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댈 언덕 ㅣ 한문덕 ㅣ 2024-12-22

by phobbi posted Dec 22, 2024 Views 1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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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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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댈 언덕

 

(19:1-2, 9-18, 고전 12:27-13:3, 15:11-24)

 

대림절 넷째주일

한문덕 목사

 

 

 

[50점도 안 되는 설교와 하나님 말씀의 깊이]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나누어 교인들이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말씀은 인간이 처한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게 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설교가 청중에게 삶의 의미를 주고, 생의 활력을 돋게 하려면 목사는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삶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합니다. 청중과 소통하는 설교가 되어야 하나님 말씀이 허공의 메아리가 되지 않고 교인의 삶에 안착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부임한 지 50일쯤 되어 가는데, 아직 우리 교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기에, 제가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한다고 해도 사실 50점을 넘기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나름 꼼꼼히 설교를 준비한다고 해도, 여러분들의 귀에 어떻게 들릴지는 또 전혀 다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마음속을 꿰뚫어 그 사람의 생각과 뜻을 살핍니다.(4:12) 그러니 제 설교보다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 본문들 그 자체에서 감동과 깨달음이 있기를 빕니다.

   지난 4주간 설교에서는 우리 교회 목회와 선교의 토대가 되는 창립 정신과 초기 그리스도인들 신앙의 근원을 담고 있는 네 복음서를 함께 연결 지어 보았습니다. 높은 산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듯이, 복음서 전체를 총체적으로 살폈기 때문에, 내용도 길고 듣는 여러분들이 다소 어렵다고 느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인쇄된 향린강단이나 홈페이지에 올려진 설교 원고를 한 번 더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큰 그림을 그렸으니, 오늘부터는 미시적으로 말씀을 살피려고 합니다.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우리의 마음을 다잡고 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뿌리가 깊어야 세찬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기에, 오늘은 교회 탄생부터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이 체험해 왔고, 또 깨달아야 할 신앙의 뿌리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서 살필 말씀은 누가복음서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2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넓고 깊은 영감을 주었고, 여러분들도 이미 잘 아시는 비유입니다.

 

[탕자 이야기]

 

   이 비유의 제목은 흔히 돌아온 탕자로 우리에게 알려져 왔습니다. 제목을 이렇게 단 것은 작은아들을 주인공으로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큰아들도 등장하고, 또 아버지도 등장합니다. 비유의 처음을 보면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맨 마지막은 아버지가 큰아들을 타이르는 말로 끝이 납니다. 이 비유의 구조는 아버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아버지의 말로 끝이 납니다. 또 이 비유 앞에 나오는 잃은 양과 잃은 동전의 비유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비유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두 비유 모두 양과 동전을 잃었다가 다시 찾아 기뻐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비유의 제목을 탕자 이야기돌아온 아들로 달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주인공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이지요.

   이제 성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제게도 두 아들이 있는데요. 같은 부모로부터 나왔어도 두 아이가 저마다 개성이 있고, 서로 정말 다릅니다. 이 사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그러자 아버지는 어떤 주저함도 없이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눠 줍니다. 우리는 평소 성서를 읽으면서 이 부분을 자연스럽게 넘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라면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은 이 장면부터 술렁거리기 시작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202412월 서울 광화문에서 이 말씀을 읽지만, 이 비유는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유대 땅에서 들려진 이야기입니다. 시간도 다르고 공간도 다릅니다. 당연히 문화도 다릅니다. 우리는 눈으로 성서를 읽지만, 그때 그 사람들은 귀로 예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마치 내가 유대 사람이고 지금 내 앞에서 예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나에게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면 나는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 말씀이 내게 더욱 깊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군중들이 술렁거립니다. 왜일까요? 우선 아버지가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유산을 달라고 하는 작은아들의 모습이 매우 불경스럽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건강하실 때, 하늘의 수명이 다하지도 않은 때에, 재산을 분배해 달라고 하는 요구는 마치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당시 재산의 분배는 마땅히 아버지의 임종 때에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집회서라는 경전에 보면 이런 충고가 있습니다(33:19-23).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들이나, 처나, 혹은 형제들이나 친구에게 네 자신의 권한이나 혹은 네 자신의 재산을 양도하지 말라. 한번 양도하면 차후에 네 마음을 바꾸어 다시 요구한다 해도 소용이 없게 된다. 네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에는, 네게 아직 숨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네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하라. 네가 네 자식들의 손을 바라기보다 오히려 그들이 너를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네 임의로 할 수 있게 하고, 네 명예에 오점을 남기지 않도록 하라. 마침내 네 생명을 다하는 마지막 날이 이르렀을 때, 네 임종의 시간에 이르러 네 재산을 분배하라.”

 

   만약에 두 아들이 모두 미혼이었다면 아마도 10대 후반의 나이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 남자들은 18세에서 20세 사이에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10대 후반의 이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 무례한 요구를 하여 아버지 재산을 나눠 받고, 또 그것을 며칠 만에 다 처분하여서 먼 지방으로 떠나갑니다.

   이것 또한 문제입니다. 아버지에게 재산을 물려받았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그 재산을 처분하지 않는 것이 당시 관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은 대를 이어 물려주어야 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자신의 정원으로 만들고 싶어서 나봇과 협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더 좋은 포도원을 주겠다.” “돈으로 충분히 보상하겠다.”라고 하면서 나봇을 설득하지요. 그러나 나봇은 조상의 유산을 임금님께 드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이라면서 왕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합니다. 그런데 이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받은 재산을 처분해 버립니다. 그것도 단숨에 처분합니다. 유산으로 받은 땅을 며칠 만에 팔았다면 아마도 헐값에 넘겼을 것입니다. 작은아들은 받은 유산을 후딱 처분하고 아버지의 영향력이 없는 먼 곳으로 떠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호기롭게 떠난 작은아들은 자기만의 삶을 잘 살아내지 못합니다. 작은아들은 허랑방탕하였고, 재산을 낭비하고 다 없앤 후에 가난과 극심한 굶주림 끝에 이방 사람의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얻어먹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의 주변 국가에는 약 4백만에 가까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유대인 여행자나 이민자가 올 경우에 도울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이런 힘든 기근과 굶주림의 상황에서 같은 동족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먼 이방 땅에서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행세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지요.

   또한 그는 하나님 백성인 유대인으로서 지켜야 할 율법도 따르지 않습니다. 율법에 금지되어 있는 돼지 치는 일을 한 것이나,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다.”는 고백을 통해서 이 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하늘에게도 죄를 지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가 자기 민족 종교도 버리고, 하나님과도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방인에게 인정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 쥐엄 열매 하나 주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함으로써 아버지를 봉양할 자식의 의무를 저버리고, 이방인의 종이 되어 같은 동족에게 모욕감을 주었으며, 율법이 금한 돼지를 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까지도 포기하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는 청중들은 작은아들에 대해 엄청 욕을 해댔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살림을 나눠준 아버지의 어리석음을 탓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작은아들은 경제적, 윤리적, 종교적 파산 상태가 되어서야 자기 죄를 뉘우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17-19)

 

[돌아오는 아들과 맞이하는 아버지]

 

   작은아들의 이 말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품성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그 많은 품꾼에게도 먹을 것이 남아돌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품꾼은 종이나 하인이 아닙니다. 종이나 하인은 가족구성원입니다. 그런데 품꾼은 그저 일이 있을 때 하루 와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입니다. 일용직 노동자는 당시의 최하층민으로 노동의 품삯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대접도 못 받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그 품꾼들에게 충분한 음식을 제공하였고, 또 그들을 잘 대해 주었던 것입니다. 작은아들은 이제야 자신의 아버지가 어떠한 분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20절부터는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아들을 맞는 아버지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 또한 당대 유대인들에게 충격을 줍니다. 작은아들이 먼 거리에 있는데도 아버지는 그를 보고 달려 갑니다. 아버지가 매일 그를 기다린 것입니다. 또한 고대 근동 문화에서 성인 남자가 달리는 것은 위신을 떨어뜨리는 행동이었습니다. 수치스러운 일이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먼 거리에 있는데도 보였다는 것은 아들이 집에 가까이 온 시간이 낮이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아버지는 대낮에 먼 거리를 뛰어갑니다. 분명 동네 시장이나 마을 한복판을 지나쳤을 것입니다. 주인이 갑자기 뛰어가니 그의 종들은 영문도 모른체 함께 뛰어갔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장면들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대낮에 성인 남자들이 마을 한복판을 뛰어다니는 소동이 일어난 것이고,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작은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뛰어나간 것은 작은아들이 너무나 보고 싶어서였기도 했겠지만, 어쩌면 패륜아 같은 작은아들을 동네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명예가 매우 중요했고, 씨족 사회에서 명예를 더럽힌 자들은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 종종 책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달려간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죄를 다 고백하기도 전에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작은아들은 먼 지방으로 떠났었습니다. 갈 때는 풍족하였지만 돌아올 때는 완전히 거지 신세였습니다. 그 먼 거리를 왔으니, 몸도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냄새나고, 추한 몰골을 하고, 자기에게 심한 모욕을 주었던 그 아들을, 지금 아버지는 껴안고 입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품꾼이 될 것을 다짐하고 왔지만,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기게 합니다. 이 모든 행동은 아들의 신분이 회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고대에 의복은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권위를 상징하는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게 한 것은 종을 다스릴 수 있는 주인의 권위가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모든 행동의 마지막에 소를 잡아 잔치를 베푸는데 그것도 살진 송아지입니다. 송아지는 귀한 곡식을 먹었을 때 살찌게 됩니다. 기근이 심했던 중동에서 이런 살진 송아지는 혼인 잔치 같은 평생에 한 번 정도 있는 날에나 쓰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것으로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고 즐길 수 있었기에, 아버지는 가족뿐만 아니라 동네 모든 사람을 불러서 잔치를 연 것이지요. 동네 사람들 모두에게 작은아들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이고, 동네 사람들도 작은아들을 용서해 줄 것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일관된 사랑과 큰아들의 모습]

 

   작은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고대 근동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아버지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버지를 모욕하고, 방탕하게 지내면서 민족과 종교를 배신한 작은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매우 불쾌하고 아마도 큰 모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후레자식에게는 그에 합당한 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는 최소한 그의 뺨이라도 때리고, 아니면 동네 공터에서 마을 사람들을 불러놓고 작은아들을 공식적으로 혼내며 훈계했어야 합니다. 아비를 모욕한 정도에 따라서 투석형을 받아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으로, 아무런 대가 없이,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그저 작은아들을 받아줍니다.

   25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제 큰아들입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떠나갔지만, 큰아들은 평생을 아버지의 곁에 살면서 아버지를 봉양합니다. 그가 밭으로부터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성실히 가업을 이어갔는지 보여줍니다. 작은아들이 재산 분배를 요청해서 그 덕에 큰아들도 일찍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둘째와 달리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 재산의 소유권이나 관할권이 전적으로 아버지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아버지를 위하여 종들을 거느리고 밭에서 열심히 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지금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이런 큰아들의 행위는 잔치 분위기를 순식간에 망쳐놓게 됩니다. 아버지가 베푼 잔치 자리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행동은 아버지를 거부하고, 자기 동생을 거부하고, 거기에 초대된 모든 마을 사람을 거부하는 행위가 됩니다. 이제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지만, 지금의 행동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아버지에게는 수치와 모욕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믿었던 맏아들마저 그렇게 행동하다니!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의 태도는 일관됩니다. 작은아들을 맞이한 것과 똑같이 큰아들을 달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갑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는 불효한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는 아들을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21:18-21) 그러나 이 아버지는 아버지의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큰아들에게도 나아갑니다.

   작은아들은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여 돌아온 것에 비해 큰아들은 지금 잔뜩 화가 나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29-30절의 원문을 보면, 아들의 말에서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작은아들은 스스로 아버지의 아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품꾼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찾아왔지만, 큰아들은 자신에게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 준 적이 없다고 하면서 스스로 부자 관계가 아니라 보상이 필수적으로 주어져야 하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 준 적이 없다는 말로 아버지를 인색한 사람으로 단정 짓습니다. 자기 동생에 대해서는 창녀들과 어울려 당신의 재산을 날려버린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돌아온 동생을 동생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동생을 받아들인 아버지를 책망하고 적대감을 표현합니다. 성경을 꼼꼼히 읽어보면 둘째가 재산은 낭비했지만, 그 어디에도 창녀들과 어울렸다는 말은 없습니다. 어쩌면 큰아들의 마음속에 있던 자기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큰아들은 지금 스스로 아버지와 동생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누가 탕자인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맨 처음 작은아들이 그런 무례한 요구를 하였을 때, 큰아들이 정말 좋은 형이었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효자였다면, 작은아들을 말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이 아들이 성숙한 아들이었다면 둘째를 잃었을 때의 아버지의 슬픈 마음을 헤아리고, 또 잃었다 찾은 아버지의 기쁨에도 함께 동참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큰아들 또한 자기 재산을 미리 갖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의 평판과 마을 사람들의 눈과 귀가 있었기에 그동안 참아왔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둘째 아들이 돌아와 신분을 회복하고 자기 재산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으니까 그동안 참았던 화를 몰아서 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잃었던 작은아들은 찾았지만, 오히려 큰아들을 잃을 위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버지라 부르지도 않는 큰아들에게 애야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얘야!”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부르는 말입니다. 즉 이 말은 어릴 때부터 맺어 왔던 부자간의 사랑이 변치 않았음을 확증해 줍니다. 비록 큰아들이 주종관계로 표현했다 하더라도 부자간에 따뜻한 사랑과 정은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부드럽게 설득합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왔다고 해서 큰아들에게 분배된 재산이 취소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그리고 함께 잔치에 참여할 것을 간곡히 부탁합니다.

   여기서 큰아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성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열린 결말이지요. 이제 선택은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 중 누가 자기와 비슷하다고 여겨지시나요? 여러분은 작은아들입니까? 아니면 큰아들입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 모두가 아버지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조건적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존경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오늘의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어떤 분에게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지요. 또 어떤 분에게 하나님은 멀게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다수 현대인에게 하나님은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 분이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의 스승이시고 주님이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은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은총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과 가르침의 밑바탕에는 바로 이런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딸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무조건적인 사랑의 은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희망을 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의 주시는 참된 평안과 안식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거나, 하나님의 아들딸 됨을 부인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그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에 토대를 놓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신학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삶의 연륜이 얼마 되지 않는 어린이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묻는 것들 중에 매우 중요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왜 내가 남에게 잘해 주어야 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가고, 어떤 사람들은 절에 가?” “나는 누굴까?” 이런 질문 중에 하나님과 연관된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맘 놓고 기댈 수 있는 곳은 어디에 있지?” 이 아이의 질문에 여러분은 무어라 답하겠습니까? 아니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야말로 우리가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마음 놓고 기댈 언덕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아빠라고 부르셨던 그 분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처럼 자기 자식을 무한 사랑으로 품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신앙의 뿌리에는 바로 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신앙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분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 땅으로 오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대림 절기를 보내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우리의 경전인 성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한마디에 성경의 모든 핵심이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인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고 좋다. 참 좋다.”라고 말씀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분은 흑암의 세계에 빛을 주셨고, 혼란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 질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창조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며, 그분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향린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신 그 분이 우리의 하나님임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자녀 된 우리 또한 아버지를 닮아 넉넉한 사랑과 품으로 믿음의 형제자매와 이웃을 대합시다. 속상한 일이 있더라도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좀 더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봅시다(6:36).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모두 다 네 것이 아니냐!”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펴시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구하십시오.

언제나 가장 좋은 길인 사랑을 택하십시오.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 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