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4. 21.
하느님은 빛과 어두움을 동시에 창조하셨다.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으니”(창세기 1,5) 어둠 또한 창조 질서의 일부분이다. 빛과 어둠은 상보적인 것이며 어둠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연약함을 깨닫는다. 어두운 밤을 지날 때 우리는 우리가 세상의 주인이 아님을 알게 되고 이끄시는 이의 손길을 찾는다. 십자가의 성요한이 노래했듯, “나를 가장 아는 그분께서 날 기다리시는 그곳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쪽으로” 밤을 길잡이 삼아 걸어간다.
인간은 빛과 어둠에 모두 노출되어 있기에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인간의 불완전한 실존을 드러내는 표상이다. 스스로의 내면을 오래 들여다보면 누구든 결핍투성이의 비합리적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잔인한 자신의 그림자를 보게 마련이다. 그 그림자를 마주하는 경험은 당황스럽고 수치스럽고 끔찍하다. 그러나 그 경험은 또한 한없이 부족한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고 무한하신 하느님께 나아가는 회개와 구원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림자를 마주 보지 않을 때 오히려 문제가 발생한다. 무시하거나 덮어두거나 피하려 하면 그림자는 우리를 덮치고 우리의 의지를 빼앗는다. 즉 죄성에 제압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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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정의롭고 존경받는 삶을 살더라도 순식간에 균형을 잃어 비참한 죄의 포로가 되고 마는 나약한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나 나약함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순간 하느님에 대한 갈망과 그리움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고백은 하느님의 심판과 저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인간에 대한 희망과 긍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죄는 더더욱 신비다.
의식성찰은 이러한 인간의 양면성, 그림자와 희망을 가식 없이 받아들이는 기도다. 의식성찰은 모든 기도가 그렇듯 타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 하여 그 그림자가 마술처럼 제거되는 것도 아니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알 뿐이다. 자신이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이며 또 다른 유혹이 닥쳐올 때 조심하여 조금씩 왜곡된 습성을 줄여갈 수 있을 뿐이다.
조민아 지음, <일상과 신비>(삼인, 2022. 12. 23.), 117-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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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스로 여기는 인생의 진리 중 하나는
“바꿀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상대가 바뀌기를 기대하지만,
그래서 남을 바꾸려 들기도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를 바꾸는 것이다.
나를 바꾸려면 나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자기애(自己愛)적 존재다.
모두 나르시시스트다.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외면하고 회피하고 거짓으로 꾸미기도 한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죄의 문제는 바로 이것을 성찰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이 전능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자신의 조그만 실수 하나도 견디지 못하고
타인에 대해서도 완벽함을 요구하기도 한다.
조민아 교수의 말대로
기도는 우선 한없이 부족한 나 자신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그 연약함을 지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나의 그림자, 나의 취약성은 오히려 하나의 희망이 된다.
주님께서 부족한 우리 자신을 받아 주시기 때문에 그러하며,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이다.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고 신비이다.
역시 핵심 과제는 정직하고 솔직하게 자신을 바라보는가 하는 데 있다.
- 향린 목회 169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