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하나님나라 | 김희헌 | 2018-12-02

by 김희헌 posted Dec 02, 2018 Views 30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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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하나님나라 (33:14-16, 살전 3:9-13, 21:25-36)

2018.12.02 (대림절 첫째 주일)

 

[대림절과 발선(發善)의 복음]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 교회력으로는 새로운 해의 시작입니다. 대림절을 맞은 신앙인은 예수가 자기 안에서 다시 태어나도록 그리스도를 삶의 가장 깊은 곳에 모시고자 합니다. 그리스도를 모신다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요, 사회적 차원에서는 역사의 어둠을 뚫고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평화가 깃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삶에 강림하는 그리스도가 되었든, 역사를 뚫고 다가오는 하나님나라가 되었든, 그 기다림 속에는 모종의 어둠과 절망의 경험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지난 삶에서 여러분의 영혼을 꺾어버렸던 어둠과 절망은 무엇이었습니까?

지난 화요일에는 한 포럼에 참여하여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평화신학을 주제로 삼은 그 포럼의 발제자는 새길교회의 한완상 장로님이었습니다. 한 선생님이 던진 화두는 발선(發善)의 복음이었습니다. ‘발선이라는 화두에는 어두웠던 지난 시대의 경험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복음이 분단시대를 살아오는 한국사회에서 ()을 생산하는 발악(發惡)’의 기능을 했다는 실토입니다. 한 선생님은 이제 발악의 복음을 떨쳐내고 발선의 복음으로써 교회와 신앙을 새롭게 하자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현재 한반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탈냉전의 흐름은 역사가 재창조되는 전환의 시간인 카이로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국교회가 증오와 대립을 부추기는 발악(發惡)적 분단신학을 떨쳐내고, 화해와 용서를 실행하는 발선의 평화신학을 실행하자는 것입니다.

평화를 구축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런가요? 악에 대한 비판이 부족해서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악에 대한 비판은 우리 주변에 넘쳐납니다. 문제는 선을 행하는 사람이 부족한데 있습니다. 사회 곳곳이 발악적 문화에 감염되어 있어서, 그것을 뚫고 선을 도입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역사가 어두운 것입니다. 신앙공동체의 어려움 또한 그렇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짓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발선의 복음을 품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발선의 복음을 품은 사람은 예수의 복음이 충동질하는 대로 선()을 실행하는 발선으로써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지어갈 것입니다. 그것은 변혁의 길을 평화로써 열어가는 것입니다.

발선의 복음이 요청하는 것은 선제적인 사랑실천입니다. 용서와 사랑, 낮춤과 비움, 따뜻함, 겸손한 확신, 자상한 섬김, 평온한 초대,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발선의 복음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절실히 요청됩니다.

한국 사회는 남과 북에 독자적인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이후, 지난 70년 동안 분단이 제도화된 ‘48년 체제를 살아왔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이 ‘48년 체제속에서 성장해왔고, 안타깝게도 역사의 숙명을 반공과 반북주의 편에서 살아왔습니다. 교회를 주도했던 신학은 ‘48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이데올로기로 물든 분단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복음과 상관이 없는 반공주의가 신앙인들의 내면을 규율해 왔습니다. 그 결과, 많은 교회가 극우주의의 보루처럼 기능하면서 분단시대의 적폐로 전락했고, 이제는 교회의 존재 자체가 기독교 선교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반도에 진행되고 있는 화해와 탈냉전의 흐름에서 필요한 복음은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합니다. ‘발선의 복음이 힘을 내야 합니다. 발선의 복음이 우리를 물들여서 증오와 대립으로 얼룩진 마음을 씻어내야 합니다. 복음의 발선을 실행함으로써 화해와 평화의 습관을 도입해야 합니다.

 

[절망의 시대 한 가운데 핀 약속, 예레미야 3314-16]

대림절 첫째 주일에 교회가 읽은 제1성서의 본문은 예레미야서입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주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이 패망하던 시절에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는 민족의 명운이 저물고, 민중들의 삶이 극심한 고통에 빠진 때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모든 것을 목격했던 눈물과 탄식의 예언자’(4:19, 8:18-19, 20:17-28)입니다.

예레미야가 긴 침묵을 깨고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때는 유다 왕국이 소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린 절망적인 시기였습니다.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왕 요시아가 이집트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그 뒤를 이은 왕들은 제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폐위되거나 봉신이 되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급기야 신흥제국 바빌론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매 맞으며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 감옥에 갇히고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 그들은 좌절 속에서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절망에 빠뜨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희망의 부재(不在)지요. 참혹한 현실 자체보다 도대체 희망이 없다는 것에 그들은 몸을 떨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커다란 악을 경험한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만일 희생할만한 가치를 가진 진리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인간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절망시키는 것은 자신의 분투가 의미를 잃을 때입니다. 절망이란 하늘의 기미조차 땅에 없을 때 생겨납니다. 하나님을 잃은 영혼, 그리스도가 없는 몸짓에 절망이 깃듭니다.

모두 52장으로 구성된 예레미야서의 중심 메시지는 정의가 없는 세계는 반드시 패망한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용서와 회복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대목이 있는데, ‘위로의 책이라 불리는 30~33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위로의 책클라이막스에 해당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 주의 말이다. 보아라,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약속한 그 복된 약속을 이루어 줄 그 날이 오고 있다. 그 때 그 시각이 되면, 한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서 돋아나게 할 것이니,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33:14-15)

예레미야서는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보충을 거쳐서 현재의 형태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예언을 실제로 들었던 사람은 패망하던 당시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윗 왕조의 회복이라는 형식으로 구원을 말합니다.

이미 파괴되어버린 다윗 왕조, 그 가지에 의로움이 깃들 것이라는 약속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레미야는 다윗 왕조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3:6-10, 7:1-15, 21:11-12) 따라서 예레미야의 이 예언은 낡고 부패한 왕조질서의 복귀에 관한 약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이라기보다는 선포요, 기대라기보다는 고백에 가깝습니다. 절망의 세계를 일으켜 세울 공평과 정의에 관한 선포요 고백입니다.

하늘의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 어두운 세계에 하나님나라가 임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황량한 역사의 빈들에 평화의 구세주에 관한 소식이 들려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들은 모두 절망의 자리에 있지만 희망으로 가는 길목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질 날을 기다립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거처를 이름하여 주님은 우리의 공의, 야훼는 우리의 체다카라고 부를 것이라고 외칩니다. 그것은 참혹한 제국의 질서 속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서고 있는 복음의 발선, 절망의 시대에 피어난 발선의 복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원하는가? 누가복음 2125-36]

금년 대림절 첫째 주일 복음서 본문은 불길한 징조에 대한 묘사로 시작됩니다. 아기 예수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전체제와 맞서고 있는 예수의 파멸에 관한 선언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서 징조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서 괴로워할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올 일들을 예상하고 무서워서 기절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dunameis)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5-26)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파멸과 분노의 날로 묘사하는 예언자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이사야 13:6-11, 요엘 2:30-31) 만일 하나님나라가 이런 모습으로 온다면 아마도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만일 그런 것이 구원이라면 원치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듯이그것은 피할 수 없고,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왜 오랫동안 대림절 첫 주에 묵시록과 같이 무거운 성경본문을 읽어왔을까요? 저는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왜 아기 예수 탄생이라는 낭만적이고, 크리스마스 캐럴에 맞는 흥겨운 소식이 아닌 묵직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스스로 묻게 되었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정말 우리에게 좋은 일이 벌어질 것인가? 우리는 정말로 메시아를 기다리는가? 우리는 정말로 현재와 같은 삶을 걷어치워야 하는 하나님나라가 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가?

약 백 년 전에 독일민중과 함께 살았던 위대한 설교자가 한 명 있습니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1842~1919)입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민중들의 삶에 충실한 목사였습니다. 아버지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치유하는 목회에 헌신적이었고, 그의 삶과 믿음에는 복음의 생명력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아들 크리스토프는 아버지의 영감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하나님나라를 향한 기독교의 믿음이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되고 사유화되는 당시의 신앙풍토에 대한 환멸이 자라났습니다. 그는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된 복음의 현실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급기야 목회를 접고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의원 생활을 6년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정치는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결국 더 절실한 마음을 안고 교회로 돌아오게 됩니다. 사회적 복음에 헌신하고자 했던 그의 신학은 당시 일어나던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적 좌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향한 열망이었습니다.

그의 설교문이 최근에 책으로 나왔는데, 그 책의 서평을 부탁받아 쓰게 되었습니다. 책의 제목은 [행동하며 기다리는 하나님나라]입니다. 저는 그 책을 읽는 동안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외침은 제가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있기보다는 얼마나 기독교 종교의 굴레에 갇혀 있는지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말해왔지만 실은 오늘날의 교회현실에 대해서 깊은 열패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블룸하르트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나라의 꿈을 잃고 단지 종교로서 존립하는 기독교는 이미 죽은 것이다! 니체와 동일한 시대를 살았던 블룸하르트는 신이 죽어버린 현실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위해 하나님을 죽인 당시의 교회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종교 자체가 인류 역사에서 장애물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신앙인을 제도에 갇힌 이교도로 만들고,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박제화 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단지 기독교 시대의 도래로 본다면 그것은 착각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원하는 것은 우리들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고, 단체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쏟는 기독교의 열심이 얼마나 인간적인 것들에 의해서 유지되는지를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차라리 종교에 관한 우리의 사역들을 실패하도록 두면 하나님의 역사가 보다 더 분명하게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종교 제도를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와 능력이 우리 삶에 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종교로서 유지될 수 있는 제도와 경전을 숭상하기보다는 하늘을 섬기는 사람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예수운동을 위해 세워진 신앙공동체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관심이 변경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적인 현실을 생생하게 유지하기보다는 기독교라는 제도종교에 익숙해졌습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고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삶을 사는 성도들의 현실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일요일의 종교로 전락한 신앙 때문입니다.

일정한 종교적 습관에 익숙한 사람들이 그들만의 친교와 안락한 형식신앙을 즐길 뿐, 서로 격려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공동체를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았다는 안도감 속에서 스스로 속이는삶에 익숙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 세상을 이길 수 없는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블룸하르트는 이렇게 묻습니다. 천국에 대한 감언이설로 비위맞추는 종교가 당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인가? 만일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단지 교단과 교리와 교회의 하나님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어려움과 궁핍과 두려움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하늘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는 증거는 그런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격려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림하는 예수 그리스도, 다가오는 하나님나라는 우리에게 축복이 아니라 심판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παγίς, trap)이 되어 너희에게 닥치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있어라!고 말합니다.

 

[분투하는 교회를 위한 세 축복, 데살로니가전서 39-13]

우리가 읽은 데살로니가전서는 사도바울의 첫 번째 편지이자 신약성서 가운데 맨 처음 기록된 문서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초대교회의 분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역을 여행하며 신앙공동체의 씨앗을 뿌리는데, 오늘 본문은 그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세 가지 축복(benediction)을 빕니다.

첫째는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11절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길을 친히 열어 주셔서, 우리를 여러분에게로 가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바울의 이 간구에 힘입어, 저도 우리들이 서로 향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길을 열어주시기를 빕니다.

둘째는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풍성한 삶에 관한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12)

셋째는 다가오는 하나님나라를 향하고 있는 믿음에 대한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자기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13)

하나님나라와 세상 사이에는 절대적인 차이와 간격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속에 하나님나라가 탄생한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가 오시는 이유도 우리를 저 세상의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블룸하르트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의 모든 소망이 천국에 가기 위해 이 땅을 벗어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도리어 이 땅의 죄와 사망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요, “또 만일 이 땅의 삶을 운명이라고 체념하며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리라는 소망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 193)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오기 위해 길을 내고 있는 하나님의 분투입니다. 들어야 할 것은 이 땅에 거룩한 생명을 계시해주는 하나님나라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것을 듣고 보는 사람이 진리의 종이 된 사람이요, 그들의 심령에 죽음의 문화와 질서를 이겨낼 수 있는 새로운 마음가짐,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감각,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이 태어납니다.

이 세계를 배회하는 죽음은 단지 죽어버린 무엇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체로서 파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우리를 새롭게 지어내기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입니다. 편안한 기독교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기다림과 순종입니다.

오늘의 위기는 구조악 자체나 악에 대한 비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선의 결핍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블룸하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특별한 영성을 개발하여 각양각색의 모습을 가졌다 해도, ‘단순하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내려놓는 기다림과 순종'을 배우지 못하면 신앙의 의미는 없습니다. 신앙의 큰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까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미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삶 곁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 삶에서 태어나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복음이 생생한 현실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성취욕이 앞선 조급함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단지 우리들의 정열이나 노력을 통해서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바라는 온유한 자들의 간절한 기다림을 타고 올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어려움과 궁핍과 두려움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하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대림절의 축복이 모두에게 있기를 빕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다가오는 하나님나라를 향해 마음을 여십시오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찾아오시는 예수님, 우리를 새롭게 지어내실 주님을 기다리고 영접 하십시오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그 삶을 풍성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