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보시는 앞에서 ㅣ 김지목 ㅣ2024-09-15

by 김지목 posted Sep 15, 2024 Views 1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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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20240915 창조절3, 한가위감사주일

 

주님 보시는 앞에서"

1:20-33, 116:1-9, 3:1-12, 8:27-38

 

오늘 복음서의 본문은 마가복음서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는 분수령이 되는 구절입니다. 이전까지 마가복음서는 많은 기적설화들이 등장하고 귀신들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반면 후반부에 접어든 오늘 본문 이후부터는 기적설화가 많이 등장하지 않고,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이 제자들의 고백을 통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와같이 마가복음서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하여 편집한, 저자 마가의 구성 의도를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은 공관복음서인 마태와 마가, 누가복음서가 공히 강조하는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이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마가복음서는, 전반부는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 귀신들이 인정함으로써 그 주제를 말하고 있고, 이제 오늘 본문 이후부터는 전반부의 과정을 경험한 제자들이 그 사실을 깨달아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고백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부각시키는 편집과 구성입니다.

 

전반부에서 예수님의 설교 곧 복음전달의 대상이 주로 무리들(오클로스)이었습니다만, 오늘 본문 이후 후반부에서 예수님의 교훈을 듣는 대상이 제자들이 됩니다. 제자들의 주체성이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전반부에서 복음전달의 주제가 주로 회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만, 후반부로 들어서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는 제자들이 하나님나라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암시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반면, 후반부에서는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가는 적극성이 돋보입니다. 전반부에서 유대교 지도자들과 대항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암시되고 축적되고 있지만, 후반부에서는 십자가 고난의 필연성이 공개적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구도에서 후반부는 제자들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결단으로 십자가 고난의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형성됩니다. 이것이 저자 마가가 구상하고 있는 편집의도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의 공통된 주제는 예수가 누구신가?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마가복음서가 특별히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강조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가공동체가 처했던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구별된 마가복음서의 관심은 박해로 환란 중에 있는 교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격려와 위로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그날, 파루시아의 소망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겪고 있는 고난을 인내하면서 제자의 도리를 끝까지 지켜내는 것, 이것이 마가복음서를 편찬한 주요한 관심사였습니다.

 

이와같은 마가복음서 편집의 의도에서, 마가복음서 전체 구성의 기점이 되는 오늘 본문의 중요한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 하며, 어떤 이들은 예언자 중 한 분이라고 합니다" 하고 답합니다. 로마의 칙령 아래 팔레스타인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던 세례자 요한의 뜻을 계승한 분, 이스라엘 백성을 강렬하게 이끌며 야훼사상을 가르쳤던 엘리야가 환생한 분, 수렁에 빠진 유대민족을 구원할 모세와 같은 지도자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그러한 세평이 더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더욱 중요한 것은,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언자라는 강렬한 칭송이 아니라, 고난을 인내하고 끝까지 하나님나라를 향해 나아갈 제자들, 교회들의 고백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나 예언자라는 드높은 칭송이나 관조자의 품격높은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몸으로/삶으로 구체적으로 만들어갈/실현해나갈 헌신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 다시 한번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답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복음서를 회람할 마가공동체에게 절실했던 것은 박해를 극복할 수 있는 믿음과 하나님나라를 향한 굽힘없는 신념이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하는 고백의 힘으로, 그 믿음과 신념으로 박해와 고난을 이겨내기를, 마가는 이 복음서를 전하면서 공동체를 위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종교를 구성하는 3대 기본요소는 경전의 전승, 공동체의 형성, 그리고 종교를 창시한 교주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성서에 증언된 사상을 진리로 여기고 세상에서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해 교회 공동체로 모였습니다. 성서가 우리의 내용이고 교회 공동체가 우리의 형식이라면, 종교를 형성하는 근원적인 힘은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 곧 그리스도이시라는 고백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으로 예수님이 교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근원이 고백인 것처럼, 박해와 수모를 당하며 때때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초대교회의 마가공동체는 베드로의 그 고백이 절실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흔하게 언급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보다 진지하게 말해져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의 예수 그리스도" 고백을 전제로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은 수난예고의 비밀을 제자들과 나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 자신은 불의한 구조악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고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럴 수는 없다며 예수님의 결의를 부정하고 항의합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심하게 꾸짖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과 같이 일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과제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나 자신의 생각, 인간적인 일, 세상의 논리를 초월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 자신을 스스로 부인하고, 회피할 수 있는 세상의 십자가를 자처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과정을 겪지 않으려는 베드로의 항의를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으로 단정하시며 꾸짖으셨습니다. 말씀드린 바, 사람의 일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적인 과제입니다. 마가공동체가 박해와 핍박을 받았듯이, 우리가 수행해야 할 그 과제는 세상의 질서와 논리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음란하고 죄가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품은 신앙의 결단은 어리석고 미련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당할 것입니다. 눈 앞에서 작용하는 권력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비난이 쏟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 너머에 하나님의 진리,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바라본다면 사람의 일, 세상의 권력은 우리의 관리대상일 뿐, 그것에 휘둘리거나 목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은 불의한 권력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실현되는 세상, 우리 모두를 위하여 상생하며 영원히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지, 어리석거나 미련한 것,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태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으로는 약육강식 논리에 잡아먹히지 않고 모두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35절에서,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이 말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비논리이며 오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으로,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구할 것"이라는 말씀은 진리의 역설입니다. 종교적인 역설은 관점의 전환으로 그 깊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으로 관점을 확장할 때, 생각의 차원을 달리 할 때 역설은 이해 가능합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지혜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좁은 생각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관점으로 확장된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지혜입니다.

 

오늘 제1성서 잠언의 말씀은 지혜가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아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라고 잠언은 우리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잠언 122-2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22) "어수룩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어수룩한 것을 좋아하려느냐? 비웃는 사람들아, 언제까지 비웃기를 즐기려느냐? 미련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미워하려느냐? (23)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아서거라. 보아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보여주고, 내 말을 깨닫게 해주겠다. (24) 그러나 너희는, 내가 불러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손을 내밀어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잠언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하는 어수룩하고 미련한 백성들, 권력자들을 향한 충고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안전과 평안, 곧 피조세계의 평화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반면 사람의 생각은, 빛이 있으면 어둠이 존재하는 이 상대세계 안에서 펼쳐지는 논리이므로 한쪽의 억눌림과 희생이 전제되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잠언의 지혜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초월하여 피조물이 함께 누리는 평화를 도모합니다. 그러나 지혜를 거스르는 사람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한쪽을 희생시키는 폭력을 용인하는 것이므로 종국에 파멸과 심판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본문은 지혜를 거스르는 사람의 생각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지 한 사례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상대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실수에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조심하면서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데, 특히 가르치는 사람이 되려고 혀를 함부로 놀려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전체를 아우르는 높은 차원의 하나님의 생각을 망각하고, 자기자신의 사람의 생각으로 타자를 지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권면합니다. 욕망은 겉잡을 수 없는 것이어서 매사 혀를 조심히 길들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산 전체를 불사르는, 공동체 전체에 위해를 끼치는 악독이 되는 경우를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혀를 길들이는 것, 악독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11절에 야고보서 기자는, “샘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우리 모두 혀를 다스려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의 권면대로 혀와 입으로 표출되는 사람의 욕망을 제어하여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의 수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늘 묵상하는 것, 이것이 지혜를 얻는 길입니다. 사람의 좁은 생각에 매몰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을 수련하는 자세를 오늘의 시편에서 찾아봅니다. 시편 1169절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지혜자가 수련하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삶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러내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 그 삶에 하나님의 지혜가 양육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간구를 들어주시고 목숨을 구해주시는 분,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신 분, 긍휼이 많으신 분임을 신뢰하면서, 하루하루 주님과 함께 살아갈 때, 십자가의 지혜를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창조절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묵상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의 생각을 헤아리는 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그 지혜로 말미암아, 욕망에서 기인한 사람의 생각을 구별하여 다스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서, 피조세계의 생명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선교를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보시는 앞에서 우리의 삶이 부끄럽지 않도록,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 향린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하겠습니다.

......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며 지혜로운 삶을 살도록 힘쓰십시오. 주님 보시는 앞에서 하루하루 살아가시는 여러분의 삶에 성령께서 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