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1. 27.
인간으로서 우리의 철학적 정체성을 방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방법의 핵심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혹은 다른 어떤 것을 아는 것에서 벗어나 알게 하는 의식작동을 주목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기 발견의 이 여행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어떤 것의 실재도 아직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실재는 알아감의 매개적 작동을 통해서 또 그 작동 안에서 장차 알게 된다. 이것은 실재, 무한, 우주, 시간 또는 실재의 또 다른 기본 구성체를 아주 제한된 방식으로 알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알고자 하는 제한되지 않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모든 인간들은 이 역량을 현실화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완전한 의미에서 알지 못한다. 니체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불완전한’ 실재이다.
조지프 플래너건 지음/김재영·이숙희 옮김, <자기 앎의 탐구>(서광사, 2014. 5. 30.) 3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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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인가를 알아간다고 할 때,
과연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여기 연필이 있다.
나는 연필을 본다.
그리고 연필이 있다는 것을 안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연필’이라는 것도 확실치 않으며,
그것을 보는 ‘나’도 확실치 않으며,
어떻게 나는 연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생각하는지’도 사실 확실치 않다.
철학의 3대 영역 중 하나인 인식론(認識論)의 문제 하나만도
그것을 파고 들어가 보면 결론은 “정말로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인류는 무엇인가를 알아 왔고,
지금도 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평생 또 한 분의 스승으로 삼고 싶었던
버나드 로너간(Bernard Joseph Francis Lonergan, 1904. 12. 17. - 1984. 11. 26) 신부는
인식론 분야에서 객체(경험론)나 주체(이성론)가 아닌,
알아감의 과정 즉 의식작동에 주목하고,
알아감의 절차를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진정성 있는 사유의 매개 작동을 통해 실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실제적으로 유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추구하였는데, 누구든지 자신이 경험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의식의 특정 활동을 진지하게 반성적으로 행해간다면,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깨달을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인격으로 성숙할 수 있다고 믿었다.
종교는 이런 알아감의 과정을 진지하게 겪는 사람이 믿는 자, 선택하는 자, 사랑하는 자로 자신을 초월해 가면서 궁극적 가치로 나아가도록 작동하는 체계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종교인이 감각과 이해, 판단에서부터 너무나 많은 편견에 물들고 오해를 하고 있기에 실제로 종교의 영역에조차 제대로 들어서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아직 종교의 영역에 제대로 들어서지도 못한 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착각은 모르면서도 확실하게 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향린 목회 85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