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의 가능성을 꿈꾸는 공동체 | 이성환 | 2019-01-27

by 이성환 posted Jan 29, 2019 Views 30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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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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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의 가능성을 꿈꾸는 공동체 (느 8:1-3,5-6,8-10, 고전 12:12-31a, 눅4:14-21)

2019.01.27 (주현절 4)

 

지난 주 연 이틀 동안 법조인 두 명이 구속되었습니다. 한명은 검사장까지 지낸 변호사이고 다른 한사람은 지난 정권 삼부요인 대법원장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구속된 배경은 조금 다릅니다. 전자는 한 여성검사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그렇게 되었고 후자는 촛불이 만들어낸 사법부 개혁의 일환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은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들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두 사람이 구속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9년 전 성추행사건으로 인해 보복인사까지 당하면서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했던 그녀는 사건 8년 만인 작년에 많은 것들을 잃을 것을 감수하면서 본인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세상에 폭로했습니다. 촛불혁명으로 촉발된 사법개혁 또한 법조인들과 정치인들,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의지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서지현 검사가 성폭력으로 고통 받는 이 땅의 모든 여성들에게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라고, 외치기 이전의 세상, 그리고 촛불이전의 세상에서, 과연 이런 일들이 일어나리라 상상조차 못했던 그 시절, 불가능의 가능성을 꿈꾸는 이들은 어딘가 있었기에 지금의 일들이 사건으로, 역사의 변곡점을 찍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죠. 하늘 감옥에서, 거리에서 곡기를 끊어가며 단 하나의 가능성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불가능은 지금, 역사가 된 것입니다. 오늘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들도 그런 불가능을 가능케 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재건된 성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느헤미야는 바빌론 포로 귀환이후 예루살렘 재건과 종교개혁에 힘쓴 관료였습니다. 페르시아 왕의 측근으로 술을 따르는 일을 관장하던 그는 고향인 예루살렘 성이 폐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념에 잠깁니다. 그는 기도와 고민 끝에 왕에게 고향인 유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게 도와 달라고 청합니다. 그렇게 왕의 허락을 받은 느헤미야는 고향인 유대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고 건물들을 새로 짓기 시작합니다. 그는 매우 신중하고 치밀하게 일을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먼저 근방의 다른 도시국가들의 성벽의 모양과 건축양식을 조사했고 그 중 가장 튼튼한 공법을 도입했습니다. 물론 성벽 재건을 하는 동안 모함과 비난, 심지어는 방해가 있었지만 느헤미야는 잘 극복해 냈습니다. 무너진 성벽이 다 이어진 후 그는 인구조사사업을 벌였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들을 가문별로 몇 명인지를 조사한 것이죠. 느헤미야 7장에 보면 자세히 나와 있는데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들은 종들까지 포함해 모두 49,942명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처럼 느헤미야가 한 일은 물리적인 성벽 재건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무너지고 끊어진 성벽을 잇고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 과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었던 이스라엘을 되찾고자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회복은 무너진 성벽이 이어지고, 흩어져있던 백성들이 모이고,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덧입혀질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말씀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 일을 행한 사람은 느헤미야와 예언자 에스라가 아니었습니다. 제단위에는 레위인들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그 위에 세운 것은 다름 아닌 백성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백성들은 예언자 에스라에게 바벨론에 빼앗겼던 율법책을 가져와 그 말씀 나눠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에스라는 그 청에 응하여 새벽부터 정오까지 율법책을 읽어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나누는 자리가 백성들의 의지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언자 에스라가 율법을 읽으면서 통역도 해주고 설명도 해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발제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새벽부터 정오면 예닐곱 시간 되는 시간인데 그 안에 토라를 비롯한 율법책을 다 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설교, 하늘뜻펴기를 한 셈입니다. 그 이후 예루살렘 안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모든 백성들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운동이 시작된 것이죠. 구체적으로는 이방사람들과의 결별을 선언합니다. 

 

1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저지른 죄는 다름 아닌 이방사람들과 관계를 맺은 것에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때문에 이방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는다는 의미는 과거 하나님께 저질렀던 과오로부터 철저히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셈이죠. 이방으로 대표되는 가치는 물신입니다. 과거 하나님 나라를 꿈꾸던 이스라엘, 왕이 없는 나라, 사유재산과 상비군이 없고, 때가 되면 희년선포를 통해 모든 것이 리셋되는 나라, 그런 나라에 대한 꿈이 이방종교에 의해 훼손 된 것 아닙니까? 바알, 마르둑, 아세라 등등 온갖 잡신들과의 결별선언, 이것이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체가 된 말씀의 완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선포된 것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깨달음, 그리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변화까지 이뤄져야 말씀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자연스레 성전종교의 개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바쳐진 제물에 대한 투명하고 올바른 사용, 유대와 예루살렘에 대한 면밀한 조사, 지방 관리들과의 소통구조 개선, 여러 개혁적인 조치들이 단행된 것이죠. 이처럼 회복과 개혁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느헤미야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과거로부터의 결별, 새로운 관계의 회복,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이죠.

 

 

희년선포의 현재성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느헤미야의 말씀을 선포한 장면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입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말씀 선포를 통해 온 백성들을 대오각성 시킨 것처럼 예수가 회당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성서를 낭독하고 희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죠. 느헤미야에서는 온 백성들이 아멘으로 화답하고 눈물로 회개하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는 군중들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결국 벼랑 끝까지 몰려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회당에서의 예수의 희년선포는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을 고향인 갈릴리에서 시작한 것으로 편집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사람들의 배척을 그리고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 이유에 대해 예수의 신분을 문제 삼습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아닌가?” 회당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예수의 그 선포에 감탄한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그 신분, 건물을 짓는 대목수도 아닌 식탁이나 의자를 고치는 소목수였다는 사실에 실망한 것이죠. 예수는 이에 질세라 그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과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를 환대하고 믿었던 소수의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더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게 되었고 급기야 예수를 벼랑 끝으로 몰아 떨어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복음의 행진을 이어갑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누가복음은 이제 회당종교인 유대교를 부정하고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새 가정, 즉 교회를 언급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회당은 더러운 영으로 가득한 절망의 장소로 묘사되고 ‘시몬의 집’과 같은 새로운 복음이 싹트는 공간을 회당을 대신 할 장소로 기록합니다. 그리고 회당이 아닌 공간에서 예수가 선포한 희년의 역사를 이어갑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일들을 이어갑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장소가 회당에서 집으로, 바닷가로, 들판으로 바뀌었고 복음을 전하는 대상도 유대인에서 이방인들에게로 바뀌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의 희년선포, 즉 하나님 나라 선언은 그 양상이 바뀌었을 뿐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가 선언한 주의 은혜의 해는 이렇습니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희년입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날, 경작지는 그 기능을 중단하고, 모든 채무관계도 청산되고, 포로 된 자는 놓임을, 억눌린 자는 자유를, 눈이 먼 사람은 눈 뜸을 선포하는 날이 바로 희년입니다. 

 

여기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대목은 눈 먼 자에 대한 조치입니다. 눈 먼 자는 그냥 눈뜨게 하면 될 일을 눈뜸을 선포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 눈 먼 자의 의미 안에는 진리에 눈 먼 자라는 중의적 의미도 포함되었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희년에 치러질 여러 조치들 가운데 진리에 눈먼 이 땅의 수많은 청맹과니들 또한 눈 뜸의 대상이 된다는 말로도 해석됩니다. 갇힌 자에게는 자유가, 가난한 자에게는 부요함이 복음이 되는 것처럼 진리에 눈 먼 이들에게는 진리를 보는 것이 복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희년이 되면, 진리는 누가 봐도 볼 수 있게 명료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이 희년이 오늘 이루어 졌다고 선언합니다. 누가복음 4장 21절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여기서 ‘오늘’ 이라는 말은 예수가 희년을 선포했던 2천 년 전 어느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말한 ‘오늘’은 성서를 읽는 모든 이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희년은 열린 결말이라 하겠습니다. 그 결말이 우리에게까지 열려져있다는 것이죠. 그 결말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어디를 뒤져봐도 희년은 현실화 된 적이 없는 이상향을 담은 율법입니다. 그것을 예수는 바로 지금, 여기로 가져다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희년을 우리에게 완성시키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희년은 우리에게 현재 진행형인 것입니다.

 

 

불가능의 가능성을 꿈꾸는 공동체

 

고린도전서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울의 사람에 대한 인식은 이렇습니다. ‘천차만별이다. 제각기 다르게 태어났고 타고난 능력도 다 다르다.’ 달란트의 비유를 전한 예수의 사람에 대한 존재인식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길 때 ‘각각 능력에 맞게’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이죠. 

누구는 다섯 달란트 누구는 세 달란트, 한 달란트. 마태복음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이 ‘각각의 능력에 맞게’ 라는 말은 어찌 보면 자본주의적 가치가 담겨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출발선이 다른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과거 2천 년 전의 인식과 지금 사람을 보는 시각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다름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이죠. 다름을 이기심에 기초한 공포와 혐오로 느낀다면 차별과 소외가 나타납니다. 때로는 폭력과 학살로 비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서로 갖고 있는 빈자리를 메워간다면 그 다름은 엄청난 시너지를 내며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라고 증언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는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수많은 시각과 기준들이 존재합니다. 

 

요즘 핫한 드라마에서처럼 이 세상을 피라미드라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엄연한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실제로 인도나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에 실질적인 계급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계급은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무의미해야합니다. 그러나 그게 잘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볼 때, 바울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라는 이 말은 매우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교회 안의 이러한 가치가 차고 흘러넘쳐 밖으로 나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선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요즘은 거꾸로지요. 세상의 가치가 교회를 주무르고 있습니다. 이런 걸 ‘역선교’라고 해야하나요.

 

여튼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라는 선언 아래 지체라는 개념을 설명합니다. 본디 한 몸이고 그 안에 있는 각각의 지체들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 지체들은 각각이 다르게 생겼고 하는 일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지체들 모두 한 몸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는 것이죠. 서로가 서로의 기능에 대해 비난 할 수 없고 서로의 외모에 대해 평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비교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볼품없는 지체들은 그 부족한 것을 다른 지체들이 메워주니 오히려 요긴하다고 합니다.

 

여느 조직이나 모임에 비해 교회가 다른 이유는 공감을 넘어선 한 몸이라는 믿음, 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공동체는 여러 가정들의 연합체, 개인들의 연대체가 아니라 신경과 핏줄이 연결되어 있는 한 덩어리의 유기체라는 말씀입니다. 

 

분열과 다툼이 끊이질 않았던 고린도교회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겠습니다만 바울은 교회에 대한 이상적인 원형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지, 서로 모자란 것 채워주고, 못난 놈 도닥이고, 약한 놈 일으켜주고, 잘난 놈 박수쳐주고, 그렇게 함께 가는 게 교회지. 우리는 모두가 다 다르지만, 각기 교회 안에서의 역할도 다르지만 함께 어울리며 그렇게 살아가는 게 그게 교회지.’ 이런 말이죠. 

 

그런데 어디 그게 쉽습니까? 제 생각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 세상에 갈등과 분열이 없는 교회가 있을까요? 그런 교회는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느 공동체나 아픔이 있기 마련이죠. 그게 성서가 바라보는 인간관이 아닐까 합니다. 원죄와도 연결되어 있는 본성이겠지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보면 호모 사피엔스가 자기보다 힘세고 큰 네안데르탈인과 싸워 이긴 배경에는 어휘의 양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네안데르탈인이 구사하던 어휘가 4,50가지였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수백수천까지의 어휘능력, 즉 대화가, 이야기가 가능했다는 겁니다. 어휘의 차이는 곧 사고의 차이를 가져오고 그것이 전쟁에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게 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그러한 어휘능력을 갖게 된 배경에는 다름 아닌 뒷담화가 있었다고 저는 행간의 의미를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책에는 대화라고 되어 있지만 삼삼오오 모여서 한 이야기 내용이 뭐였을 것 같습니까? 남이야기, 특히 남이 넘어진 이야기에 더 짜릿함을 느낍니다. 

 

이러한 사람이 본디 갖고 있는 속성 덕에 우리인류는 온전한 신앙 공동체 하나 갖고 있지 못하지만, 바울의 그 가르침은 가르침대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분란이 끊이질 않았던 고린도교회에게 전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이라는 가르침은 언제나 유효한 가르침으로 남아있고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이죠. 피가 돌지 않고 신경이 끊기면 그것은 같은 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소통하지 않으면 남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지체로서 같은 기운이 돌도록 노력하는 게 한 몸을 이룬 공동체가 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덕목일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더 큰 은사를 구할 것을 권면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여드리겠다’고 합니다. 그게 뭡니까?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가장 위대한 덕목, 심지어 예수는 원수 사랑이라는 불가능한 주문까지 합니다.

 

여러 지체이지만 한 몸으로 이뤄져있다는 믿음, 거기에 사랑이라는 덕목까지! 참, 그리스도인들은 더 깊은 신앙의 경지로 들어갈수록 좌절과 불가능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일까요? 왜 우리는 이렇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할까요? 왜 원수사랑이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말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고 있는 것일까? 교회는 그런 불가능의 가능성을 꿈꾸며 끊임없이 달려가는 공동체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희년의 열쇠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선포한 희년은 우리 교회 공동체의 발과 손끝에서 이뤄집니다. 희년을 향한 우리 공동체의 행진과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우리의 끊임없는 손길로 불가능은 점차 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희년을 완성해 갑시다. 불가능의 가능성을 꿈꾸는 공동체, 그 가상한 노력 가운데, 몸부림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리라 믿습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수 천 수 만의 불가능 가운데 단 하나의 가능성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그렇게 희년을 완성해 갑시다.

희년은 오늘 우리로부터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