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구(列禦寇)가 백혼무인(伯昏無人)에게 활솜씨를 자랑했다. 활시위를 힘껏 당겼는데도 그 자세가 반듯해 물 잔을 팔꿈치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그런 자세로 활을 잇따라 쏘자 화살이 과녁의 한복판에 거듭 적중했다. 연이어 쏜 화살이 마치 시간 차 없이 나란히 날아가는 듯했다. 이 때 그의 모습은 마치 본 떠 만든 인형 같았다.
백혼무인이 말했다. “이는 활쏘기를 의식한 통속적인 활쏘기일 뿐 활쏘기를 초월한 활쏘기는 아니다. 시험 삼아 나와 함께 높은 산에 오른 후 과연 위태로운 벼랑을 밟고 서서 백 길 밑의 깊은 연못을 내려다보며 활을 쏠 수 있겠는가?”
열어구가 승낙하자 백혼무인이 마침내 그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른 뒤 위태로운 바위를 밟고 서서 백 길 밑의 깊은 연못을 내려다 보았다. 이어 못을 등지고 뒷걸음질 쳐 발의 3분의 2를 바위 밖 공중으로 내민 채 읍한 뒤 열어구에게 앞으로 나와 그같이 하도록 했다. 열어구가 땅 위에 엎드린 채 엉금엉금 기어갔다. 식은땀이 비오듯 흘러내려 발꿈치까지 적셨다.
백혼무인이 말했다. “무릇 지인(至人)은 위로 푸른 하늘(靑天)을 엿보고, 아래로 황천(黃泉) 속에 잠긴다. 우주의 사방팔방 끝까지 자유로이 날아다니면서 신기(神氣)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지금 너는 벌벌 떨며 눈을 질끈 감을 정도로 두려워하는 마음뿐이로구나"
列禦寇爲伯昏无人射, 引之盈貫, 措杯水其肘上, 發之, 適矢復沓, 方矢復寓. 當是時, 猶象人也.
伯昏无人曰.. 「是射之射, 非不射之射也. 嘗與汝登高山, 履危石, 臨百仞之淵, 若能射乎?」
於是无人遂登高山, 履危石, 臨百仞之淵, 背逡巡, 足二分垂在外, 揖禦寇而進之. 禦寇伏地, 汗流至踵.
伯昏无人曰.. 「夫至人者, 上窺靑天, 下潛黃泉, 揮斥八極,神氣不變. 今汝怵然有恂目之志, 爾於中也殆矣夫!」
<莊子>, 田子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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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상상력이란 정말로 대단하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정말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높은 산 위태롭게 자리한 바위 끝에서 무공을 펼치는 "백혼무인"
그의 이름 자체가 심상치 않다. 저녁 어스름의 신선인가?
평지에서 활 쏘기를 자랑하던 열어구!
벼랑 끝에서는 활은 커녕 엉금엉금 기어가며 온 몸에 식은 땀을 흘려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가 사람을 만들어 주는 줄 모르고
제가 잘난 줄 안다.
하늘의 크신 은총을 모르고
제 능력으로 사는 줄 아는 것이다.
백혼무인은 열어구의 활쏘기가 활쏘기의 활쏘기만을 아는 것일 뿐,
활과 자신이 일체가 되어 활을 쏘는 줄도 모르면서 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철저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면서도 하는 줄 모르는, 존재하면서도 없는 듯한
그래서 하고 나서 금방 잊어버리고, 알면서 모른체 하고, 공을 세우고도 전혀 자랑 없는
그런 경지에는 언제 도달하려나!
- 향린 목회 12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