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의 증인 | 유영상 | 2024-10-20

by 유영상 posted Oct 20, 2024 Views 7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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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20241020 창조절8]

 

 

섬김의 증인

 

(욥기 38:1-7, 34-41; 히브리서 5:1-10; 마가복음서 10:35-45)

 

 

여러분 반갑습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당신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인사 나누겠습니다. “당신을 섬기겠습니다오늘 성서의 말씀과 하늘뜻펴기를 통해 섬김의 증인이 될 것을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매월 둘째주와 넷째주에 유아유치부에서는 양육자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이 모임에서는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눴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날씨와 계절을 우리 아이들도 경험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지난 여름에 가을을 기다리며 날짜를 셈했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여름은 8월부로 끝나죠. 물론 9월에 곧바로 가을이 오지 않는다는 건 몸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10월에 올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불행한 것은 이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거겠죠. 이제는 지구온난화가 아니라 지구열대화라고 하는데, 기후위기의 위압감에 압도됩니다.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재난으로 다가온 기후위기는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합니다.

 

1. 욥기 38:1-7, 34-41 해설

 

욥은 이 비슷한 감정을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경험한 사람입니다.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으며 버틸 수 밖에 없는 고통, 또 곁에서 위로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로하겠다며 사람들이 찾아 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세 친구들은 욥의 고통은 욥이 잘못했기 때문이다며 욥을 질책했고, 뒤늦게 온 엘리후는 고통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욥기 33:29-30)’며 욥을 더욱 고통스럽게 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욥은 다 소용없다,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고 싶다고 말합니다(13:20-22).

오늘 제1성서 욥기 본문 말씀을 보면 욥은 그 바람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는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대답합니다. 그런데 정말 폭풍같은 건 하나님의 이 질문들입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라고 욥에게 묻습니다. ‘아니요라고 대답하기엔 그 질문이 담고 있는 의미가 거대하기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이 본문은 신정론에 관한 이야기, ‘우리에게 고통 당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지전능한 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답이 석연치 않습니다. 도리어 고통 당한 욥을 또 다시 질타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심지어는 이렇게 혼내시는걸 보니 욥이 진짜 잘못한게 있긴 하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투를 걷어내고 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 진실은 드러납니다. 우선 하나님은 욥에게 직접 말씀하시며 엘리후와 욥의 세 친구들, 엘리바스, 소발, 빌닷이 욥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던 하나님에 대한 해석들을 걷어냅니다. 하나님은 이 질문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여러 해석들로부터 스스로를 구출시킵니다. 욥도 자신을 더욱 힘들게 했던 엘리후와 그의 세 친구들의 관점에 갇힌 하나님이 아니라, 직접 만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진리와 가까워집니다.

하나님의 답변의 의미는 이렇다 하더라도, 그 답변의 내용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습니다. 욥을 매우 차갑게 대하는 태도, 이 때문에 그 의도를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 엘리후, 욥의 세 친구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수많은 대화와 논쟁들을 서로 대조해 보면 그 진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한 이 차가운 답변들은 욥의 신앙과 맞닿아 있습니다. 욥이 일전에 세 친구들과 엘리후에게 대답할 때 말한 내용과 흡사합니다(9:4-12). 창조세계와 밀접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그리고 인간은 이것을 모두 알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반대로 엘리후와 욥의 세 친구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답변과 대비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이해하면서도 인간의 한계성에는 인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한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이 이미 구상한 상식으로 세상을 이해합니다. 그 상식이 한 사람을 더욱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서슴치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욥을 직접적으로 편들지 않지만 욥의 신앙고백과 흡사한 내용을 반복해서 말하며 욥을 편드는 하나님, 그리고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지만 자신의 논리로 고통 받는 사람을 더 고통 받게 하는 사람들의 무지함을 꼬집습니다. 그렇게 고통 받는 욥을 구해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계산한 상식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더 고통케 했던 엘리후와 욥의 세 친구들의 논리를 무력하게 합니다.

우리가 자명한 사실로 믿고 있는 영역이 무너질 때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겸허히 받아 드린다는 건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 알 수 없는 영역을 손 놓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채워나가면서도 다시금 비워내는 성찰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2. 마가복음서 10:35-45 해설

 

시대의 상식에 대한 성찰과 결단은 오늘 읽은 제2성서 마가복음서 본문에서도 드러납니다. 종말, 아직 오지 않은 최종적인 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시대를 진단하고 이 속에서 섬김의 책무를 강조합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에”, 즉 종말이 왔을 때에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은 내가 할 수 없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마신 잔을 마시는 것, 고난을 자처하고 고난 받는 이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할 수 없는 것이라 말씀하신 건, 종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이고, 고난의 시대에서 우리의 실천이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베대의 두 아들들이 우매해 보이긴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생각한 선행 과제들을 생략한 채 나온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이 구상했던 종말에 대한 규칙을 살펴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은 상식적 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는 종말이 실제로 올 것이라 믿고 종말을 준비했던 쿰란 공동체의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회중 규칙서>라는 책으로 교육 받았습니다. 이 책에는 종말이 왔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행동에 대한 규칙과 정책, 질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신체적-정신적-종교적 능력에 따라 계급이 정해집니다. 이를 기준으로 현세에서부터 봉사의 역할이 저마다 달리 주어졌습니다. 이런 계급적인 구도는 종말 이후의 잔치 자리에 대한 규칙에서도 드러납니다. 잔치의 자리에 최고 제사장이 먼저 입장해서 앉습니다. 그 뒤로 하급 제사장이 입장해서 각 능력과 영광에 맞게 최고 제사장 근처에 앉습니다. 마지막으로 평신도가 입장해서 앉습니다. 음식 섭취도 동일하게 계급 순서대로 진행됩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종말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죽임 당했던 모든 의인들을 살려내고 고통 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급진적인 평등과 해방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동시에 당시 사회의 서열 구도를 답습하여 종말 이후의 질서를 정하려는 상식 또한 존재했습니다. 이 불편한 긴장 관계가 이들의 종말 신앙에 공존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종말 시나리오, 세상의 상식을 거부합니다. 종말의 때에 규칙과 질서를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을 야고보와 요한에게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시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받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잔은 당시에 수치와 징벌을 상징했습니다. 물론 시편에서는 삶의 몫과 구원에 대한 은유로도 사용됩니다(23:5, 116:13). 하지만 예수님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맞닿아 있는 예언서에서는 잔을 징벌받아 마땅한 권력자에게 내리는 환난, 징벌의 의미로 사용합니다(51:17, 22; 25:15-18, 27-28). 그렇다면 이 잔은 예수님과 무관해 보입니다. 또 그의 제자들, 이스라엘의 백성들과도 무관합니다. 그것은 벌 받아 마땅한 권력자들과 악인들이 받아야 할 죄값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잔을 마십니다. 여기에는 잔에 대한 감춰진 의미가 있습니다. 예레미아서 4912절을 보면 이 잔은 권력자나 악인이 아니더라도, 이들이 초래한 이 환난에 어떠한 책임이 없는 무고한 사람들도 꼼짝없이 마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이 잔은 단순히 수치와 징벌의 상징, 이 환난을 초래한 권력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징벌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횡포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 마저 그 숙명에 휩싸여 있다는 시대 진단입니다. 그래서 이 잔을 마신다는 건 이 환난의 시대를 인지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에 연대하고 동참해야 한다는 역설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시대의 부조리, 모순이라는 이해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우리의 책무로 이해했습니다. 혹자들이 보기에 이것은 비약이었으나, 예수님에게는 종말을 위한 도약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14:36)라고 간청했을 만큼 대단히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고난을 자처합니다. 세상의 환난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자까지 연루되어있는 이 고난에 예수님은 자신이 그러했듯 제자들에게 잔을 마시면서 고난에 동참하고 세례를 통해 결단할 것을 요청합니다. 종말을 논하기 전에 더 중요한 게 있다고 강조하시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현실을 더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우리 모두가 처한 이 시대의 고난이 더욱 가중되어 있는 계층을 밝혀 냅니다. 이들은 42절에 등장한 백성들입니다. 백성들은 이방 사람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고관들에게 이중으로 억압당합니다. 여기에는 고난의 층위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환난에 어떠한 책임도 없어서 더 억울합니다. 예수님이 고난에 동참하고 연대한 사람들, 함께 을 마신 이들이 바로 이 백성들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동참하고 연대해야 하는 고난의 자리를 구체적으로 가리킵니다.

더 구체적인 건, 이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연대하는 방식입니다. 바로 섬김입니다. 예수님은 이중으로 억압당하는 무고한 이들을 섬기라고, 더 나아가 이들의 종이 되라고까지 말합니다. 예수님 자신부터 그러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것 역시 당시 메시아에 대한 신앙과는 반대되는 역설적인 언사입니다. 당시 상식으로는 메시아에게 섬겨야 하는 책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섬김을 자처합니다. 심지어 목숨을 내어주는 것도 자처합니다. 45절의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는 개역개정 성서에서는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대속은 이미 정립된 교리로 설명하기보다 예수님이 이 대목에서 강조한 처절한 연대 의식에 더 주목해서 이해해 보자면 권력이 초래한 환난, 이들의 이해관계와 이익 그리고 이미 정해져 놓은 규범에 의해 목숨 잃은 무고한 이들의 죽음에 자기 목숨을 내어 줄 만큼 부끄러워 하는 것, 그것을 섬김을 통해서 종말의 때에 이들을 다시 만나자는 종말론적인 연대 의식입니다.

오늘 읽은 히브리서 본문 말씀은 이 내용을 더 직설적으로 부연합니다. ‘예수님이 연약한 이 중 하나였다’, ‘예수님에게도 환난의 굴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드려야 하는 속죄의 제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이 모든 이들을 구원하는 구원의 근원이 됐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종말 신앙이고, 오른쪽과 왼쪽의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없이 낮은 자리에 들어가서 가장 낮은 이들과 함께 하자는 결단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당시의 종말에 대한 상식을 전복시킵니다. 그리고 종말의 시대에 질서와 체제를 구상하는 것보다 예수님이 마신 잔을 기꺼이 마시는 것, 권력이 초래한 환난 속에서 고난을 자처하여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섬김, 즉 종말론적인 연대를 요청합니다.

 

3. 섬김의 증인되기

 

더 이상 9월이 가을이 아닌 시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요청을 듣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 가리고 있는 빈틈을 찾아 그 속에서 고난의 층위를 발견하고 고난 받는 이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이들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때의 질서를 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섬김이라 했듯이, 섬김 이전에 해야 할 것은 우리 시대의 고난은 무엇인가, 이 고난이 더욱 가중되어 있는 이들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직시해야 합니다.

최근 인상 깊게 읽은 소논문에서는 빈곤층이 더 덥고 춥다는 주장을 합니다. 실제로 한 취재 결과 어느 여름에 열화상 카메라로 비춰보니 신축 아파트보다 쪽방촌이 섭씨 30도 정도 더 높게 측정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거주하는 공간은 보온과 보냉이 열악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헤쳐나갈 난방과 냉방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에너지 소비량이 낮으니 개인당 탄소배출량도 매우 낮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시장 활성화의 명분으로 공장에 탄소배출권을 무상으로 할당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그것을 팔아 차액을 챙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예상치 못한 폭우가 내릴 때, 누군가는 지하주차장에 자동차가 침수될 것을 걱정합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폭포를 뚫고 반지하에서 탈출합니다. 지금 우리가 9월이 더 이상 가을이 아님을 한탄할 때 지구 남반구에 있는 이들은 가능한 바다와 먼 곳으로 터전을 옮길 채비를 서둘러 합니다.

모두가 힘든 기후위기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향해야 할 건 여기에도 빈곤층이 더욱 고통받는 고난의 층위가 있다는 현실입니다. 가난과 더위, 추위, 그것을 숨길 수 없이 들킬 수 밖에 없는 사회의 감수성이 고난을 유지하고 가중시키는 환난의 굴래가 분명 이 사회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길 바랍니다. 섬김의 증인이 되어 고난이 빈곤층에 가중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 무고한 사람들과 함께 잔을 마시길 바랍니다.

저마다의 삶에서 실천할 때 우리는 증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고한 이들의 죽음에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까지 자처한 예수님의 증인이 됐습니다. 우리도 기후위기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가중되고 있는 고난의 시대를 직시하고 그 잔을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마시는 섬김의 증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른쪽과 왼쪽 할 것 없는 둥그런 예수님의 식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파송사

평안하십시오.

섬김의 증인이 되어 고난 속에서 분투하는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성령의 바람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