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환대의 교회 공동체 | 임보라 | 2018-10-07

by 이성환 posted Oct 12, 2018 Views 282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18-10-0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해방과 환대의 교회 공동체(욥기 2:1-5, 히브리서 2:11-18,  마가복음 10:13-16)

2018.10.30. 창조절 일곱째 주일 / 세계성만찬기념주일 향린공동체 연합예배

 

 

안식월 마친 후 첫 하늘뜻펴기 입니다. 지난 9월 한달, 섬돌향린 교우들의 배려로 처음으로 안식월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세계성만찬기념주일 향린공동체연합예배가 오랜 세월 지속되어 왔음에도 오늘이 이 자리에서 하늘뜻펴기를 처음 하는 것 입니다. 결론은 웬지 떨린다 입니다.

 

안식월 동안 전혀 다른 교회를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도 한켠 있었지만, 결국 제가 선택한 교회는 한백교회, 들꽃향린교회, 광주무등교회, 강남향린교회였습니다. 강남향린교회에서는 주일예배를 두번 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총 5회의 예배 중 세번을 김경호 목사님이 펴시는 하늘뜻을 들었습니다. 제 목회의 처음은 1993년 김경호 목사님으로부터 배웠는데 그때로 돌아가는 느낌도 들고, 목회의 기초를 복습하는 시간을 갖으라는 하늘의 뜻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강남향린교회 강제철거에 대한 협의가 마무리되고, 인근 지역 조합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우리는 모두가 안전하게 이전할 때까지 남아있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켰고 이루었다 라는 소회가 가슴 뭉클했던 예배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강남향린교회 여러분께 큰 박수 보냅니다.  

 

향린공동체에 속한 각 교회들은 현재 매우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강남향린교회는 긴 투쟁과정을 통해 더욱 단단해졌고, 새로이 도약하는 시기에 초대 담임목사를 모시기로 결정하고 새 출발을 하게 됩니다. 들꽃향린교회는 청빙위원회를 구성하여 새로운 담임목사 청빙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향린공동체는 요 몇 년 사이 담임목회자 중 3/4를 교체한 셈입니다. 향린교회는 독재타도와 민주화투쟁역사가 담겨 있는 현재의 터전을 매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저희 섬돌향린교회는 5개 교단으로부터 이단 지정이 되어 10단 교회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은 우리 향린공동체 교회들만이 아닙니다. 한겨레가 가짜뉴스 근원지에 대해 집중 보도해 준 덕에 극우근본주의 기독교의 세력화를 멈출 수 있는 날이 곧 이르렀음을 체감합니다. 이런 농간에 휘둘려온 한국교회 역시 적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 상징적으로 명성교회의 세습과 비자금 조성 사건 등을 통해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퇴출될 수 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있습니다.

 

한반도의 지형은 어떻습니까?

 

변화의 속도를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있을 홍근수목사님 5주기 추모행사의 제목을 “목사님, 드디어 그날이 왔어요”로 붙이셨던데 가슴 뭉클 했습니다.

 

오고야 말리라 알고는 있었지만, 언제쯤? 이라는 물음표가 산만큼 쌓여있었는데 남북의 정상들이 회담을 진행하고, 후속 조치들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KTX 해고 노동자들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복직 협약 소식도 들렸옵니다. 누군가 이렇게 9년, 10년을 싸우는 거라고 했으면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가슴 아픈 말을 했습니다. 너무도 오랜 세월 지난하게 싸워야 했던 이들의 눈물과 땀방울이 알알이 빛나지만 온몸에 오롯하게 새겼을 온갖 고통의 흔적들에 새살 돋기까지 얼마나 또 시간이 지나야 할까 마음이 저며 옵니다. 이렇듯 기쁜 소식이 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아니 언제쯤에야 타결될지 가슴이 타들어가는 노동의 현실은 여전하고, 성소수자, 난민, 여성에 대한 혐오의 파고는 매일 인권유린 현장을 목도하게 합니다.

 

한가위 명절을 앞두고 경향신문의 [사유와 성찰]에 실린 칼럼이 많이 회자되었습니다.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에 대해 캐물어 온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중략)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도 못하니”라고 하거든 “가족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신성한 주문이 되어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1년에 한 번씩 세계성만찬 기념주일마다 향린공동체 4교회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우리에게도 이런 근본적인 질문은 늘 필요합니다. 향린공동체란 무엇인가?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향린 공동체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랜 세월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과정이지만 새내기들에게는 낯설 수 있는 향린, 그리고 공동체. 2018년 향린공동체는 과연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

 

오늘 제목을 해방과 환대의 교회 공동체라고 묵직하게 붙였습니다.

해방과 환대라는 말도 그렇지만, 교회에다가 접미사처럼 공동체라고 붙인 것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섬돌향린교회 분가 준비를 하면서 누군가는 교회도 부담스럽지만 공동체라는 말은 더더욱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작은공동체>라고 섬돌을 수식하는 말 때문입니다.

 

굳이 교회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은 교회가 그 운동성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조직, 때로는 거대한 기업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사람들은 초기 예수운동과 신앙공동체를 무척이나 동경했습니다.

 

예수는 교회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주후 50년대에 쓰인 고린도 교인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교회의 깊은 분열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라고 불린 예수운동의 동지들, 공동체 멤버들은 높은 자리에 누가 앉을까에 더 관심이 있는 듯 해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가 어떤 공동체를 원했을까?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준 로핑크 신분의 책 한 구절은 이렇습니다. <원초 공동체는 감동적이고 깊이 충격적인 성령의 체험>들을 하였고, 그래서 <예수에 의하여 이미 기초가 놓인 의식이 심화되었음에 틀림없다>

 

예수의 삶이 보여준 본뜻을 따르는 것에 더해 감동적이고 전율이 있는 성령의 체험이 공동체를 세워갔다는 것. 세계성만찬 기념주일에 모여 있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체험이 공유되어야 합니다. 특히 성만찬이라 함은 서열화되어 있는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경험, 갖고 있는 것들 내어놓고 함께 오손도손 먹는다는 것, 우리는 이 기회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끊임없이 배제하고자 하는 욕망을 성찰하고 진정한 회개의 기회를 갖을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38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우리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라고 하면서 가르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 공동체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연속성과 공통점이 있는 버라이어티한 공동체입니다. 버라이어티한 구성원들의 생기가 뿜어져 나오기 위해서는 서로를 해방시키고, 환대하는 것이 밑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 안의 차이, 그 자체를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로 여길 줄 알아야 가능할 수 있습니다. 한쪽만 환대하는 것, 즉 시혜적인 관계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서로 환대하는 것이 가능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를 둘러싼 억압을 끝장내야 진정한 환대가 우러나올 수 있는 것 입니다.

 

가짜 뉴스 이야기를 앞서 잠시 했습니다만, 얼마 전 한겨레신문에 실린 조사결과가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하고 다른 것’을 가짜뉴스라고 인식하는 경향을 사람들이 가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외의 무궁무진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하늘은 드넓은데 딱 보이는 만큼만 하늘이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그것이 편협이나 선입견을 부추기는 것이지요. 게다가 나와 얼마나 동질감이 있는지가 기준이 될 때 완전히 열려 있는 진정한 의미의 환대는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 교회 공동체가 녹록치 않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동질감은 있지만 실제 저마다의 삶의 경험에 따른 갭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성만찬주일의 성서일과는 욥기, 히브리서, 마가복음 입니다.

 

뼈와 살을 쳐 보십시오. 제가 보장합니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할 것입니다. 라는 사탄의 가정 하에 욥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가 거룩하게 되어야 할 사람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뼈와 살을 치면 그 고통으로 쉽게 저주를 내뱉는 사람도 있겠지만, 예수나 욥은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으로 뼈와 살, 피와 살로 인한 고통, 죽음, 거기에 굴복하여 종이 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피와 살을 가진 이들과 꼭 같이 되는 것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환대는 무엇입니까? 어린이들을 환대하신 예수가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는 어린이들의 특성을 언급했지만, 동시에 우리는 어린이 또한 나와 다르지 않은 피와 살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 오는 것을 막으며 도리어 꾸짖는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기준에 오늘날 우리 역시 수도 없이 지배당합니다. 여기 앉아있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잣대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린이들이 와서 예수를 귀찮게나 하지 않을지, 아니 어디 하릴 없이 어린이들 따위가 예수와 맞먹는단 말인가? 그러나 그리 하지 않는 것, 오히려 그렇게 사람들이 쉬이 여기는 사람들에게야말로 먼저 다가서고 활짝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향린공동체는 계속 배우고 있습니다.

내 땅, 내 땅의 가치, 소유물을 넘어 삶의 터전, 생계의 터전을 쉽게 빼앗겨 버리고 마는 이웃들의 현실, 평화와 공존의 시대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국가보안법의 올무로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의 현실, 평화통일 하면 한민족, 우리 겨레를 쉽게 떠올리지만, 이주민, 난민을 보면서 우리는 동족을 넘어서는 인류애로 넓혀가야 한다는 것, 기본적인 평등권을 침해받고 배제되고 혐오범죄로 인해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웃들을 보며 그것은 단지 네 몫이 아닌 바로 내 몫이기도 하다라는 것을 배웁니다. 

 

이 사회, 세계의 변혁의 지점에서 향린공동체의 존재의 의미는 사실 더욱 빛날 것이라 여깁니다. 경계해야할 것은 자화자찬이나 나르시즘입니다. 기독교인이던 비기독교이던, 우리는 모두 한 근원에서 났음을 고백하며 나의 지체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함께 걸어왔던 그 걸음을 기억해 봅니다. 빨갱이라고 매도되고, 너네는 자기 의에 가득 차 있다고 너네만 잘나면 다냐? 라고 판단 받고 정죄 받기도 했지만, 그동안 우직하게 걸어온 걸음은 틀린 것이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속살, 우리의 치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종노릇하지는 맙시다. 거리에서 혹은 예배당에서, 함께 나누며 지나왔던 감동과 깊이 있는 전율의 체험, 충격적인 성령의 체험을 기억할 수 있길 바랍니다. 동시에 우리는 수적인 성과만을 자랑하려드는 한국교회 앞에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던지기를 계속 해야 합니다.

 

얼마 전 작고하신 허수경 시인의 나는 춤추는 중」 전문에 있는 글을 들으시면서 침묵기도 하겠습니다.

 

기쁨은 흐릿하게 오고

슬픔은 명랑하게 온다

바람의 혀가 투명한 빛 속에

산다, 산다, 산다, 할 때

나 혼자 노는 날

나의 머리칼과 숨이

온 담장을 허물면서 세계에 다가왔다

나는 춤추는 중

얼굴을 어느 낯선 들판의 어깨에 기대고

낯선 별에 유괴당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