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가난한 자를 선택한 이유 | 김희헌 | 2018-09-09

by 김희헌 posted Sep 09, 2018 Views 58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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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가난한 자를 선택한 이유 (22:102,8-9,22-23, 2:1-10,14-17, 7:24-37) / 2018.09.09. 창조절 둘째 주일

 

[삶이 만든 신앙의 질문]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저에게는 외부 활동이 좀 많은 주간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좀 드리면서 세상사를 좀 살펴보겠습니다.

화요일 오전에는 발언요청이 있어서 기자회견에 참석했습니다. 목동에 가면 열병합발전소가 있는데, 그 굴뚝 위에 파인텍이라는 지금은 사라진 회사의 노동자 두 명이 올라가서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75미터에 이르는 높은 곳에서 겨울과 여름을 모두 나고 300일이 지났습니다.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의 고용을 승계하겠다는 약속으로 헐값에 회사를 인수했지만, 이제 와서는 모른 체 하고 있는 사장에게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서촌 음식골목에 있는 궁중족발 앞에서 가진 기도회입니다. 옥바라지선교센터라는 단체에서 매주 기도회를 갖고 있는데, 그 모임에 참여하는 청년들이 예전에 학교에서 가르친 제자들이어서, 부탁을 받고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궁중족발은 건물주에게 쫓겨난 세입자를 상징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건물을 14채나 소유한 새 건물주가 갑자기 임대료를 300만원에서 1,200만원으로 4배나 올리면서 강제로 세입자를 몰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고 세입자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지난 목요일에 26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습니다. 그의 아내는 기자회견에서 달리 살아갈 방법이 없어서 버티고 있다고 고백한 것을 신문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어제는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자기 땅을 강제로 빼앗긴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들이 모여서 함께 모인 자리였습니다. 지난 330일 강남향린교회를 강제침탈 당한 우리 공동체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참석하여 요청된 발언을 했습니다. 9년 전 용산에서 대참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곳곳에서는 여전히 퇴거명령 행정집행과 토지 강제수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강제퇴거 행정집행이 무려 78천 건에 이르고, (2018.04.07, 경향신문) 각종 명목으로 자기 땅과 집을 부당하게 빼앗긴 사람들이 35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98일 대회 결의문)

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게 되는 것일까요? 얼마 전 경실련에서 나온 자료를 보니, 2017년 서울지역의 부동산 가격 상승분이 1년 국가예산보다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일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50% 이하로 내려갔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그 이유가 촛불정권이라고 말하면서도 부동산정권처럼 애매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 아닌지 되돌아 볼 일입니다. 국민들의 신뢰를 받으려면, 불로소득을 부추기는 정책을 단호히 폐기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일터에서 쫓겨나지 않는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한 주간 이러저러한 자리에 참석하면서 변화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을 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라는 이름이 무색하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런 질문을 안고 창조절 둘째 주일 성경말씀을 함께 살펴봅니다.

 

[지혜문학의 가르침, 잠언 221,2, 8-9, 22-23]

먼저 잠언 22장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원전 8세기에 시작된 예언전통의 뜨거운 격정과는 달리, 기원전 2세기의 지혜문학은 냉정한 평온을 보여줍니다. 잠언은 부자를 매도하지 않고, 가난한 자를 무조건 편들지도 않습니다. 잠언의 가장 큰 경고는 신중하지 못한 마음에서 생기는 어리석음입니다. 인생의 의미와 삶의 경험을 치우치지 않고 바라볼 것을 권합니다.

인간을 살펴보면 두 가지 상반된 갈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밑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떠받쳐줄 든든한 무엇을 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상할 수 있는 가벼움을 얻기 위해 자기를 비우고자 합니다. 만일 인간의 이런 두 가지 갈망을 몸의 필요와 맘의 소원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몸의 필요는 중력을 안고 살아가는 생명체의 숙명이라고 하겠고, 머리를 하늘로 두고 직립하여 하늘 뜻을 묻는 맘의 소원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신을 찾을 때에도 두 가지를 모두 요청합니다. 몸의 필요와 맘의 소원을 둘 다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는 채우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비우는 것으로서, 그 방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 둘의 요청을 동시에 이루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종교가 여러 모습으로 자기 길을 그르치게 되는 까닭이 생겨납니다.

몸의 필요에 집착하는 종교는 탐욕적인 종교가 되고, 몸의 필요를 무시하면 열광적인 종교가 됩니다. 맘의 소원에 집착하면 병리적 현상을 가진 종교가 되고, 맘의 소원을 무시하는 종교는 세속적 가치에 동화됩니다. 따라서 건강한 종교는 중용의 길을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것은 삶의 다양한 모습 가운데서 치우치지 않는 지혜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지혜를 말하는 것이 잠언입니다.

10년이 지났어도 잊히지 않는 한 정치인의 발언이 있습니다. 종부세 문제로 논란이 있던 당시에 그는 정부 경제부처의 수장으로서 국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서민에게는 대못을 박으면 안 되고, 고소득층에게 대못을 박는 상황은 괜찮은 것이냐?” 중립과 평등을 가장한 이 발언은 사실 부유층의 약탈적 권리를 옹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집사였습니다.

잠언이 중용의 지혜를 추구한다 하여, 중립적인 윤리를 말하는 것으로 보면 오해입니다. 잠언은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에, 기계적인 중립에 빠진 관념적인 주장과는 다릅니다. 오늘 잠언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지나갈수록 그 주장이 점차 뚜렷해지면서 마침내 선명한 길을 제시합니다.

본문 1-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많은 재산보다는 명예를 택하는 것이 낫고, 은이나 금보다는 은총을 택하는 것이 낫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다 함께 얽혀서 살지만, 이들 모두를 지으신 분은 주님이시다.” 이것은 부자나 빈자나 함께 지켜야 할 윤리이자 믿음입니다.

이어지는 8-9절은 삶에 관한 관찰입니다. “악을 뿌리는 사람은 재앙을 거두고, 분노하여 휘두르던 막대기는 기세가 꺾인다. 남을 잘 보살펴 주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그가 자기의 먹거리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이런 삶의 관찰에 기반하여 22-23절은 뚜렷한 삶의 윤리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앙관을 제시합니다. “가난하다고 하여 그 가난한 사람에게서 함부로 빼앗지 말고, 고생하는 사람을 법정에서 압제하지 말아라. 주님께서 그들의 송사를 맡아 주시고, 그들을 노략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시기 때문이다.”

잠언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그 이유를 야훼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왜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의 편인지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유를 찾고자 하는 신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당찮은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지만, 하나님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문학의 눈으로 보면 왜 신이 가난한 사람들의 편인지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긴 역사를 살아남은 신은 부자들의 신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거나 조롱하는 신은 그 수명이 길지 않습니다. 민중들의 적이 된 신은 역사를 견디지 못합니다. 위용에 넘치던 바벨론 제국의 신 마르둑은 이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반면, 노예들의 해방에 관심한 야훼는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신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이런 인문학적 관찰은 상식적이지만, 신앙인의 종교심을 만족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보다 단언적인 답을 얻고자 합니다. 야고보서의 본문을 통해서 그 목소리를 들어보겠습니다.

 

[다가오는 나라의 상속자, 야고보서 21-10, 14-17]

오늘본문 야고보서 2장은 두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반부(1-13)차별에 대한 것이요, 후반부(14-26)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준 첫 번째 권면은 1절에 나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차별심을 품지 말고,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지십시오.” 이 말은 매우 강력한 요청입니다. 그것은 단지 차별하지 말라는 윤리적 권고에 그치지 않고, 그런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배치된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이런 경고는 공동체가 가진 문제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2-4절에 그 모습이 나옵니다. 회당에 좋은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을 때, 사람들이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이지요. 좋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말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판 밑에 앉으라.’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품이 나쁜 어떤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공동체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고보의 두 번째 권면이 5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진 지혜로운 공동체가 되는 길에 관한 방향 설정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pistis)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basileia)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 다가오는 하나님나라에 관한 것이라면, 그 나라를 향해 마음을 연 존재는 가난한 사람(ptóchos)이요,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하나님이 왜 가난한 사람을 선택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단언할 뿐입니다.

야고보의 이 말은 사람들이 암암리에 품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과 배치됩니다.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을 짐처럼 여기고, 가난의 이유가 그들의 어떤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부자들이 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다가오는 나라의 상속자도 부자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실제 상황과는 다른 것으로서, 욕망과 거짓이 만들어놓은 인지 부조화에 가깝습니다.

야고보는 거꾸로 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택함을 받아서 다가오는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본문 6-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이 받드는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

이것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관찰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목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설명을 통해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지 부조화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향해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뒤에 이어지는 행함(erga)의 강조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행함은 믿음의 진실을 드러내며, 거짓된 믿음과 헛된 믿음의 위선과 가식을 드러내는 것도 행함입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무용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종교적 삶의 이율배반과 부조화에 관한 지적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삶의 이율배반과 생각의 부조화가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잘못된 전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주로 관념적인 철학이나 지배 이데올로기가 여러 경로로 부지불식간에 우리 맘에 심어놓은 것들입니다. 신앙인의 삶을 엉망으로 만드는 대표적인 허위 사상은 바로 자신이 믿는다고 하는 신에 관한 관념적 사고입니다.

제가 신학을 공부하면서 집중했던 주제는 주로 신론이었습니다. 신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다 해서 신의 비밀을 많이 알게 된 것은 아닙니다. 대신 나에게는 믿기지 않는 신이 분명해졌습니다. 이제 나에게 믿기지 않는 신은 자기 맘대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힘의 신입니다. 저는 이제 그런 신을 믿지 않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저와 같은 깨달음을 얻은 신자들이 많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에 관한 생각의 부조화는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전지전능한 힘을 갖고 있지만 눈앞의 비극에는 무관심한 신입니다. 그런 신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자신의 삶이 도리어 지루해진 신이라 하겠는데, 그런 신은 사실 있으나마나 차이가 없는 존재입니다. 둘째는 질서와 규범을 어겼다고 사람들을 위협하고 벌을 주는 신입니다. 그런 신은 지배체제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신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관념적인 철학자들이 만들어놓은 신이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런 신을 가정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이 세상의 질서와 체제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좌절감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말했듯이,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하신 하나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복음서가 증언하는 내용을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의 변화, 마가복음 724-37]

오늘 마가복음 본문은 두 개의 치유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병에 걸린 딸을 고쳐달라고 찾아온 이방 여인의 이야기, 다른 하나는 귀머거리이자 말이 어눌한 사람을 치유한 이야기입니다. 언뜻 보면, 오늘 본문은 두 차례의 기적을 연이어 일으킨 예수의 능력을 다룬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만일 기적을 베푼 예수의 능력을 찬양하기 위해서라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성서일과는 오랜 동안 이 두 본문을 동시에 읽어왔습니다. 우리는 이 두 이야기를 왜 함께 읽어야 하는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두 이야기에서 가장 큰 차이는 예수의 태도입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쌀쌀맞은 모습은 마치 부풀려진 듯이 과장되어 있는 반면, 뒤에 나오는 예수의 행위는 아픈 사람과의 깊은 교감을 이루며 진행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지, 그것이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지 관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의 이야기는 여성신학의 도움을 받아 해석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서 고침을 받은 대상이 여인의 딸만이 아니라 먼저 예수 자신이었다는 관점에서 읽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뒤이어지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그리스 여성이 예수께 찾아와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이 말은 예수님의 평소 성품에 비쳐볼 때 과도하게 무례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마가복음서 기자가 만들어놓은 이야기의 장치로 보입니다.

거절당한 여인이 다시 예수께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여인의 대응은 상상너머의 것입니다. 그것은 대화의 질서를 흔들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의 기발함은 낮아지면서 길을 내는 방식에 있습니다. 그것은 면전의 사람을 가리켜 개로 언급한 예수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여인에게 말합니다. “바로 이 말 때문에(because of this word),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돌아가라.귀신을 나가게 한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당신의 말(logos)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이 돌아가고 나서 예수님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잘 고쳐주었다는 뿌듯함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을까요? 두 번째 이야기에서 우리는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를 지역의 차이에서 찾기는 어렵습니다. 마가는 이방지역의 선교를 거부하지 않고 장려하기 때문에, 이방 땅 두로 지역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배타적인 태도를 가진 것으로 묘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두 이야기의 차이는 지역의 차이가 아니라, 변화된 예수의 모습에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와 다른 두 번째 이야기의 특징은 병자와 교감하는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마가복음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예수님의 행위를 정성껏 묘사합니다. 아픈 사람을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한 다음, 그에게 말씀하셨다. ‘에파타(Ἐφφαθά)’이 말씀으로 열린 것은 아픈 사람의 귀와 입만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소통하고, 하늘과 땅이 소통합니다. 세상이 재창조 된 것입니다. 그 출발은 예수의 변화에 있습니다.

 

[창조의 신에 관한 신학적 단상]

저는 여기서 좀 더 도발적인 주제를 꺼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창조절의 믿음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셨다는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꾸로 해서, ‘세상이 하나님을 지어가기도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기독교의 믿음이 될 수 있을까요? 많은 분들이 기독교 신학은 그런 주장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과정신학이라고 불리는 기독교 사상은 그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합니다. 하나님과 이 세계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생각의 단초를 만든 사람은 사무엘 알렉산더라고 하는 유대인 철학자입니다. 그는 벌써 100년 전에 유럽을 대표하는 지성이 소개되는 기포드 강연에서 하나님도 진화한다는 주장을 한 바 있습니다. (Space, Time and Deity, 1916-1918) 그의 사상이 너무 일렀기 때문에 존경받기보다는 이단이라는 비난을 더 받았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진정한 신앙인들은 이미 그와 같은 생각을 전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기도의 관계를 생각해보죠.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우리의 간구는 하나님에게 전달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진실한 간구가 하나님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관계는 지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신실한 관계는 서로의 변화를 전제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창조적인 세계라면, 그 세계를 지어가는 창조주 역시 변화를 거듭하는 존재, 창조의 동력은 바로 자신의 변화에서 나올 것입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 역시 자기를 비우고 먼저 변하여, 당신을 따르는 이들 역시 변화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선택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곳이 창조의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절 둘째 주일 묵상의 주제를 야고보서 25절에서 찾았습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예수님은 자신을 비워서 하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모든 새로운 창조는 변화된 자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도 예외는 아닙니다.

새 삶을 꿈꾼다면 낮아져야 합니다.

가난한 심령에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를 새롭게 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