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1. 26.
토마스 곧 열둘 가운데 하나로 쌍둥이라 불리는 제자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다른 제자들이 말했다. “우리가 주님을 보았네!” 그러자 토마스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그분의 두 손에서 못 박힌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박힌 자국에 넣어 보아야겠네.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아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믿지 않을 걸세.” 8일 뒤에 다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에 있었다.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들은 닫혀 있었는데, 예수님이 오신다. 그리고 한가운데 서서 말씀하셨다. “평화가 너희들에게 있기를!” 그런 뒤에 토마스에게 말씀하신다. “너의 손가락을 이리로 가져와라! 그리고 내 두 손을 보아라. 너의 손을 가져와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남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어라!” 요한복음서 20:24-27, 새 한글 성경
==========================
마르티노 성인에게 한번은 사탄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성인은 속지 않았다. 성인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의 상처가 어디에 있습니까?” (토마시 할리크/오민환 옮김, <상처 입은 신앙>(분도출판사, 2018. 7. 5.) 12.)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부활의 사실성을 두고 논쟁한다.
부활과 소생을 분별하지 못하고,
육체적 생물적 몸으로 다시 생명이 돌아왔는지를 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믿음이 있느니 없느니,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면서 정죄를 서슴지 않는다.
합리주의자였던 도마는 의심했다.
“내가 그분의 두 손에서 못 박힌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박힌 자국에 넣어 보아야겠네.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아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믿지 않을 걸세.”
그런데 그가 의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성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물과 피를 쏟기까지 지극했던 그 사랑의 지속성인가?
도마가 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못 자국 난 손과 피와 물을 다 쏟고 휑해진 옆구리였다.
그는 예수 사후에도 과연 땅에 묻힌 한 알의 씨알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인가가 궁금했다.
그는 두려워했고 의심이 들었다.
부활은 사랑이 계속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한 자기희생적 사랑 속에서,
그 사랑의 상처 속에서 우리는 매번 부활하는 예수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희망을 간직하고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토마스 할리크 신부는 말한다.
“예수는 모든 작은 이와 고통받는 이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모든 이, 세상과 인간의 온갖 고통은 ‘그리스도의 상처’다. 내가 오늘날 이 세상에도 여전히 가득한 그분의 상처를 만질 때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 ~~
분명히,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을 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메시아라고 여기지 않는다. 덧붙여 말하자면, 예수는 공생활 동안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메시아가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돌로 빵을 만드는’(마태 4:3 참조), 그야말로 혁명적인 마술로 사람을 홀리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 능력과 가능성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충실히 한다 하더라도, 우리 땅의 태반을 휩쓸어 버린 고통의 바다에서 굽이치는 파도에 맞서 우리는 겨우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세상의 상처에서 도망가거나 그 상처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어쨌든 우리는 그 상처를 보고 만져야 하고, 그 상처에 의해 우리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내가 상처에 무관심하고 냉담하고, 상처받지 않은 채로 있다면, 어떻게 신앙을 고백하고, 보지 않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요일 4:20 참조). 그렇다면 나는 하느님을 정말로 보지 못할 것이다.” 토마시 할리크/오민환 옮김, <상처 입은 신앙>(분도출판사, 2018. 7. 5.) 18-19.
- 향린 목회 84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