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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신을 사랑할 때 과연

by phobbi posted Dec 18, 2024 Views 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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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11-29

2024. 11. 29.

 

마치 딱 한 가지뿐인 것처럼 단수로서의 종교개념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개념은 한 범주 안에 그것의 모든 속성을 적합하게 배열하기에는 종잡기 힘들 만큼 다가적(多價的)이고, 포괄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나치게 다양성을 띤다. 유일신적이건 다신론적이건 서방 종교, 동방 종교, 고대 종교, 현대 종교, 그리고 심지어는 약간은 무신론적 종교조차 존재한다.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너무 많은 언어로 되어 있어 그것들을 배우고, 나아가 그것들에 정통하기란 불가능하다. 필자는 불평을 늘어놓거나 변명하려는 게 아니다. 참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종교의 다양성 자체가 종교적 사실이고, 종교 개념의 불포화성을 지시해 준다. 논지를 개시하려 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지점에선가 시작을 해야 한다. 나는 절대적 출발점을 제시하며 시작하지도, 그것을 지향할 마음도 없다. 다만 무언가를 드러내 놓으려는 취지를 갖고 있다.

 

이에 나는 종교 개념을 단순하고 무한하며 구식풍의 것으로, 즉 신에 대한 사랑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신의 사랑이란 표현은 약간의 추가 설명을 필요로 한다. ~~ 그래서 우리가 자문할 질문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독백했던 내용, “내가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신이시여,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이다. ~~

 

만약 당신이 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무슨 쓸모가 있는가? 당신은 지나치게 비속한 자기애나 자아 중심에 사로잡혀 하등의 가치도 지니지 못하게 된다. 당신의 영혼은 기껏 다우존스 주가 평균이 곤두박질해야 쓰라림을 겪는다. 새로운 세금안이 부결될 전망이 나올 경우에야 당신의 심장은 뛴다. 악마가 당신을 사로잡는다. 악마는 이미 당신을 점하고 있다. 종교는 사랑하는 자, 열정을 지닌 자, 이윤을 취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에 정열을 지닌 실제적 인물, 무언가를 미친 사람처럼 희구하는 자, 이해를 초월한 사랑으로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한 유명한 사도에 따르면(<고린도전서> 13:13)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 중 제일은 사랑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그것이 그들의 문제이며, 나의 질문이다.

 

D. 카푸토/최생열 옮김, <종교에 대하여> (동문선, 2003. 7. 20.)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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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대하여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거의 모든 종교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럼에도 실재하는 모든 제도 종교와 종교적 현상을 포괄적으로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존재 또는 사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는 것이다.

초월적 경험이다.

폴 틸리히의 말로 번역하면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다.

 

존 카푸토는 이것을 간단하게 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질문한다.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사랑 없는 사람이야말로 비종교적 인간(요일 4:8)인데,

이 세상에 사랑 없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종교적 인간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한다고 할 때 과연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내가 사랑하는 것이 궁극적인 것인가? 아니면 하찮은 것인가?

그리고 우주의 창조주이자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하찮은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질문은 그래서 오늘날도 빛난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내가 사랑하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 향린 목회 26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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