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1. 30.
나는 나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 자신을 이렇게 부르는 나의 권리에 대하여 도전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여러 신조들 중에서 어떤 신조를 기독교인이면 반드시 지녀야 한다고 요구하는 데 나는 그것을 찬성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나 자신의 양심이 지니고 있는 기준을 포함한 여러 도덕적 기준 중에서 어떤 특정한 기준에 따라 살 것을 다른 사람들이 내게 요청하는데 내가 그 기준에 동조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나를 기독교인라고 부른다. 그 까닭은, 비록 내가 시간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삶과, 나 자신과, 나와 같은 다른 인간들과, 우리의 운명에 대한 나의 사유 방식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역사 속에 임재했다는 사실에 의해서 수식되어 있어 나는 그분의 영향력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없음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그러한 사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나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이해하는 한, 나의 신과의 관계가 나 개인의 역사와 우리 모두의 역사 속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임재에 의하여 깊이 좌우되었다고 하는 사실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내가 나 자신을 20세기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과 똑같은 식으로 나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되리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나의 운명의 일부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회교도나 유대교도가 된 것이 그 사람의 운명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대단히 많은 인류가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교인이 되고 있다.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서 유대교나 회교조차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 사이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사실 그것 자체보다도 이 운명적인 사실을 내가 받아들였고, 또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그 원인(cause)이라고 이해하는 것과 나 자신의 목적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고 하는 데에 더 큰 까닭이 있다. ~~ 많은 다른 기독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나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는 신을 인간에게 오게 하고, 인간을 신에게 다가가게 하며, 아울러 인간이 서로, 그리고 자기들의 세계와 화해하도록 하는 이 목표를 위하여 살았고, 돌아갔고, 다시 산 분이다. 나는 이 우정을 이룩하는 일이 인간의 실존이 지니고 있는 관건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그의 운명-와 그 자신-즉, 그의 사명-을 통하여 이 같은 사실이 내게 분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분 안에서 나 자신은 나 자신의 화해에 대한 전망을 보기 때문이고,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목표를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도록 하라는 도전을 그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
리차드 H. 니버 지음/정진홍 옮김, <책임적 자아> (2012. 3. 20.) 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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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리스도인은 시시때때로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무엇으로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리매김하는가?”
니버는 몇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동시에 벗어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인가?
둘째 초월적 실재인 신과 세계의 관계 속에서 예수가 우리들 자신 개인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초월적 실재를 드러내고 보여준다고 믿는가?
셋째 예수가 내 삶의 운명이며, 내 삶의 목적인가?
넷째 내 실존은 예수와의 우정을 통해 신과의 화해를 이룩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믿는가?
나도 최소한 니버의 질문에 “아멘”이라고 답할 수 있기에 여전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끊임없이 예수가 던진 질문과 자기 삶에 대한 고민에 동참하고, 그의 이상과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가 걸었던 길을 나 또한 가려고 애쓴다는 의미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미루어 아마도 내 인생이 끝날 때까지도 예수는 내게 끊임없이 매력을 줄 것이 분명하다.
그는 닫혀 있지 않고, 영원 무한한 신에게 열려있는 문이기 때문이다.
- 향린 목회 88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