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계보는 이어지고 있는가? | 이성환 | 2018-11-25

by 이성환 posted Dec 04, 2018 Views 21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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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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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계보는 이어지고 있는가?

 

사무엘기하 23:1-7, 요한계시록 1:4b-8, 요한복음서 18:33-37

 

오늘은 11월 마지막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는 이번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에 해당됩니다. 대림절을 시작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고요. 그래서 11월의 마지막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주일로 지키는 기독교 전통이 있습니다. 독일교회의 경우에는 한 해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제가 있었던 교회에서는 교회생활반성의 날로 지키기도 했습니다. 한 해 교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돌아보고 대림절로 시작되는 새해 절기를 새로운 마음으로 맞이하자는 것이죠.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연말이라고 생각하면서 맞이하는 것과 이제 새로운 시작이라고 여기며 맞이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뭐 바삐 돌아가는 일상에서 교회력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야 없겠습니다만, 이 시간 한번쯤 한 해를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를 가장 먼저 맞이할 준비를 하는 곳이 요즘은 백화점이 되어 버렸습니다만 이 추워져 가는 계절에, 이 땅에 평화의 왕 아기 예수를 고대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지, 어떤 이들이 아직도 이 추위를 견디며 거리에서 고통 받고 있는지 우리 주변을 기민하게 살펴보는 우리 신앙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약속, 하나님의 약속]

 

저는 오늘본문을 다윗 왕에서부터 예수까지 이어지는 계보의 관점으로 살펴봤습니다. 아다시피 소위 예수의 족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둘을 살펴보면 하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까지 내려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형태이고 누가복음에는 예수에게서 아담으로 올라가는 상향식 족보로 되어 있습니다. 등장인물도 다릅니다. 요셉의 계보와 마리아의 계보라고도 합니다만 두 복음서 모두 공통의 목적은 예수가 아브라함으로부터, 혹은 아담으로부터의 계보를 잇는 적자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을 보면 다윗에서부터 그 언급이 시작되니 다윗에서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제1성서 본문인 사무엘기하 23장과 시편 132편을 보면 둘 다 다윗과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린 축복에 관한 것입니다. 132편 11절에서 12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셨으니, 그 맹세는 진실하여 변하지 않을 것이다. 네 몸에서 난 자손 가운데서, 한 사람을 왕으로 삼을 것이니, 그가 보좌에 앉아 네 뒤를 이을 것이다. 만일 네 자손이 나와 더불어 맺은 언약을 지키고, 내가 가르친 그 법도를 지키면, 그들의 자손이 대대로 네 뒤를 이어서 네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사무엘기하 23장 5절에도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만사에 아쉬움 없이 잘 갖추어 주시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어찌 나의 구원을 이루지 않으시며, 어찌 나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내용은 다윗을 시작으로 왕좌의 계보를 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이점도 보입니다. 시편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만일 네 자손이 나와 맺은 언약을 지키고 내가 가르친 법도를 지키면’이라는 조건이 이행될 때 다윗의 자손들이 그 왕좌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약속입니다. 

 

시편 132편에는 ‘내가 가르친 법도를 지키면’이라는 조건, 전제가 깔린 축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사무엘기하 23장 5절 본문에는 ‘하나님 나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조건부가 사라졌습니다. 다윗왕조의 기틀과 앞으로의 전망은 하나님께서 무조건 보장해 주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시편은 하나님께서 가르쳐준 법도, 계명을 잘 지켜 행하면 다윗의 왕권과 그 왕조의 전통은 계속될 것이라는 조건부의 축복이고 사무엘기하 본문의 축복은 하나님과 다윗이 직접 맺는 계약으로 인해 다윗과 그 왕조에 내리는 무조건적 축복인 것이죠. 

 

신학자들은 이러한 차이를 초기의 왕정신학과 후기의 신명기 신학의 차이로 봅니다. 다윗왕정의 초기에 다윗은 왕정신학자로 하여금 역사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다윗과의 계약관계를 시편 132편에 나온 조건부로 서술했다는 것이죠. 반면 후기 신명기 사가들에 의해 물론 다윗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봐야겠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조건부 약속을 하나님과 다윗의 계약으로 바꿔놓았다는 것입니다. 화자도 다릅니다. 시편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행하면 왕좌를 대대손손 물려주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이고 사무엘하는 다윗 스스로가 “내가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으니 나는 위대하다,” 자찬하는 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의 계약의 내용 중 이행해야할 의무조항을 삭제하고 축복의 내용만 남겨두었다면, 이것은 스스로를 미화하려는 권력이 갖고 있는 습성이라고 밖엔 해석할 도리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기하의 내용을 보면 다윗이 왕위에 오른 이후 여러 우여곡절의 이야기들이 즐비합니다. 밧세바와의 스캔들도 그렇고 자녀들 간의 끊임없는 왕권다툼,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다 죽임을 당한 아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굴곡 많은 이야기 후에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기하 23장의 내용이 쓰였다는 것인데, ‘인생의 황혼기에 일생을 반추하며 내 인생에 고난도 많고 좋은 일도 많았지만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감사하다.’ 이런 내용이어야 옳지 ‘하나님께서 나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으니 어찌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으시랴?’ 이것은 뻔뻔함의 정도가 지나친 것이죠.

 

실제로 다윗 왕조가 이어집니까? 남북으로 분단이 되고 각각 차례로 열강들에 의해 패망하는데 이걸 다윗이 말한 그 언약이 이행되었다고 봐야 할까요? 구지 답변을 드리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윗이 말한 왕좌의 계보는 이어지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구원사는 계속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로부터 갱신된 하나님의 구원사]

 

오늘 요한복음에 나오는 빌라도와 예수와의 심문내용을 보면 예수가 왕이냐 아니냐에 대한 공방이 나옵니다. 오늘 제2성서 본문인 요한복음에 보면 빌라도가 묻습니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 그런데 여기서 이 질문을 하는 빌라도의 어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문에 내용을 직역하면 이겁니다. “네가 왕이라며?” “사람들이 그러던데, 그러니까 네가 왕이라는 거잖아?” 

 

매우 예의 없이, 그야말로 심문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 내용은 예수가 왕이라고 했는지 안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왕일 수가 없죠.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이고 예루살렘은 총독이 직접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있던 갈릴리에는 유대 영주를 세워 대리통치하는 반식민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사회정치적 시스템에서 왕이 웬 말입니까? 

 

그럼에도 빌라도는 예수에게 반역죄, 반란죄 이런 혐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겁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예수의 죄는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절에 보면,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죄를 이렇게 명시합니다.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긴 유대인들이 그렇게 고발을 했다는 것인데,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스스로를 왕이라 했다면 반란죄가 성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내는 다르죠. 유대인들 특히 예수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유대 지도층들의 본심은 예수가 왕을 참칭해서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권위가 손상되고 자신들이 쌓아놓은 카르텔, 종교권력과 성전 안에서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이윤 창출의 구조에 예수가 재를 뿌렸기 때문입니다. 즉,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성전종교의 시스템에 예수가 균열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빌라도의 물음에 결국 예수는 “그래 네가 말한 대로 나는 왕이다.” 이렇게 답했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빌라도가 말하는 왕과 예수가 말하는 왕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빌라도는 세속적인 왕과 예수는 거룩한 왕, 이런 것처럼 다른 차원의 왕을 가리키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는 저 멀리 구름너머에 존재하는 영적공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는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바 있죠. 그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만 시간의 개념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장차 올 나라의 왕이니 ‘그래, 내가 왕이다.’ 이런 맥락으로 이해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미래권력인 것이죠. 사후생, 구름 위에 떠있는 왕국, 하나님 나라는 그런 이미지 보다 하나님의 정치가 보편화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추상적인 이미지는 머릿속에서 지우시는 게 좋겠습니다. 

 

심방용상, 예배상이라고 하나요, 대개 그런 상에 그려진 그림을 기억하십니까? 구름위에 예수가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고 저 멀리 왕국이 보이는 그런 그림이죠. 성서에 대한 교조적 해석에 바탕을 둔 성화나 이콘의 부작용이 그런데 있지 않을까요. 사람의 사고를 가둡니다. 상상의 범위를 한정짓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자유인으로 살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한 계보는 이어지고 있는가?]

 

예수는 이미 빌라도와의 대화를 통해 이 땅에,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이곳에 하나님 나라가 미래로부터 개입해 들어오고 있음을 선언했습니다. 예수는 미래권력입니다. 미래로부터 우리에게 들어오고 있는 그 나라의 왕입니다. 그러면, 현실에 있는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 권력을 잘 맞이하기 위한 준비, 보다 빨리, 한 순간이라도 먼저 그 권력을 맞아들이기 위한 노력,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다윗으로부터 시작되는 거룩한 계보는 이스라엘 역사의 굴곡에 의해 훼손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에 의해서 갱신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로부터 새롭게 갱신된 그 거룩한 계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우리에게, 이 교회 공동체에 그 계보를 이어가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정치가 이 땅에서 실현되는 세상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가, 하나님이, 이 세속권력의 주인이 되는 세상, 이런 것을 꿈꾸며 도발적인 모험을 감행하는 그런 공동체가 되는 것은 어떻습니까? 

 

예수가 이 땅에서 이루고자 했던 꿈을 법으로 만들고 제도화하고 시스템화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만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면 다시 엎고 새로 세우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권력은, 교회는 계속 갈 것이고 그렇지 못한 권력과 교회는 하나님의 철퇴를 맞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가다보면 언젠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완성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숙명이라고 믿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8절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예수로부터 새로이 전승된 거룩한 계보를 이어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