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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사심 없는 믿음 |조은화 | 2018-10-28

by 조은화 posted Nov 02, 2018 Views 23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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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10-28

향린공동체 네 개 교회에서 지난 수요일부터 오늘까지 한신대학원 현장목회실습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5명의 목후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향린의 각 교회를 탐방하며 향린의 역사 방향성 실천과정을 함께 보고 들으면서 목회의 꿈을 꾸고 대안을 준비해 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과정에서 열정 가득한 목사후보생들과 함께하면서, “이 세상에서 기독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교회가 우선시 해야 하는 기본, 그간 너무 당연해서 놓치고 있었던 것을 다시 생각하게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나!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청년예수로 살겠다는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변화와 갱신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언제든 나의 기득권을, 개인적 욕심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었는가? 약자를 돌볼 힘을 갖고 있는가? 그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고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가?

 

 

[불안과 중독]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에서 지난 두 주간 중독을 주제로 16기 평신도아카데미를 진행했습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우리의 상태를 점검하고 나아가야 할 바를 안내해 주는 길잡이 역할의 시간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기제를 사용하는데 종종 자신이 숨을 수 있는 장소, 정신적 은신처 즉 피난처 같은 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자신을 더 보게 되는 상황이 익숙치않고 대면하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가장 익숙한 환경으로 숨어버립니다.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해 일시적 안정감을 부여받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안정감을 얻는 대신 편안함을 제공하는 대상이나 조직 사업체 학교 종교단체나 전체주의적 정부 등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차 대상 조직이 이상화되고 숭배되기도 합니다. 이런 은신처로 도피가 중독증세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결국 중독은 술, 마약, 어떤 사상이나 사물이든 무엇이 되었건 지나치게 빠져서 그것 없이는 생활을 못하고,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으며, 몸이 위태로워 집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벅차서 집착하게 되는 은신처의 위안은 우리를 고립시키고 삶으로부터 철수하게 만들면서, 파괴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합니다. 돈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기업은 노동자와 가난한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지 못합니다. 권력에 빠진 사람은 약한 이들의 인권에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을 독식하고자 온갖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총칼로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의 탐욕을 이루어 갑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에 빠지게 되면 성찰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영혼까지 탈탈 털리게 됩니다. 신과의 관계성이 건강하지 못하고 융합되어서 신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내 뜻대로 신을 만들어 사람들을 파행으로 치닫게 합니다.

 

 

[종교 중독]

 

지난 번 알려진 타작마당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텐데요. 타작마당은 은혜로교회 신옥주 교주가 교인들을 두고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는 작업을 뜻하는 말입니다. 피지섬 농장에서 탈출한 한 교인의 증언을 의하면, 누가복음 317절 본문을 토대로 말을 듣지 않으면 귀신이 들렸다 하여 죽도록 때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견디고 못하고 나가면 가라지라 하여 죽을지경까지 따귀를 때리고 머리를 때리면서 작업을 한다고 합니다. 시편 37절에 주님께서 내 모든 원수들의 뺨을 치시고, 악인들의 이를 부러뜨리셨습니다.”에서 착안한 뺨때리기는, 때리는 사람은 상대 안에 원수 마귀가 있다고 생각하여 세게 때리고 맞는 사람은 그 안에 마귀가 나간다 하니 세게 맞아도 참게 된다고 합니다. 전 재산을 다 털어서 헌금내고 피지로 떠난 사람들 중 현재 420여명 정도가 그곳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보고자 그렇게 피지까지 가서 힘들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런 이상증상은 비단 은혜로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재산을 사유화하고 세습을 하며 이곳저곳 부정부패가 만연한데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판단할 힘을 얻지 못하는 기독인들, 사회가 어찌되었든 나의 불안을 잠식시켜주는 것이면 모든 것이 오케이가 되는 세상입니다. 분명 이런 현상은 성찰보다는 양적성장에 몰두하며 종교 중독증세를 더 키운 대형교회들과 교단 모두의 결과물이겠지요.

신과 인간이 융합되어 성숙하지 못하게 살아가는 때 시대의 변화에 따른 우리의 노력 어떻게 가져야 할까요

 

[: 고난과 나아감]

 

욥기는 연대는 대략 고통스러웠던 바빌론 포로기 이후의 시대라고 추정합니다. 포로에서 풀려났지만 여전히 어려운 시대 고난을 맞는 삶을 보며, 의인에게는 건강과 번영을, 불의한 사람에게는 고통으로 벌하신다는 인과응보식 구조는 설득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을 다룬 보편성을 담지한 고대 근동으로부터 온 지혜문학 전통을 종합하여 새로운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작업한 것이 욥기입니다. 한마디로 무고한 고난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할 수 있는가? 라는 삶의 고민이 담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욥기의 마지막장입니다. 욥기는 1장에서 210절까지 읽고 곧바로 42장 후반부로 넘겨서 보면 단순한 메시지가 담긴 짧은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중간의 욥의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같이 보게 되면, 당시 규정되어온 고정된 생각과의 갈등 속에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노력한 과정임을 보게 됩니다.

 

욥기 1장과 42장은 서로 상응하면서도 다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차이를 보면, 우선 앞서 소유했던 재물과 결론에 이르러 받게 된 재물의 차이가 딱 두 배로 증가합니다. 아들과 딸에 대한 명수는 증가하지 않지만 딸들도 유산을 똑같이 나눠받고 아들들의 이름보다 오히려 딸들의 이름이 자세하게 나온다는 점, 그리고 앞부분에 나와있던 재산목록으로서의 종이 후반부에는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들의 이름이 아니라 딸들의 이름 나온다는 것은 무엇일가요? 물론 당시 가부장적 환경을 한계를 떨쳐낼 수는 없지만 여성들이 무시되어온 상황에 권리는 당연히 딸들에게도 적용되고, 세 딸들의 이름을 통해 변화된 세상의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종이 이름이 삭제된 것 역시 필요와 재산 가치로 사람을 여기는 것이 아닌 새로운 인간의 기준과 가치를 넘어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욥기는 가난해지고 소외된 상태에서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는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심한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비난이 아니라 늘 의심과 고통의 한계를 직면하고자 하는 인간의 고노에 함께 하시고 결국 우리의 지평을 넓혀주신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이 고통의 한계를 직면하며 얻은 깨달음의 한마디를 듣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욥기 425, 새번역)

공동번역으로 한 번 더 읽어드립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

 

욥이 겪은 고난의 과정은 세상을 보는 눈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겪는 고난을 통해, 그 아픔을 간직한 이 세상의 이웃에게로 눈을 돌려 연대의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발견합니다.

 

 

[바디매오: 다시 보다]

 

오늘 주어진 마가복음서 본문은 맹인거지 바디매오가 다시 눈을 뜨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앞에는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에게 자신들을 예수님의 오른편에 왼편에 앉게 해달라는 청탁요청의 이야기가 위치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디매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 이야기에 앞서 36절에서 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리고 바디매오에게도 묻습니다. “무엇을 원하는가?”(51) 같은 질문에 두 본문은 각기 다른 대답을 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을 주십시오라고 하는데, 맹인거지 바디매오는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여리고를 거쳐가야만 하는 길에 마가복음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는 듯합니다. 눈이 제대로 뜨이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도 그것이 올바른 믿음일 수 없다. 눈이 어두운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오른편 왼편을 놓고 자리다툼이나 벌이는 제자들처럼 대가성 상거래 관계를 생각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그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로 왔습니다. 그가 간절히 행했던 보습에서 우리는 1차원적 믿음이 아닌 깊은 차원의 길, 즉 새로운 깨달음으로의 길을 가고자 하는 눈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혐오와 배제의 대상으로 바라봤던 시대에 맹인거지가 눈을 뜬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뜻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억압 받고 고통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특별히 돌보시고 걱정하고 있음을 알게 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신뢰임을 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심을 알고 어떤 상황이든 용기를 내어 깨어남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심 없는 믿음]

 

오늘 성서의 이야기는 고난의 연속인 세상사를 고난을 겪는 온 이유를 자꾸 찾으려 하는 이들, 가난한 아픔과 죽음의 고통을 그저 자신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덮어씌우고 비난하는 눈, 또 신을 믿기만 하면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고 모든 것이 완벽할 거라는 사탕발림의 유혹으로 이끄는 편협한 눈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합니다.

 

틸리히 신학자는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특정 신의 호칭이 다른 특정 종교의 신을 참 신이라고 믿는 태도나 특정 종교가 역사 속에서 성취해놓은 위대한 상징 교리 등을 믿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 관심에 붙잡힌 상태라고 했습니다. 이 자격에 부응하는 특징으로 궁극적, 무제약적, 총체적, 무한적 속성을 제시합니다. 무조건적, 무제약적 이어야 한다는 것은 종교적 관심이 개인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혹은 필요에 따라 초능력자 혹은 초월적 존재와 주고받는 상거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조건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총체적이란 말은 삶 전체의 깊이 차원에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나와 가족만이 아니라 세상의 문제에 관심하는 것입니다. 무한적이란 것은 다함없는 열정과 영원히 지속성과 성실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악세사리나 생활방편이 아니라 세속화된 종교에 성찰을 하도록 함입니다.

 

 

[개혁의 길]

 

15171031일 독일의 마틴 루터 신부가 로마교황청이 베드로 성당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까지 판매하는 부패함에 저항하여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것은 향후 여러 관계와 맞물리며 거대한 혁명으로 발전했습니다. 신의 이름을 빌어 인간이 인간위에 군림하고 신을 사유화하려는 부패함을 드러내고 교회 개혁을 맛보았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믿음이 뭘까요? 과거부터 현재까지 오던 구습을 깨는 작업이지 않을까요? 고난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는 알 수 없지만 고난을 만나는 가운데 우리는 억울하게 고통을 겪는 이들까지 보는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겪고자 하는 용기와 힘을 낼 때 새로운 변혁은 시작될 것입니다.

 

향린은 지금껏 변혁과 갱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점점 사유화, 개인화로 변질되어 가는 시대에 불안을 어찌할 줄 몰라 안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얄팍한 위로나 구미에 맞는 종교상품들을 내놓기보다는 좀 더 본질을 잃지 않고자 노력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 그간 교회이전을 앞두고 신도회에서 부서에서 고민하고 계획해 보는 것이겠지요. ‘사심 없는 믿음이 선행될 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를 염원하고 세상을 품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받아야 하고 그런 결과를 꼭 봐야 하는 성과를 내야 하는 교회가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역사의 한 복판에서 변화와 갱신을 향한 길을 가기를 바랍니다.

 

지난 1018일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 바티칸시티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문재인 대통령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교황에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를 공유하며 "김정은 위원장이 교황께 초청장을 보내도 좋겠습니까"라는 질문에 교황은 "초청장이 오면 무조건 응답을 줄 것이고, 나는 갈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지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메시지를 주었던 교황이 한반도 평화를 위해 가고 있는 한국 정부에 대해 강력한 지지 의사를 밝히며 전한 말이 계속 기억에 남습니다. 진실한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오늘 이 말을 전하며 하늘뜻을 마칩니다.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고,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다 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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