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 신앙과 신학을 향하여

by phobbi posted Jan 09, 2025 Views 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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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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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 9.

 

그래서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공부를 매개로 모종의 신념에 이르는 게 아니라, 마음대로 믿음을 얻은 뒤에 그제야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 탓에 신학은, 애초 그 정당성(legitimacy)이 의심스러운 신념을 정당화(justification)하는 장치로서 동원되곤 한다. 이 때문에 믿지 않고는 사유(공부)할 수 없는 한국 신학의 독특한 풍경이 연출된다. 전술했듯이 성경을 읽고 그 문자적 진리를 납득/수용한 뒤에 예수(하나님)를 믿는 게 아니라, 먼저 (모든 믿음에 구성적 수행성 costitutive performativity’으로 개입하는 바로 그 맹목성에 의지해서) 믿어(버리고), 이후 그 믿음에 살을 붙이거나 혹은 그것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정당화하는 과정이 곧 신학하는 행위로 표현되는 셈이다. 나는 이 땅의 교회 안팎을 가파르게 행군하거나 노량(한가롭게 놀아가면서 느릿느릿하게)으로 바장이는(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자꾸 조금씩 머뭇거리다.) 중에 성경을 하나의 텍스트로 정밀하게 독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앙을 얻은 사람을 단 한 차례도 본 적이 없다. 내가 과문한 탓이기도 하겠으나, 한국의 개신교 세계에서 그 같은 신자의 수를 의미 있는 통계치로 기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겪은 흥미로운 경험은, 문자의 간접성이 아니라 마음(심리)의 직접성에 의해 신앙생활의 근원과 토대(fons et origo)를 얻은 한국의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신앙 없이 신학을 공부하던 몇몇 일본인 친구의 흥미로운 태도를 접한 것이었다.

 

어쨌든 우선 마음으로 감()한 것을 이후의 제도적 교회생활이나 설교적 보충을 통해 이론화·정당화하는 관행은 신앙이 실존적 반조의 선택을 생략한 채 생활의 습관으로 굳어지게 하는 중요한 배경이다. ‘믿기에 존재한다(Credo ergo sum)’이 아니라 사유·의심해서 존재한다(Cogito/Dubito ergo sum)’는 정신의 변침(變針)을 통해 근대적 주체화의 철학적 논리를 설명하곤 하는 데서 보듯이, 잘라 말하자면 그들의 경우에는 신앙의 주체()’에 이르는 노역이 없거나 적은 셈이다. 주체화의 중요한 한 갈래는, 타인과의 사회적 연루를 자기 존재의 구성적 원리로 수렴해야 한다는 이치에 적절하게 응대하는 것임과 동시에, (한나 아렌트 등의 지론처럼) ‘당대의 지배체제와 불화하는 정신의 수위와 그 근기를 통해 결절하는(확실히 정하다) 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스승인 예수야말로 당대의 지배구조와 불화하면서 카이사의 것도 아닌, 더 나아가 어머니(여자)에 속한 것도 아닌 (동무)공동체적 결기 속에서 운신하며 새로운 희망의 지평을 펼쳐 보인 바 있으니, 세속의 상식과 달리 실로 주체화의 노력이야말로 신앙의 알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김영민, <당신들의 기독교>(글항아리, 2012. 12. 31.)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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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인들의 아주 천박한 믿음의 현 실태를 정확하게 짚고 있다.

마음대로 믿음을 얻은 뒤에 그제야 신학을 공부한다는 지적은 적실(的實)하다.

신학의 동네에서 익히 많이 보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제대로 된 신학이 있는가를 물을 수 있다.

한국적 신학, ’주체적 신학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신학을 수입해서 소개하는 것이 전부인 양 생각하는 이들을 볼 때,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서 외국의 잣대를 들이밀며 떠드는 이들을 볼 때,

그러면서도 이 땅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는 이들을 볼 때,

속이 거북하다.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이라는 가르침을 되새기며, 우리는 모르면서도 모르는 줄 모르는 상태에 너무나 오랫동안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그런데 더 괴로운 것은 모르면서도 모르는 줄 모르는 내용이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더 넓게 깊게 차분히 공부해야 한다.

 

 

 

 

- 향린 목회 67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