고 평화입니다. 분단 79년이 지났지만 지금 한반도에는 아직도 분단체제가 공고합니다. 미움과 적대감정이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드리기 보다는 나와 다른 것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에 의하면, 분단체제 아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반쪽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화해를 하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체제로 79년을 살아온 같은 민족이 민족동질성을 찾아 서로 화해하고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사랑(요13:34) 이웃사랑(막12:31) 원수사랑(마5:44)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입니다. 그 모든 것에 해당하는 ‘북녘동포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 앞에 ‘아멘’하며 따르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이념적인 논쟁도, 정치적인 시비도 다 뿌리치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북녘을 위해 기도하며 나눔의 손길로 돕는 데 앞장서며 화해의 발걸음을 걸어가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기도
이 민족에게 특별한 고난을 겪게 하신 하나님,
이 고난이 한반도의 평화통일로 승화되어
이 땅에 갈등과 분쟁과 분열을 치유하는 화해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저희가 화해의 발걸음을 이어가도록 말씀으로 하나 되고,
교회가 하나 되어 북녘의 동포들의 어려움을
두 손 모아 기도하며 도우게 하옵소서.
지난 79년 동안 분단의 장벽을 높이며 서로 증오해 온
저희들의 허물과 죄를 불쌍히 여기사 용서해 주옵소서.
바라옵기는, 이 일에 저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앞장서도록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저희로 하여금 결단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가서 먼저 화해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저희들로 하여금 두 손 모아 기도하며, 나눔을 실천하는 ‘돕는 손길’을 통해
화해를 이루어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옵소서.
지금 이 땅에서 저희를 평화의 사도로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