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2. 18.
그중 교회는 어떠한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볼 줄 모르는 교회 지도자들, 정치·경제의 제도적 모순과 상관이 없는 관념론적 신학, 기업과 경영능력으로 변질된 교회 확장, 반공의 보루 속에 숨어 잠든 교회, 모든 사회적 불의를 알고 있으면서도 조직 교회의 존속을 염려하여 말못하는 교권,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실정인 것 같다. 이러한 현실에서 하느님의 선교에 부름을 받고 나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나는 여러분에게 제사장직을 저버리고 예언자직을 수행하라고 하는, 잘못된 신학적 판단으로 권면한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증인의 족보는 사제가 아닌 예언자들만의 족보는 아니다. 내가 말하는 증인의 족보는 사제가 아닌 예언자들만의 족보는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선교에서 사제직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것은 지배계층, 부유계층의 횡포를 축복하고 눌린 자들의 자기 생존을 위한 항거를 마취시키고 거세하는 사제직이 아니고, 진정으로 저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비굴해진 저들의 주체성을 되찾는 데 함께하고, 저들의 역사적 갈망에 호응하고, 저들의 가슴속에 쌓이고 쌓인 한을 풀어 주고 위로하는 ‘한(恨)의 사제’가 될 것을 권한다.
땅에서부터 하늘에 호소하는 아벨의 피 소리(창세기 4:10)를 대변하고, 여리고 길에서 강도 만나 빼앗기고 얻어맞는 이웃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 아픈 상처를 싸매주고(누가 10:25), 일꾼들에게 지불되지 아니한 품삯이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리도록 외치는 소리(야고보 5:4) - 이 ‘소리의 내력’을 밝히는 ‘한의 사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벙어리와 고독한 자의 소리 없는 소리를위하여 입을 열고, 학대받는 자, 가난한 자들의 한을 풀어 주자”(잠언 31:8)는 것이다.
전통적인 신학, 서구에서 이식해 온 교회가 죄와 회개를 강요하고 스스로를 속죄의 매체로 자처하는 사제직을 말하고 있는 데 대해서 이 땅에서 ‘하느님의 선교’에 종사하는 일꾼들은 민중의 한을 풀어 주는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죄와 회개는 역사상 지배계층이 피지배 계층을 누르는 이데올로기의 구실을 해 온 것도 사실이고, 민중의 한은 복수의 악순환을 거듭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잘못된 굴절을 우리는 항상 다시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죄와 회개는 개인도덕에 결부되어 온 데 대해서, 민중의 한은 사회정의에 결부시켜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집단체의 죄의식이나 회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한이란 눌린 자, 약한 자가 불의를 당하고 그 권리가 짓밟혀서 참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할 때, 그 호소를 들어주는 자도, 풀어 주겠다는 자도 없는 경우에 생기는 감정 상태이다. 그렇기에 한은 하늘에 호소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의 무고(無告)의 민중의 소리 바로 그것이다. 한의 사제는 이러한 민중의 갈망을 듣고 전달하는 매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황야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울음소리이다. 저들은 구원의 손길을 찾고 있다.
서남동 지음/죽재서남동기념사업회 엮음, <민중신학의 탐구>(개정증보판, 동연, 2018. 7. 20.) 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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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용서를 말하기 전에 언제나 먼저 피해자의 한을 풀어 주는 일을 해야 한다.
민중의 한이 복수의 악순환을 거듭해서도 안 된다.
예언자의 목소리를 자처하며 정죄를 일삼아서도 안 되고,
사제의 역할을 한다는 구실로 하나님을 독점하듯 굴어서도 안 된다.
소리의 내력을 밝히는 한의 사제!
민중의 한을 들으시는 주님을 향해,
바람이 피리를 울리듯,
민중의 소리가 내 몸을 통해 하나님께 들려져야 할 것이다.
- 향린 목회 107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