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한 발걸음 (욥 23:1-9,16-7, 히 4:12-16, 막 10:17-31)
2018.10.14. 창조절 일곱째 주일
[문명의 전환은 가능한가?]
한 주간 평안 하셨습니까? 지난 주간에 저는 미국에서 오신 선생님과 동료들을 만나서 모처럼 옛 정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생님의 강연을 듣고, 동료들이 참여한 컨퍼런스에 참석하면서 그간 소홀히 하고 있던 물음들을 다시 검토해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이번에 서울시의 초청을 받고 오신 선생님은 94세의 노신학자 존 캅 교수이신데, 그분이 지난 반세기 동안 던져온 화두는 새로운 방식의 사고, 새로운 방식의 믿음, 새로운 방식의 삶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생태문명’(ecological civilization)고 표현합니다.
생태문명이란 오늘날 인류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삶의 방식인 산업문명(industrial civilization)과 대비되는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대부분의 사회를 지배한 산업문명은 그 동력을 ‘경제’에서 찾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성장’이라는 가치로 움직여왔습니다. ‘경제성장’은 지금도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구호입니다. 이와는 달리, 생태문명이 지향하는 가치는 ‘평화’이고, 그것을 이루는 동력은 ‘상생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생태문명’이라는 화두 자체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식이 옳은가, 아니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근대 자본주의 세계를 이끌어온 산업문명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풍요는 사회적 불평등과 소외를 낳았고, 약자에 대한 억압과 배제를 동반했으며, 자연에 대한 약탈과 파괴로 귀결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주어진 평등한 풍요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실험이 한 세기 전에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두 세대 동안 진행 되었지만, 만족스런 결실을 얻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겠으나,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근대적 삶의 방식으로 인해 생겨난 문제를 근대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의식 때문이었는지, 어느 샌가부터 새롭게 거론된 진보사상들은 근대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탈근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불리는 이 사상은 이제 거의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휩쓸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탈근대’라는 담론이 지성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어도, 우리들의 삶의 방식과 정신의 품격이 그다지 향상된 것 같지는 않고, 또 그 진보사상은 지난 한 세대 동안 세계를 휩쓸었던 약탈적 체제인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일을 잘 수행했다는 느낌도 들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사상이 비판에 머물러 있을 뿐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건설하는 일에 느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진보적인 사상이라 하더라도, 그 사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관념의 유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진보적인 사고는 건설적인 행동으로 표현되고, 그 행동이 깊어지고 넓어짐으로써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구성하는데 이르러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이 관념에 머물지 않고 삶의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는 진보적 담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생태주의 사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생태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한 새로운 삶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만일 이런 실험이 민간부분에서만이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개될 수 있다면, 현재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수많은 고통들이 크게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이라는 구호에 현혹되지 않을 만큼 시민의식이 성숙하고 사회적 관계가 튼튼해져야 할 것입니다.
산업문명의 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인류가 제시한 가장 끈질긴 문제제기 가운데 하나가 ‘돈인가 생명인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답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문명은 아직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담대한 발걸음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세워나가지 못하고,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주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우리에게 하나님나라를 살아갈 힘과 지혜를 주시기를 빕니다.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의 의미 / 마가복음 10장 17-31절]
오늘 마가복음 본문은 예수님과 한 청년과의 대화로 시작됩니다. 대화의 주제는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zōēn aiōnion, eternal life)이란 생물학적 목숨의 ‘무한한 연장’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삶에서 추구해야 할 ‘궁극적 가치’를 뜻합니다.
청년이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선생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자 청년은 슬픈 얼굴을 하고 근심하면서 돌아갑니다. 성서는 ‘그가 재산을 많이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슬픔과 근심이 재산에 대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보다는 더 깊은 차원의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부자청년의 관심이 재산 자체에 있었다면, 애초에 예수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수의 말을 듣고 근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근심하는 이유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삶을 살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는 길을 찾으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번민의 뿌리는 자기 안에 있는 선한 의도가 빚어낸 삶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번민을 안고 찾아온 그 청년을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겼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21절)
만일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지만 않았다면, 그는 부유하고 도덕적인 사람으로서 근심 없이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에 대한 물음이 부자청년을 삶의 위기 속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그 위기 속에서 그는 자신이 삶에서 이룬 성취가 도리어 덫이 되어버린 딜레마를 느꼈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가 이제껏 이룬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상황, 그래서 자신의 성취가 보람이 아니라 도리어 덫이 되고 마는 이 상황은 우리에게 ‘인생의 역설’이랄까, 아니면 삶의 ‘근원적인 과제’랄까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제시한 것은 그것을 푸는 열쇄였는데, 바로 그것이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부자청년에게 ‘부족한 결정적인 한 가지’였습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라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열쇄로 예수님이 제시한 이 과제는 해결하기가 어렵운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만큼’(hosa echeis, as much as you have)’ 팔아야 하는 이 과제는 누구에게나 어렵게 느껴질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단지 부자청년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를 향한 도전의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개인적인 차원의 ‘윤리 지침’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차원에 이뤄야 할 ‘문명의 방식’에 관한 것으로 보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날의 산업문명 체제는 마치 성경 속 부자청년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지식과 기술을 많이 보유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무한정 늘려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이 체제는 마치 도덕과 재산을 둘 다 가진 부자청년이 영원한 생명까지 얻으려고 하는 모습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부자청년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했지만 실패했듯이, 이 문명 또한 성경이 말한 그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가지고 있는 만큼 팔아서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못합니다. 부자청년은 당시 사회에서 ‘첫째’(ptotos)와 같은 사람으로 여겨졌겠지만, 영생을 구하는 삶에서는 꼴찌(eschatos)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역시 수많은 ‘첫째’들을 길러내지만, 여전히 ‘한 가지가 부족’합니다. 평화와 상생의 문명을 이루기 위해 담대한 행진을 펼치는 믿음의 사람들이 등장해야 합니다.
첫째가 꼴지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겸손의 미덕을 강조하는 말을 넘어서 역사의 질곡을 해결하는 길에 관한 근원적인 부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무죄한 자의 고난과 탄식 / 욥기 23장 1-9, 16-17절]
제2성서 가운데 욥기는 독특한 책입니다. 이 책은 시대의 낡은 인습에 맞서 싸우는 한 의인의 사상투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욥기의 주인공은 자기 시대가 주는 고통을 고스란히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문명의식이 만들어낸 선의의 피해자, 다시 말해서 그 시대의 풍조가 만들어낸 희생양입니다. 당시의 문명의식이자 시대풍조는 사탄의 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대변됩니다.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겠는가? 만일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긴다면 신을 저주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1:10-11)
욥은 자신의 인생에서 이룬 것들, 재산과 건강 심지어 가족을 모두 잃고도 신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마가복음 본문에 나오는 부자청년과는 달리, ‘영생을 찾는 일에서 인생의 성취가 결코 덫이 되지 않는 삶’을 산 의인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자청년에게 요구한 ‘마지막 한 가지’마저 소유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의 현실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무엇으로 인한 고통이냐 하면, 옛 문명에 속한 인습과의 싸움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낡은 시대인식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그의 세 친구들입니다. 친구들은 한 목소리로 고통당하고 있는 욥의 현실 자체가 ‘신의 저주를 받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비난의 표적으로 삼는 시대의 악행을 대변하는 말이었습니다.
고통당하는 약자를 도리어 죄인으로 몰아가는 부패한 공기가 만연한 그 세계에서 욥은 다음과 같이 탄식합니다. “아 그분이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그분의 보좌까지 내가 이를 수만 있다면 그분 앞에서 내 사정을 아뢰련만, 내가 정당함을 입이 닳도록 변론하련만...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3-4, 8절)
욥의 이 탄식은 ‘억울한 고통이 없는 세계’에 대한 갈망과 ‘자신의 믿음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 10절에 나오는 아름답고도 장엄한 고백인데,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뺏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개역성경)
대신 본문은 16-17절로 나아갑니다. 이 마지막 구절은 무죄한 자가 고난을 당할 때의 실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히브리어 원문의 난해함 때문에 성경번역본마다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데, 욥의 심정을 가장 극적으로 번역한 한글성경은 <공동번역>인 것 같습니다. “차라리 온통 어둠에 싸여, 나의 얼굴이여, 흑암 속에 묻혀라!”
본문은 이렇게 절망하는 목소리로 끝나고 있으나, 욥은 끝내 하나님을 볼 때까지 구시대의 악습을 대변하는 사상과 싸워나가는 투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욥기의 매력을 느끼고 싶은 분들은 11월 성경공부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욥의 절규로 끝나는 이 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는 말씀을 떠올려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욥은 옛 시대의 꼴찌였지만, 새 시대의 첫째와 같은 사람입니다.
개인의 삶만이 아니라 시대적 삶의 전개에 있어서도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진실을 밝힐 마지막 진리가 드러날 때 새 세계가 펼쳐진다는 말이자, 옛 체제의 마지막 어둠이 밝혀질 때 새 시대의 첫 동이 터온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금년은 남과 북의 분단이 두 개의 정부로 나뉘어 사회체제로 굳어진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70주년을 추념하는 애석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번 주에도 70주년을 맞게 될 사건이 있는데, 10월 19일에 있을 여순사건입니다. 그 역사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여 삼 년째 군사 통치를 펼치며 분단체제를 만들어가던 1948년, 남과 북의 제 정당과 사회단체는 연석회의 갖고 <통일 결의안>을 냈지요. 그런데 미군정은 통일을 염원하는 우리 민족의 뜻을 수용하지 않고 분단 선거를 강행하였고, 이를 반대하며 일어난 전국민적인 항쟁의 와중에 제주에서는 4.3사태라는 비극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제주의 양민을 학살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한 군인들의 봉기가 바로 ‘여순사건’입니다.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분들에 의해서, 여순사건이 반란이 아니라 항쟁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데, 그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4.3사건이 국가폭력에 의해 빚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오늘날, 이제 ‘여순사건’이야말로 분단체제가 남긴 마지막 터부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국가폭력에 맞선 저항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 우리 민족은 비로소 국가주의라는 편협한 애국심을 넘어서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더 중시하는 새로운 문명을 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분단체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에게 여순 ‘항쟁’이라는 생각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분단체제 너머의 화해와 통일의 시대를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제도나 질서보다, 앞으로 맞아야 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마가복음에서 회의하는 제자들에게 들려준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믿음입니다. (막 10:27) 억울한 고통을 당한 사람을 도리어 죄인 취급하는 낡은 인습에 맞서서,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볼 때까지 나아갔던 욥과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담대하게 나아가라 / 히브리서 4장 12-16절]
히브리서 본문은 믿음의 특징을 표현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승리한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energia),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습니다. 그래서 혼(psyche)과 영(pneumatos)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가르며, 생각(thought)과 의도(intention)를 밝힙니다.” (히 4:12)
사람들의 생각과 의도는 깊은 곳에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설 때 숨겨지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기독교적 믿음이란 다른 어떤 기대가 아니라, 진실과 진리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은 감춰지지 않으며, 진리는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도 고난을 당하며, 하늘의 사람도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히 5:7-8) 따라서 고난이 있을 때, 어둠에 빠졌을 때, 시련을 당할 때 예수를 향한 믿음의 고백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믿음의 고백을 굳게 지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16절이 그 대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여기서 담대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메타 파레시아’(meta/with parrésia) 즉 파레시아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파레시아’는 4가지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대범함(boldness)과 확신(confidence), 자유(freedom)와 개방성(openness)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유롭고 대범하며 열린 마음에 맺힌 확신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삶은 바로 이런 믿음으로 걷는 발걸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잃지 않을 때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입으며,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남과 북은 지금 화해와 평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는 역사의 이 은총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 뜻을 묻곤 합니다. 마지막 분단국으로서 냉전체제의 꼴찌로 살아온 한반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세계를 새롭게 지어내고자 하는 뜻을 펼치고 계신 것이 아닐까? 돈이 생명을 지배해오던 옛 문명을 끝내고 새로운 상생의 세계를 여는 첫째가 되도록 남과 북을 부르시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 민족이 눈앞의 이익보다는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하늘의 진리를 간구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을 묻곤 합니다.
남북으로 나뉘어 생겨난 대립과 갈등은 단순히 서로 다른 체제나 사상의 격돌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뒤틀린 역사의 진통이요, 누적된 실패의 무능이며, 방향을 잃은 정신의 아우성이었습니다. 70년 전 여순사건의 여파로 두 달 후에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규율하고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유에 기초한 확신과 개방성을 지닌 담대한 정신이 그리웠습니다.
지금 맞고 있는 한반도의 화해의 물결은 그런 정신을 탄생시키고 그런 발걸음을 시작하게 하려는 역사의 부름이자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그 은총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 모두 담대한 발걸음으로 나아가며, 제 때에 주시는 주님의 도움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침묵합시다.
[파송사]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사람들의 속을 꿰뚫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주님의 은혜를 향해 나아가십시오.
낡은 인습에 잡혀 살아가지 말고 은총의 삶을 담대하게 살아가십시오.
그 삶에서 피어난 생명의 꽃이 우리 자신과 우리 세계를 아름답게 물들이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