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에 바침 (룻 3:1-5, 4:13-17, 히 9:24-28, 막 12:38-44)
2018.11.11 (창조절 11, 전태일추모주일)
창신동에 있는 전태일재단이 청계천 3가 수표교 부근으로 이전하기 위해 현재 개축중입니다. 공사 중인 그 건물 맞은편에 국일고시원이라는 3층 건물이 있는데, 지난 금요일 새벽에 불이 나서 7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비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두 평도 되지 않은 방들이 마주보며 붙어 있는 이 고시원의 두 개 층에는 50여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3층에서 불이 나자 2층 거주자들은 대피할 수 있었지만, 3층 사람들은 창문을 통해서 일부 탈출하고, 창문도 없는 방에 있던 사람들은 불길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언젠가부터 고시원은 생활이 넉넉하지 않은 일용직 노동자들이 주로 기거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곳도 그러했는데, 보통은 일 나가기 위해서 새벽 4시 30분에는 일어나는데 그날은 비가 내려서 일을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가 컸다고 합니다. 소방관련 시설을 갖추지 못한 이 건물에서 생을 마감한 분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면서, 편법적인 행위들에 대한 분노보다도 가난한 삶 자체가 재앙이 되어 버린 이 비참한 문화가 언제 그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자기 몸에 불을 붙인 날이 가까워오는 때 일어난 이 화재사건은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지속되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지 말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 전태일추모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그의 비범한 투쟁에 대한 찬사보다도 그 삶의 밑바탕을 이룬 사랑과 지혜, 열정과 성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고통스런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사랑이 그가 가진 열정과 지혜의 원천이었습니다. 지난 48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암울했던 과거를 회상시키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미래를 지어가도록 일깨워 밀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단 한 번에 자신을 바쳐 이 역사에 심고자 했던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은 세계’를 용서하고 다시 힘을 내도록 축복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전태일의 삶을 통해서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신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배웁니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은 죄인이요, 그를 구원하는 것은 신’이라고 말하는데 익숙하지만, 그것은 논리적 진실에 가깝지 실체적 경험에 관한 증언은 아닙니다. 무엇이 신인가요? 우리는 어디에서 신을 봅니까? 지극한 사랑으로 발버둥치는 인간을 통해서 가장 생생하게 신을 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통해서 신을 봤다고 말한 기독교 신학의 최초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묵상도 그것과 연관됩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신이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이 세계를 이리저리 움직인다고 추정할런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아무 것도 바치지 않고 이루어지는 생명의 기적이란 없습니다. 신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모험이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내주었다고 이해한 기독교 신학의 진실일 것입니다.
지금도 무슨 구원과 창조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거기에는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해 필요한 무언가가 수없이 바쳐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생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들, 룻 3:1-5, 4:13-17]
룻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한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파국을 맞은 인생에 어떻게 구원이 오는 지는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여인의 생존전략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삶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 주목하다 보면, 신뢰와 배려, 야량과 책임이 오가면서 삶이 새롭게 지어져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1장과 2장에 나오는 나오미와 룻의 삶은 위기의 연속이었지만, 3장과 4장에서 그들의 삶이 회복되고 마침내 나오미의 찬양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보가 삶의 고투를 벌이는 민초들의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룻기는 모압 여인 룻을 통해서 삶의 파국을 맞은 시어머니 나오미뿐만 아니라 그녀가 속한 민족 전체를 구원하는 메시아의 계보를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룻기는 보다 넓은 시각에서 그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1성서 전체에서 룻기가 하는 역할에 관한 것입니다. 제1성서의 대부분 즉, 오경과 역사서와 예언서의 대부분이 포로기 이후에 최종 편집되었습니다.
포로기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들의 상황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민족과 혼혈을 하는 현실을 죄악시하고, 이스라엘 순혈주의 정책을 통해서 민족을 갱신하려고 했습니다.
에스라서 9장을 보면, 사람들이 에스라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들마저도, 이방 백성과 관계를 끊지 않고... 이방 사람의 딸을 아내로 또는 며느리로 맞아들였으므로, 주변의 여러 족속의 피가 거룩한 핏줄에 섞여 갑니다.” (라 9:1-2) 이 말을 듣고 에스라는 “기가 막혀서 겉옷과 속옷을 찢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뜯으면서 주저앉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유다 총독이 되어 돌아온 느헤미야는 보다 적극적인 조처를 합니다. 13장을 보면, 느헤미야는 암몬과 모압의 여자들과 혼인한 남자들을 처벌하면서, 이방여인들과 혼인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합니다. (느 13:25) 그리고 비슷한 시대에 기록된 신명기 역시 룻의 고향이었던 모압 사람들과 혼인금지 규정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합니다. 그 자손은 십대가 아니라, 영원히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합니다.”(신 23:3)
이런 배타적인 정신풍토에서 어떻게 룻기가 살아남았는지 신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압 여인 룻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믿음의 정체성에 관한 보다 개방적이고 보다 혁명적인 사고를 하도록 이끕니다. 룻의 아들 오벳이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고, 거기로부터 예수의 계보가 이어진다는 증언은 배타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성경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가 배타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생명을 회복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단 한 번에 구원케 하는 그리스도, 히 9:24-28]
제2성서의 서신서 가운데 지난 몇 주간 동안 히브리서를 읽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승리자 예수’의 이미지를 통해서 강력한 기독론을 전개합니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가 보여준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에, 안병무의 역사비평에 익숙한 향린교회 교우들에게는 이 성경구절이 어쩌면 목구멍의 가시처럼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가졌던 관심은 ‘공동체가 맞고 있는 갈등과 영적 피로감을 해소’하는 문제였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2:1) 그는 공동체가 가진 문제의 본질로 육박해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고유한 성격, 다시 말해서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하는 행위와는 전적으로 다른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공동체의 침체와 피로 씻어내고 믿음의 동력을 재구성하고자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도 그리스도는 자신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서 단 번에 만물의 구원을 이루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모양을 가진 거룩한 행위들이 반복되기만 하는 여타의 종교 활동과는 다른 것으로서, 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 신을 대하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그런 일을 수행하는 인간에게서 신성이 발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26, 27, 28절에서 연거푸 세 차례 나오는 표현이 있는데, ‘단 한 번’(hapax, once for all)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표현은 오늘날 교리적으로 해석되지만, 그것을 기록한 히브리서 기자의 심정으로 읽는다면 차라리 ‘그리움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형식적인 거룩을 통한 너절한 명예보다, 하늘 자체로 육박해 들어가는 참 사람의 행위, 단 한 번으로 하늘의 뜻을 드러내고자 하는 믿음의 모험에 관한 그리움으로 들립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자기를 희생 제물로 드려서 죄를 없이하시기 위하여 시대의 종말에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히 9:26b-28a)
많은 사람들의 죄를 없애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행위란 무엇을 의미하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리적인 설명보다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맺고 있는 삶의 관계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죄에 얽혀 있는 인간의 공동체적 운명에 대한 것이자, 그 운명의 사슬을 끊고 구원받으려는 삶의 모험에 관한 것입니다. 함석헌은 그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죄도 인류적인 죄요, 선도 인류적인 선이다. 온 세상이 다 악해도 나 혼자 선을 행하여 하늘나라 간다던 것은 낡아빠진 종교다. 세상에 그런 더러운 맘이 어디 있나? 인류 전체가 죄를 범하지 않고 내가 죄인 됐을 리가 없고, 내가 선을 하려는 데 전체를 잊고 될 수 없다.... 하나가 참으로 하면 반드시 그것이 전체에 느껴진다.... 그 힘이 곧 성령이다.” (“새 나라 꿈틀거림” 1961년, 저작집, 3:139)
오늘 본문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단번에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쳤다’고 말합니다. 이 증언은 사회적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내장된 파괴성과 풍요성을 동시에 보게 합니다. 사람들이 짓는 죄는 그 구조상 피해 당사자의 삶만 파괴하지 않고, 관계의 망을 통해서 나선형적인 파급효과를 갖다가 결국에는 가해자의 삶까지도 파괴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죽음의 사슬을 끊고 솟구치는 생명의 모험은 자신의 업적으로만 남지 않고 모두를 구원하는 길을 열어줍니다. 전태일의 삶이 그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나타난 원형적인 믿음의 모험을 증언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파편화된 관심사로 물들어가며 구원의 꿈을 잃은 세계가 단 번에 도약하는 길이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구원의 길을 어디에서 봅니까?
[모든 것을 바친 여인, 마가 12:38-44]
오늘 마가복음 본문은 두 이야기를 대비시킵니다. 하나는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면서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을 터는 위선적인 율법학자의 이야기요, 다른 하나는 동전 두 닢을 바친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기묘한 대비를 통해서 우리 삶의 아이러니를 보게 만듭니다. 가난에서 솟아난 진실을 그리워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율법학자와 같은 위선적 속박에 얽힌 삶이 이 이야기에서 비칩니다.
가난한 여인의 삶은 단순합니다.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가난으로부터’(ek tēs hysterēseōs, out of poverty)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부유함으로부터’(ek tou perisseuontos, out of overflow) 출발한 삶은 단순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 율법학자입니다. 본문 38-40절에서 율법학자의 특징을 여섯 가지로 묘사하는데, 그것의 종합은 위선입니다. 삶을 복잡하게 꾸미지만 결국 거짓입니다. 거기에 생명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율법학자의 모습과 멀지 않습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말했다는 세상의 일곱 가지 죄악이 그것입니다. ① 노력 없는 부 ② 양심 없는 쾌락 ③ 인격 없는 지식 ④ 도덕 없는 상업 ⑤ 인간 없는 과학 ⑥ 원칙 없는 정치 ⑦ 희생 없는 기도. 이러한 것들로 복잡하게 헝클어진 삶은 본질적인 삶의 과제를 향해 육박해 들어가기보다 형식과 제도에 속박되어 마땅히 해야 할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만들곤 합니다.
여섯 가지의 모습으로 자기를 꾸몄던 율법학자는 과연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무엇을 얻었을까요? 그는 정말로 풍요와 존경을 얻었습니까? 우리는 가난한 가운데 가진 것 모두를 털어 넣은 과부의 모습에 주목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것은 천국이 ‘마음이 가난한 자의 것’이라는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 5:3)
우리는 묻곤 합니다. 길을 잃은 용기가 다시 삶의 여행을 꿈꿀 수 있을까? 실패한 사랑이 다시 힘을 내어 일어설 수 있을까? 사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동안 그러한 꿈을 꾸며 살아왔고, 오늘도 자신을 한 번에 바쳐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구원코자 하는 삶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당나라 시절 중국에서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혜능의 가르침, 단박에 깨닫는 믿음]
중국 당나라 때 혜능(638-713)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산에서 나무를 해서 장터에 팔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청년이었습니다. 가난한 처지였기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했는데, 어느 날 나무 배달하러 갔다가 누가 경전을 읽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끌려서 찾아갔습니다. 그것을 읽던 사람이 말하길, 동선사라는 절에 홍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대사가 계시는데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면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혜능은 고민을 하다 결국 어머니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삼십여 일을 걸어 홍인대사를 찾았습니다. 일천 명이나 되는 문하생을 둔 중국 선종의 5대 조사인 홍인이 이 혜능을 보고 하는 말씀이, “네가 영남 사람이면 오랑캐인데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혜능은 “사람은 남과 북이 있지만 불성(佛性)에는 남북이 없는 것이니 어찌 오랑캐의 몸이라고 하여 차별이 있겠냐”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해서 혜능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가 맡은 역할은 부엌데기였습니다. 장작을 패고 물 긷고 밥하는 일을 하던 중에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중요한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홍인대사가 자신의 법통을 이어갈 6대 조사를 찾기 위해 각자가 깨달은 바를 시로 적어내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 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적임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홍인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운 신수(?~706)가 바로 그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측천무후의 초청을 받아 궁궐로 들어가서 황제가 먼저 예를 올리는 대접까지 받은 인물이 될 사람인데,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인물도 빼어나서 귀인의 모습을 갖춘 상류층 사람이었습니다. 13세에 출가해서 벌써 수십 년을 닦아 왔으니 그의 깨달음의 경지는 다른 사람들과 견줄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대대로 스승의 뒤를 이을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한 신수는 스승에게 게송(偈頌)을 지어 바치려고 합니다.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나흘 동안 13번이나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남쪽 복도 벽에 자신의 마음을 다음과 같은 게송에 담았습니다.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 :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心如明鏡臺 (심여명경대) : 마음은 밝은 거울 바탕일세
時時勤拂拭 (시시근불식) : 때때로 털고 부지런히 닦아서
勿使惹塵埃 (물사야진애) : 먼지 끼거나 때 묻지 않도록 하세
그것을 읽은 스승이 신수를 불러 말합니다. “네가 지은 게송은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겉만 훑은 것이니 다시 지어서 내거라.” 신수는 절하고 물러나왔지만 게송을 더 짓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 소식을 부엌데기 혜능이 전해 듣습니다. 그는 비록 가르침을 받지 않았지만 일찍이 대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게송을 지어 바칩니다. 글을 쓸 줄 몰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서 쓴 시는 이랬다 합니다.
菩提本無樹 (보리본무수) : 깨달음에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非臺 (명경역비대) :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닐세.
本來無一物 (본래 무일물) : 본래 물건이라 할 것이 없으니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 어느 곳에 먼지 일고 때가 낄 것인가
홍인대사는 이 글이 본질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시기해서 혜능을 해칠까 염려하여 그 게송을 문질러 없애고, 사람들의 의심이 그친 날 밤에 조용히 와서 설법을 전수하고 후계자로 삼았다고 합니다. 육대 조사가 된 혜능은 나중에 남쪽 조계산으로 가서 가르침을 폈는데 이것을 남종선, 조계선이라 불렀고, 그것이 신라시대에 우리나라로 전해져서 지금의 조계종 선맥으로 이어졌다 합니다.
이 이야기는 깨달음에 관한 문제를 밝혀주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신수와 혜능의 이야기는 깨달음과 삶의 방식의 차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중에 북종선을 이끈 신수는 사람들의 마음에 먼지가 끼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것을 닦아야 성불에 이른다고 말하는 점진적인 각성의 길을 주장했고, 혜능으로 대표되는 남종선은 성불하는 길은 번잡한 형식을 거쳐서 가는 것이 아니라 단박에 도약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미혹됨과 깨달음이란 한 생각 차이이며 스스로가 본심을 깨닫기만 하면 누구나 부처로 도약한다는 생각을 대변합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혜능이 말한 단박의 도약과 연결됩니다. 시대의 율법에 묶인 정신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해방시켜서, 사랑과 정의가 넘치는 하나님나라를 단박에 꿈꾸도록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 크고 작은 도약의 경험이 기독교 신앙의 실존을 구성합니다.
오늘 히브리서 본문이 증언하는 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형식적으로 반복되는 대제사장의 거룩한 행위로는 하늘에 가닿을 수 없고, 자신을 바친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행위가 하늘 문을 연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삶은 어쩌면 너무 많은 계획과 염려로 얼룩져있는지 모릅니다. 믿음과 사랑이 승리하는 삶을 위해 낮아지고 가난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절을 지나는 오늘 전태일을 추모하며 그의 믿음을 갖기를 다짐하는 진실한 마음일 것입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그리스도는 자신을 바쳐 하늘의 뜻을 보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의 용기와 사랑을 따라 살아갑니다.
세상의 무게를 딛고 일어서는 믿음의 도약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