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룻1:1-18, 히9:11-14, 막12:28-34
새민족교회 손정일 장로
향린교우 여러분!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평신도기독인연대가 주최하는 평신도 강단교류의 설교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새민족교회에서도 1년에 4번 평신도 설교를 합니다. 이런 시간을 통해 예배의 주요 구성원인 평신도들이 주체적으로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신앙의 자세가 바뀌고 교회를 개혁하는 데도 일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많은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향린교회는 교회개혁에 가장 앞장 선 교회이고,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주어진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정성을 다했습니다. 서투르고 부족하더라도 교우님들의 넓은 자비와 사랑으로 들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 주어진 성서 본문 중 구약은 룻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랑을 매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면서 평범한 한 가족이 주님 예수의 계보에 등장하게 되는 역사를 보여 줍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께 바친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사해 주었다고 전합니다. 마가복음서의 말씀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과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 본문을 차분히 묵상하다 보니 오늘의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보기에 어리석은 너희들은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구나. 탐욕에 눈이 멀어 사랑할 마음도 없구나. 사랑이 부족한 너희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라고 말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할 때에는 사랑하라는 계명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해 자만심과 욕심으로 가득하여 사랑이 부족한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구약본문의 주인공은 모압 여성 룻입니다. 룻은 기근 때문에 모압으로 이주한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의 며느리가 됩니다. 그런데 시아버지 엘리멜렉과 남편을 비롯하여 집안의 남성들이 다 죽습니다. 그때 시어머니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자유를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와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합니다. 자라나고 익숙한 자신의 친정과 친척을 떠나 모든 것이 생소한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동서를 따라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나오미의 명령에도 룻은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룻의 이 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이방 여성이었던 룻은 결혼 후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룻기는 그가 신앙인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익숙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어머니를 따라 새로운 모험의 세계로 나아가는 룻의 모습이 깊은 신앙고백으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저는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룻이 의로운 남편 보아스를 만나는 사건도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보아스는 신중하고 자비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법에 따라 팔려고 내놓은 엘리멜렉의 밭을 우선 책임져야 할 사람에게 룻도 책임지라고 요구합니다. 그 가 계산 후 손해 볼 것을 염려하여 거부하자 보아스는 모든 증인들 앞에서 룻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밭의 소유를 본인 것으로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룻의 가문을 지키고 진심으로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보아스가 행한 일을 보면서 자신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비교가 되었습니다. 성과와 이익에 집착하여 이웃을 그저 무한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기보다 모든 것을 돈벌이의 대상으로 삼는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하지 않습니까? 각박한 현실에 소외되고 억압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양산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알면서도, 이해관계 때문에 눈감고 침묵하는 기독인들의 현실을 책망하는 듯 보입니다. 오늘 성경은 룻과 보아스의 결혼을 통해 분명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아스와 같은 사랑, 룻과 같은 신뢰 속에서만 왕의 가문이 탄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룻기를 보면서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명성교회 부자세습사건을 생각해봅니다. 과연 명성교회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돈을 사랑하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교회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새민족교회는 올해로 창립 32주년이 됩니다. 향린교회에 비하면 아주 작고 부족한 공동체이지만 지난 32년 동안 온 힘을 다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현장에서 실천하려고 많이 애썼습니다. 교회의 헌금은 가난한 교우가 소외되지 않도록 무기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원칙은 지금까지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금전적 형편에 따라 공동체의 의사결정이 그에 치우치지 않도록 했습니다. 물론 때로 교회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양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더디기도 했지만, 그 원칙이 지켜지면서 교우들의 평등한 의사결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는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 계신 많은 교우들이 자녀를 군대에 보낸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저는 큰 아이를 논산훈련소에 입소시키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래지 않은 이별이었지만 내 살이 떨어져 나가는듯한 슬픔에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큰 아이는 애써 태연한척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부모인 저는 아들의 마음이 보였습니다. 저는 복받쳐 오르는 울컥함에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에서 놓칠 새라 계속 지켜보았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보면서 저는 새로운 깨달음 하나를 얻었습니다. 잠시 다녀올 아들하나 군대 보내는 작은 일에 오열이 복받치는데, 하나님은 어떠실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사건이 생각 난 그 순간 저는 매우 두려운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우리가 대체 무엇이길래 사랑하는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시게 하셨을까?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 너무나 아픕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에 대해 우리는 과연 지금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저희 교회에서는 대표기도 중에 주님 뜻을 헤아리는 묵상기도 시간이 있습니다, 소리 내어 말로 기도하고 잠시 침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며 우리 새민족교우들은 주님의 마음을 느끼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기보다는 소원만 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지 않고 요구만 하지 않습니까? 기도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않습니까? 한손으로 기도하면서 다른 한손으로 같이 기도하는 이웃을 어렵게 하지 않습니까?
읽은 어느 책에 보니 소원 많이 빌어서 성취될 것 같으면 중국이 벌써 월드컵에 몇 번이고 우승했을 거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내 맘대로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사건 속에서 사랑의 주님이 보여주시는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에 따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동행하는 것입니다.
지난 몇 주 전에 새민족공동체에서는 문익환 목사님의 생가인 통일의 집에 다녀왔습니다. 단풍이 예쁜 수유리 산자락의 아담하고 단정한 집이었습니다. 소박하게 사셨던 목사님의 삶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금방이라도 달려 나오셔서 반겨주실 것 같았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에서 가슴 아프게 외치던 목사님의 모습이 생생하였는데, 통일의 집에서 다시 그 때의 영상을 보니 당시 울컥울컥하며 긴 시간동안 울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열사들의 이름을 한 분 한 분 외칠 때마다 그 분들을 향한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저의 심장을 얼마나 콕콕 찔러대는지, 슬프고도 중한 아픔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그 이름들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과도 같았습니다.
향린교회와 함께 하셨던 홍근수 목사님께서는 분단된 민족이 국가보안법의 압제에 신음할 때 통일운동의 선두에서 십자가를 현장에서 지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우리 기독인들이 입으로만 사랑을 외쳤던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평생을 그토록 외치시던 화해와 평화의 물결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냉전체제의 이념으로 분단을 고착화하는 세력은 정의와 평화가 한반도에 꽃 피는 것을 거역하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이단이 아닙니까? 애초에 겨레가 둘로 나눠지게 된 것도 서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까? 사랑한다면서 이웃의 조건을 따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전쟁을 피해 도망 온 난민들을 이슬람 종교라 비난하며 쫓아내는 것도 분명 주님이 가르치신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성적 지향이 다르다고, 마치 전염병을 가진 병자 취급하는 것이 주님의 뜻 인양 호도하는 사람들도 그 마음이 메마르고 어두워서 사랑은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한 번 돌아봅시다. 주일 아침에 일찍 나와 봉사로 헌신하는 교회공동체의 식구들이 있습니다. 그런 봉사는 전혀 없이 느지막이 예배에만 참석하여 온전히 주일 성수를 했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교우들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과 섬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에서 배운 교우간의 사랑과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먼저 담당한 교우들이 힘들어 하여 고통 받고 신음 할 때 십자가를 함께 지고 나눠야 합니다.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장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아야합니다. 저나 여러분이 실생활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다보면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아서 망설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라는 것은 세상의 방식과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의 직업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소기업의 대표입니다. 저는 창업 후 큰 어려움 없이 잘 유지되어 온 것에 감사하고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은 제가 왜 이 쉽지 않은 삶의 현장에서 나름 잘 살아가게 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말입니다. 저는 기도하며 주님의 음성을 살핍니다. ‘너는 주님께서 사랑하는 소중한 네 이웃과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을 잘 보살피고 사랑하라. 이것이 내가 주는 계명이다’ 주님께서 주신 재능을 사용하여 제게 맡겨 주신 사람들을 잘 보살피라는 계명을 실천하려 애씁니다. 현실을 살면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려합니다.
경제생활의 현장에서 살다보면 요즘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차가운 아스팔트의 바닥에서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민생정책에 대해서 민중을 억압한 기득권세력은 끊임없이 훼방을 놓습니다. 통일이 되면 경제가 망한다. 주52시간 노동과 최저임금이 올라서 사업이 망한다는 근거 없는 뉴스를 퍼 나르며 이제껏 누렸던 것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웃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올바른 방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또 금방이라도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선동하여 민중이 고통 받는 어두운 과거로 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지혜를 모아 하루빨리 민족분단의 벽을 허물고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합니다. 재물의 욕심을 걷고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하신 주님께 죄를 고백해야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내가 십자가에 내 아들까지 죽게 하면서까지 너희들을 사랑하였는데 너희는 무엇하느냐? 라고 묻고 계십니다. 사랑할 조건을 따지고 나와 다르다고 사랑하지 않습니까? 물질과 권력을 사랑하고 이기적인 사랑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에 대해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 사랑을 배웠다. 이제 그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고 사랑하라 또 사랑하라’
하나님의 정의, 평화, 생명을 위하여 늘 사랑으로 실천하여 진리에 이르는 향린교회가 되시기를 빌며 몸소 사랑을 행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만드는 길에 연대하는 새민족교회를 비롯한 이웃교회와 늘 함께 동행합시다.
마지막으로 새민족교우들이 좋아하는 시 한편을 읽겠습니다.
고마운 사랑아 샘솟아 올라라
이 가슴 터지며 넘쳐나 흘러라
새들아 노래 불러라
나는 흘러흘러 적시리
메마른 이내 강산을
뜨거운 사랑아 치솟아 올라라
누더기 인생을 불질러 버려라
바람아 불어 오너라
나는 너울너울 춤추리
이 언 땅 녹여 내면서
사랑은 고마워 사랑은 뜨거워
쓰리고 아파라 피멍든 사랑아
살갗이 찢어지면서
뼈마디 부서지면서
이 땅 물들인 사랑아
오늘 주신 말씀을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 김희헌 목사)
‘사랑’이라는 주제로 말씀해주신 손정일 장로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늘뜻펴기를 준비하기 위해 두 주 전에 손장로님과 만나서 대화를 하고 또 보내주신 초고를 읽으면서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의 가르침을 요약하여,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라고 정리하셨는데, 묵상을 거듭할수록 그 말씀을 제가 이어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금년 한 해를 되돌아보니, ‘사랑하라’는 이 말씀이 무겁게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밖에 있는 경쟁자가 아니라 내 안의 무엇이요, 쓰러뜨려야 할 적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말씀이 무겁게 흐르지 않게 여행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역사의 아픔과 새로운 삶의 발명]
아시는 대로 지난주에 저는 서울노회 통일사회부에서 주관한 평화기행으로 오키나와를 다녀왔습니다. 직접 보고 듣기 전에는 경험하기 힘든 묵직한 역사의 무게를 맘에 담고 왔습니다.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들의 아픔이나 고민이 우리의 것과 다르지 않고, 또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이란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을 만큼 크다는 사실도 느꼈습니다.
이번 방문 전에는 오키나와의 지리적인 특성이나 역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현재는 일본에 속해 있지만 150년 전까지는 독립 왕국이었기 때문에 그곳의 문화나 사람들의 정서도 일본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메이지유신 때 일본정부가 오키나와를 본토에 강제편입 시키고 그 후에도 수많은 차별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이 일제 식민지 경험을 했던 우리들과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루는 오키나와 섬에서 배로 1시간 정도 떨어진 도카시키 섬에 들러서 그곳의 슬픈 역사를 보고 들었습니다. 자기 땅을 점령한 일본군과 미군들 사이에서 수백 명의 주민들이 집단자결을 선택한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데, 이웃과 가족을 죽이는 것이 사랑의 책임처럼 여겨지는 비극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머나먼 곳에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백 명의 조선 남자들이 그곳까지 끌려가서 건축한 동굴이 있었는데, 그곳은 미군 함대를 향해 돌진할 자살특공대의 배를 숨기려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마을 한편에 있던 빨간 지붕 집에는 당시 섬에 진주한 550명의 일본군에게 성노예로 시달린 7명의 조선 여성들이 끌려와 살았다고 합니다.
그 섬 주민 한 분이 하루 종일 동행하면서 역사를 설명해주셨습니다. 히로미 미나모토라는 이름의 이 여성운동가는 오키나와 현만 해도 147개소나 있던 일본군 위안소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에 참여한 분이었습니다.
제가 교우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그분의 인도를 받고 간 아리랑 공원에 관한 것입니다. ‘아리랑’이라는 한국이름이 붙은 그 공원은 약 이십 년 전에 그곳 주민들이 한 많은 생을 살다간 조선여성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곳입니다. 크지는 않지만 얼마나 정성스런 과정을 거쳤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서 마을 주민들은 직접 그림을 그려 넣은 도자기를 구워서 만들고, 한국에서 가져온 돌을 사용하여 한반도를 향해서 제단을 쌓고, 공원 전체가 생명의 재탄생을 상징하도록 구성하였습니다.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기금을 추렴해서 공원을 가꾸고 있다고 하는데, 자신들의 아픔을 넘어서 타민족 여성들의 고통을 기억하며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사죄나 연민보다는 더 근원적인 무엇에 이끌린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경험한 역사의 아픔과 고통에서 사랑을 체득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행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철학자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랑이란 ‘삶의 재발명’이다. 따라서 사랑의 시작은 ‘불가능성의 극복’에서 비롯된다. (A. 바디우, [사랑예찬], 44, 77) 이 철학자의 주장은 성서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이 세계가 새롭게 지어지고, 그 사랑을 동력으로 삼는 신앙공동체는 세속 질서의 불가능성을 뚫고 이 땅에서 하나님나라의 새 삶을 발명해나가는 모임이어야 한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성경의 증언,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사랑]
오늘 성경본문을 잠시 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룻의 이야기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룻은 이방인이요, 과부였으며, 심지어 이스라엘의 적국이 되곤 했던 모압 사람입니다. 아웃사이더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신실한 사랑으로 새 삶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끈질긴 사랑이 절망의 궤적을 그리며 움직이고 있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삶을 마침내 희망과 축복으로 이끕니다.
룻기의 주역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상하리만치 룻기에서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오미의 절망스런 삶에서 하나님은 숨어있습니다. 죽은 남편과 아들을 되살려내는 신의 기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일한 단서는 룻입니다. 절망에 빠진 나오미에게 보여준 룻의 충실한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취를 암시합니다. 룻의 사랑이 신성한 세계를 열어간 것입니다.
히브리서 본문은 ‘대제사장’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관례에 따라 일하던 다른 제사장들과는 달리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명한 분으로 묘사됩니다. 짐승을 제물로 잡아서 그 피로 죄를 일시적으로 용서하는 옛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바침으로써 단 번에 ‘영원한 구원’을 이루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도입하였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할 때,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여 져서, 우리가 ‘죽은 행위’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된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속한 사람은 ‘죽은 행위’(nekron ergon)에 머물지 않습니다. 죽은 행위란 옛 삶의 답습입니다. 반면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지어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삶을 짓는 것이 사랑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으뜸가는 계명에 관한 율법학자의 질문을 받고, 그 대답으로 ‘마음과 지혜와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삶’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하면 좋지만 안 해도 되는 상대적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인 요청이 됩니다.
사랑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기독교의 이 가르침은 장점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맹점이 되기도 합니다. 장점인 경우는 누구나 사랑의 보편적 부름을 받고,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요청 앞에 서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랑이 자기로부터 일어난 새 삶의 실험이 아니라 밖을 향한 요구가 될 경우에는 맹점이 됩니다. 사랑한다 하면서 교만에 빠지거나, 사랑을 말로만 하는 태만에 빠지거나, 심지어는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파괴하는 기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매와 형제에 대한 혐오를 일삼는 종교가 있고, 수천 개의 사랑의 언어가 떠돌 뿐 옛 삶의 답습만 있는 종교도 있습니다. 현대 영성의 개척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존경받는 토마스 머튼은 ‘저항과 신비’를 겸비한 영성을 강조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기 원하는 수사 후보생들에게 그가 해주었던 말은 이것입니다. ‘영적인 삶을 살기 전에 먼저 삶을 살아야 한다.’ (파커 J. 파머, [가르침], 34)
영적인 삶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새롭게 지어가는 것이 영적인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심정의 진실’에 머물러 있지 말고, ‘해방의 열매’를 맺도록 삶을 새롭게 지어가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부릅니다. 그것은 ‘죽은 행위’를 답습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는 삶’이 있으니,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이 사랑의 초대를 따라 살아가면서, 풍성한 삶의 열매를 거두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빕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메마른 삶에 샘처럼 솟아난 고마운 사랑을 살아갑시다.
누더기 인생을 불 질러 버리는 뜨거운 사랑을 살아갑시다.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물들이는 고맙고 뜨거운 사랑을 살아갑시다.
마음과 지혜와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매와 형제를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여
기필코 새 삶을 발명해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