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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사람,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 | 김희헌 | 2019-01-13

by 김희헌 posted Jan 13, 2019 Views 42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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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1-13

사람,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 (43:1-7, 8:14-17, 3:15-17,21-22)

2019.01.13 (주현절 2)

 

주초에 하늘뜻펴기를 준비하며 성서를 묵상할 때는 맘이 무거웠습니다. 파인텍 노동자들이 굴뚝에서 사백이십 일을 보내다가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 몸부림이 투쟁이라기보다는 이 사회를 향한 항변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것도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물음처럼 들렸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노사협상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에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지만, 75미터 높이의 굴뚝에서 그 오랜 세월을 견디느라 앙상해진 몸으로 내려온 두 사람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긴 시간의 저항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얻은 합의사항이 회사가 노동조합 활동을 인정하고 법정 노동시간을 준수하는 등의 노동법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면, 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얻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말이겠습니다.

회사가 마지못해 합의한 사항 가운데에는 최저임금보다 천 원 많은 기본급을 주면서, 고용기간 3년 이상을 보장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 정도의 합의를 해주는데 그런 긴 시간을 기다렸다는 것은,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태만과 기만을 일삼는 가진 자들의 악습이라고 밖에는 해석되지 않습니다.

이번 파인텍 노동자들의 행위는 강성노조의 끝장투쟁이 아니라, 회사의 편법과 거짓말에 시달리다가 겨우 다섯 명 남은 노조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해 마지막까지 길을 걸어간 인간실험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800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일하던 회사가 파산한 틈을 타서, 회사를 헐값에 매입한 후 분할매각을 하여 차익을 얻으려고, 노동자들을 일터에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비정한 먹튀 자본을 방관할 수 없다는 양심의 저항이라고 하겠습니다.

결과적으로 다섯 명의 노동자들이 무사히 일터로 돌아갈 수 있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또 그들을 여러 모양으로 지켜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이 있어서 희망입니다. 다시 한 번 사회를 고통에 빠뜨리는 것도 사람이지만, 역사에 희망을 주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을 경험하는 기회였습니다.

두 명의 노동자가 하늘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426일을 지냈는데, 그 맘은 어땠을까요? 날마다 그들의 마음을 채웠던 것은 아마 분노보다는 고독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고독은 외면당하고 있다는 심리적 결핍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심장을 뚫고 나올 진리와 성실에 대한 기대와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는 매일의 갈등을 안고, 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인간애가 과연 우리 사회에서 성장할 수 있는지를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고독은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 당하던 예수의 고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의 눈으로 그 고독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번민이요, 철학의 눈으로 보면 인간에 대한 감각의 진화를 모색하는 영혼의 갈등이며, 정치의 눈으로 보면 세계 시민으로 성장하자는 인류의 연대를 향한 호소입니다.

그것들 모두가 일종의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이전 세계의 낡은 틀을 벗어나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드럽게 말하자면 그 도전은 보편적 인류애를 증진시키려는 것이요, 엄밀하게 말하자면 힘이 없는 사람들, 돈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밟아도 되는 벌레 취급하는 세상을 끝내자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신의 자취가 사라진 세계, 하늘이 깃들만한 인간을 잃은 사회는 불행합니다. 그런 세계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벽에 뭉개도 될 메뚜기로 취급하며, 단지 두 발 달린 짐승처럼 여깁니다. 이런 매정한 표현은 이스라엘 총리 베긴이 억압정책을 펴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해서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천민자본주의 세계에서 노동자들이 당하는 취급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절망의 시대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거기에 굴뚝에 오른 노동자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고민이 있습니다.

이웃과 형제가 벽에 뭉개도 될 메뚜기취급을 당할 때,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고통과 저항을 노래한 민족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Mahmoud Darwish)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 말이 밀알일 때 나는 대지가 되고, 내 말이 분노일 때 나는 폭탄이 되며, 내 말이 바위일 때 나는 강물이 된다. 그러나 내 말이 꿀로 변할 때 내 입은 파리 떼로 덮이게 된다.”

민중들의 슬픔과 고통을 노래하는 시인을 갖는 것은 어느 한 시대의 운명을 정의롭게 이끌어줄 예언자를 갖는 것과 같습니다. (박혜영, 느낌의 0, 123) 성서에 그와 같은 예언자로 포로기 기대를 살아간 제2이사야가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에는 그의 목소리가 담겨있습니다.

 

[누구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인가, 이사야 431-7]

이사야서 43장은 구원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독백과 같은 예언입니다. 그 내용은 다분히 맹목적인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해가 많은 구절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을 향한 일방적인 구원의 약속을 담은 이 노래는 다른 민족을 향해서는 저주의 언어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수천 년이 흐른 후에 편협한 시오니즘 위에 세워진 이스라엘은 이 예언의 노래를 저주의 언어로 바꾸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멸절시키는 데 활용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려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예언의 청중이 단지 누구였는가 하는 것보다, 그들이 어떤 처지에 놓였을 때 이런 구원의 약속이 들려졌는지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 4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는 목의 가시처럼 걸리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지요.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너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내주고, 너의 생명을 대신하여 다른 민족들을 내주겠다.

이 맹목적인 사랑의 언어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질 경우, 우리는 이 본문에서 배타적 종교의 독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포로민이라고 하는 극심한 고통과 절망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언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이 예언이 인간의 존엄에 관한 최후의 보루로서 기능하는 하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43:1b-2)

이 말은 백척간두의 위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지, 뱃속 편한 사람들의 보다 큰 안락을 위해 주어진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노예가 된 사람들을 향한 신의 사랑고백입니다. 고백은 편협한 도덕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정의를 되찾으려는 깨어난 종교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집트를 속량물로 내주어 너를 구속하겠고, 너를 구속하려고 너 대신에 에티오피아와 쓰바를 내주겠다.” 이 말은 아힘사’(ahimsa)라고 하는 비폭력 정신의 가치를 미처 깨닫지 못한 저급한 종교의 한계를 드러낸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망이 일상이 된 포로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의도적인 편향을 표현하는 예언의 심정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신의 목소리를 담은 이 선언은 폭력에 짓밟힌 포로들을 보배롭고 귀하게여기는 반면, 폭력을 저지른 제국을 정의의 제물로 삼겠다는 무서운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좀처럼 변하지 않고, 포로들에게 가까운 감정은 절망입니다. 그러한 때에 절망이라는 것이 아예 나쁜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세상이 너무 어두우면, 역설적으로 처절한 절망이 오히려 숨통과 같은 기능을 합니다. 삶이 너무 버거워서 살려고 애쓰는 몸부림마저도 감당하기 힘들 때 생겨나는 절망은 삶의 방향감각을 잃은 이들의 영혼에서, 살려고 버둥거리는 몸부림의 무게를 덜어내줍니다. 그 무게가 줄어들 때, 놀랍게도 여명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절망의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은 어디서 올까요?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에게 희망은 자기 안에서 시작되지는 않습니다. 시인처럼, 예언자처럼 하늘의 목소리로 위로와 저항의 노래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을 때, 절망의 사람도 생명의 불씨를 살려갈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에서 외치는 예언자처럼, 북쪽을 향해서 그들을 놓아주시오하고 외치고, 남쪽을 향해서 그들을 붙들어 두지 마시오하고 외치는 존재가 있다면,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절망 너머의 무언가를 꿈꿀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뜨거운 맘을 가진 신이 자신들을 먼 곳에 있어도 부르는 아들처럼 여기고, 땅 끝에 있다고 할지라도 찾아 나설 딸처럼 여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포로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절망의 시간을 견딜 수 있을 지 모릅니다.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높은 하늘 꼭대기에 올라 처절한 몸부림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같이 목숨을 걸고 동조단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당신들이 선택한 길이 틀린 것이 아니라며 기도를 드리고 노래를 부르며, 오체투지와 함성으로, 희망버스와 지지방문으로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비참에 처한 고독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절망이 마지막 언어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하늘의 노래이자 예언이 됩니다.

이런 예언이 현실화 될 때, 지배와 피지배의 구도가 뒤바뀌게 됩니다. 본문의 마지막 7절은 그것입니다. 한글성경 시작문구의 번역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는(calling) 나의 백성이 아니라, 원문대로 하면, ‘나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은(called) 모든 사람(kōl)’ , ‘나의 영광을 위해서 지어졌고, 내가 빚어서 만든 사람’, 하나님은 그들을 찾습니다. 이 부름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 우리 시대에 하늘의 영광을 위해서 지어진 사람, 하나님이 빚어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요?

 

[위태로운 곳에 부어진 성령, 사도행전 814-17]

사도행전의 본문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도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사도들을 통해서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세례는 받았어도 성령은 받지 못했다는 본문의 서술이 여러 신학적인 주제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신학적 문제보다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이 처음으로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을 넘어서 전파된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복음을 사마리아 땅에 전한 빌립과 그를 따른 시몬이라는 마술사의 이야기(8:9-25)로 본문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건을 다룬 본문 이야기는 그렇기 때문에, 더 큰 맥락에서 봐야합니다. 그러면 이 성령강림의 사건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삶이 돈에 속박된 문화에서 비롯된 위기입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스데반이 박해로 죽음을 당한 이후 각처로 흩어진 사람 가운데, 빌립이라는 집사는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중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치는 등 그 성에 기쁨을 전하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에는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스스로 큰 인물인 체 하는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빌립이 하는 일을 보고 놀라서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오늘 본문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사도들을 통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것을 본 마술사 시몬이 사도들을 찾아가서, ‘돈을 내고, 자신에게 그런 능력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18-19)

그러자 한 사도가 그를 책망합니다. 그 사도 역시 본래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스승으로부터 반석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은 베드로입니다. 그가 아직 깨우치지 못한 또 다른 시몬에게 말합니다. 성령을 돈으로 사고파는 종교기술처럼 여기는 것이 얼마나 악독한 생각인지, 그것은 불의에 얽매인것으로서 회개와 용서가 필요하다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그러자 마술사 시몬은 즉시 깨우칩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마술사 시몬은 아직 성령이 내리지 않은 시대에는 유익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시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로 추앙받았습니다. (10) 그는 마술로서 사람들을 사로잡아 자기 뜻대로 부리는 능력을 가졌고, 그 시대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유익한 존재로 취급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 기술과 자본에 모두 잡혀 먹힌 오늘의 소비문화가 더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문명에는 삶을 돌이키는 깨우침이 없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마술사 시몬이 우리 시대의 자본가들이나 종교기술자들보다 낫다 하겠습니다.

예루살렘의 눈으로 볼 때 이방인의 땅 사마리아는 하나님을 모르고 진리가 없는 곳입니다. 돈이 종교를 수단으로 삼는 위태로운 곳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예루살렘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오히려 합법적인 약탈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루살렘에 새 삶의 공동체가 세워지고 성령이 부어졌듯이, 사마리아에도 성령은 부어집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이 하나가 되어, 서로 이방인으로 여기는 적대감이 사라진 곳에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자 마술로 인간을 현혹하던 세계가 회개하고 변화된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사도행전 본문이 전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누가복음 315-17, 21-22]

누가복음서의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앞부분은(3:15-17) 요한에 관한 이야기요, 뒷부분은(3:21-22)은 예수님의 세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은 겸손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는 다가오는 시대를 위해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세례를 받고 그에게 물을 때, 요한은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그의 바람은 아마도 17절에 나오는 말에 담겨 있는 듯합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정의와 진리가 바로 서는 세계의 도래입니다.

요한의 바람대로 예수가 등장합니다. 복음서 기자 누가는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말하지 않고, 요한이 옥에 갇힌 상태에서 예수가 세례를 받은 것으로 서술합니다. (19-21) 본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군중들(laos)이 세례를 받고 예수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기도를 드리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형체를 입고 (sómatikos, in bodily form) 예수에게 임합니다. 하늘에서는 소리가 울립니다. “너는 내 아들/자손, 내가 사랑하는 사람(agapétos)이요, 너로 인해 내가 기쁘다.”

모두 세례를 받았지만 모두에게 거룩한 영이 임하지는 않았습니다. 기도를 드린 예수에게 임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했던 요한의 기대를 충족하는 이야기는 아닌 듯합니다.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 구별되는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예수는 먹보요 술보였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7:34). 그에게 임한 성령강림의 거룩한 세계는 군중들이 살아가던 로마식민지로부터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기대했던 예수의 삶, 그의 삶을 통해 얻게 될 인류의 보상은 다른 면에서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과 같이, 예수를 통해서 마법처럼 인간을 사로잡는 성령을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한 아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 예수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요한이 기대했던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정의와 진리는 예수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어쩌면 그의 삶 마지막에 올랐던 고독의 십자가, 거기 매달린 그의 고통에 찬 눈동자를 들여다보고서야 비로소 그가 하나님이 사랑한 아들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15:39)

고통에 찬 다른 생명체의 눈망울에서 고통만이 아니라 신성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은 신비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몸이 얽힌 삶의 여건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따라서 겸손한 그 맘에 새 역사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는 심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임하면 새 시대를 여는 손길을 정성껏 펼쳐갈 수 있습니다.

거룩한 영이 임할 때 그 삶은, 한편으로는 깊음을 간직한 영혼의 수면에 파문 하나 일지 않는 고요한 삶이기도 하며, 그와는 반대로 뛰노는 파도를 밟고 잠잠하라고 외치는 격동의 삶이 되기도 합니다. 그 모습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생명의 존엄과 자유를 짓밟는 힘의 질서에 굴복하지 않는 항거가 있고, 역사의 고통 속으로 차라리 들어가겠다는 고독이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비둘기처럼 형체를 입고 임하는 성령을 보게 됩니다.

역사에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가요. 맞습니다. 나는 지금 향린이 간직했던 정신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선교를 위해 삶을 헌신하겠다는 믿음의 다짐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부름을 따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내셨음을 믿으며, 우리가 그 부름을 따를 때 삶의 모험이 비로소 진행된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 모험은 삶을 변화시키는 부르심을 받아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수동적으로 머물지 않고, 자신 스스로가 부르는 사람이 됩니다. 복음에 순종하고 세상의 호소에 귀 기울이는 사람그 자신이 복음을 실현하고 세상을 새로운 곳으로 호출하는 사람이 됩니다. 거기에서 새 세계가 지어지며, 그곳에서 창조주의 손길이 내비치며, 사람의 몸을 입은 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갈 길은 거기에 있고, 이 역사의 방향과 이 민족의 활로도 거기에 있습니다절망의 시대를 넘어가는 사람,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복된 한 해를 우리 모두가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합시다.

 

[파송사]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그 맘에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그는 마법적인 힘을 추구하기보다는 인간의 심장을 뚫고 나올 진리를 기다리며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복음을 따라 살아가며, 그 복음으로 세상을 지어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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