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신앙은 신뢰와 용기, 사랑과 신의의 길이다. 그 신앙은 그리스도가 문을 여시고 초대를 하신 미래로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런 역동적 이해는 그리스도론의 특정 유형, 곧 그리스도를 모든 창조물 발전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급진적 개혁을 최초로 이뤄 낸 사람이 바오로 사도이다. 그는 유대교의 한 지류였던 초기 그리스도교를 주님께 속한 전 세계, 오이쿠메네(oikoumene)로 이식하여 탈바꿈시켰다. 나는 이것이 신앙의 역사에서 그리스도교가 이룬 급진적 공헌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보편적 소명에 방점을 둔 것이다. 바오로가 이해한 그리스도교는 그 이전에 극복할 수 없었던 종교와 문화간의 경계를 뛰어넘고(유대인인지, 그리스인, 곧 이방인인지 무관함), 사회계층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며(자유인인지, 로마 세계에서 권리 없는 '말하는 사물'인 노예인지 중요하지 않음), 명확히 정의된 젠더 역할(남성인지 여성인지)을 초월한다.
나는 이런 바오로의 보편주의를 역사 속에서 계속되는 교회의 사명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급진적 개방성을 늘 유지하고 널리 퍼뜨려야 한다. ~~ 그리스도교가 지금까지 수많은 형태가 초래한 위기를 극복하고, 문화적으로 크게 변화하는 이 시대의 도전에 고무적인 해답이 되고자 한다면, 지금까지의 정신적, 제도적 경계를 과감히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자기 초월 시대가 열렸다.
토마시 할리크/차윤석 옮김, <그리스도교의 오후>, (분도출판사, 2023. 4.2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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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자기 초월에서 반드시 이뤄내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자연과학과의 대화이고,
또 하나는 세계 종교와의 진지한 만남이다.
지금 우리는 고대나 중세에 살고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다.
믿음은 앎과 모름의 절묘한 결합 속에서 발생한다.
안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기에,
언제나 모름에 직면하게 됨으로 믿음이란 인간에게 절대로 없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앎을 끝까지 추구하려는 노력 없는 믿음은 너무나 쉽게 미신으로 추락하고 만다. 앎의 진지한 추구 없는 믿음은 오히려 해악이 된다.
모름을 포함하는 삶의 심연에서 구원의 한 줄기 뜻을 구하려는 모든 종교들의 지혜는 개별 종교의 신념이나 제도, 체계를 넘어서서 인류의 자산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경전들은 언제나 모든 이에게 열려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불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고, 불자들도 성경을 통해 부처님의 법을 깨달을 수 있다.
지구가 한 마을이 되고, 우주의 비밀들이 조금씩 밝혀지는 이 때에,
그 옛날의 작은 것 하나만을 붙들고 거기에 매달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더 파고 들고, 더 자신을 여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 향린 목회 8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