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루어진 말씀 | 김희헌 | 2019-02-03

by 김희헌 posted Feb 03, 2019 Views 30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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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루어진 말씀 (1:4-10, 고전 13:1-13, 4:21-30)

2019.02.33 (주현절 5)

 

[새로운 시대를 살다간 사람]

오늘 주보의 목회마당에는 지난 월요일에 소천하신 고 김복동 님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분은 14살에 납치되어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 다니다가, 전쟁이 끝나고도 미군의 포로수용소에 갇힌 기구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고통을 딛고 일어나 일본군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1차 아시아연대회의, 1992>에서 증언을 시작하였고, 그 이후 30년 가까이 인권과 평화 운동가로서 전쟁폭력 재발방지를 위한 국제여론을 이끌어오셨습니다. 그리고 폭력과 고통이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연대활동을 넓혀가셨습니다.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을 지원하고, 또 베트남에서 한국 군인들이 벌인 전쟁 성범죄에 대해서 베트남 국민들에게 사죄하기도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분의 소천 소식을 듣고, 세계 무력분쟁지역의 성폭력 희생자들은 당신은 우리의 영웅이요, 어머니요, 희망이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고 합니다.

김복동 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그 분은 그 힘겨운 삶을 어떻게 살아오실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여전히 일본은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반도에는 원치 않은 분단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 김복동 님은 자신의 육체와 영혼에 깊은 상처를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아직 오지 않은 평화의 시대를 먼저 살아가셨고, 그 평화의 세계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생각할 때 평화의 나비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참혹한 고통의 시대를 아름다운 몸짓으로 살며, 다가오는 시대를 앞서 살아가는 삶의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이미 펼쳐지고 있는 새 시대에 지나간 시대를 지배했던 낡은 생각에 매여 사는 것은 불행한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분단 시대의 관습과 제도가 여전히 삶의 방식과 생각의 습관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분단국의 고통을 너무도 오래 받아 익숙해졌기 때문에, 이것이 뒤틀린 역사인지조차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의 시대는 이미 왔고, 그 시대를 살아갈 전혀 다른 삶의 방식에 관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지난 목요일에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인 Stephen Biegun이 스탠포드 대학의 한 연구소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오는 2월말에 있을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준비하는 미국 대표의 강연이라 관심이 많았는데요. 그 강연 원고를 읽어보기 위해서 찾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매번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강연이 있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서 그 강연의 전문과 이어진 대화 내용까지 한글로 번역되어 주한미국대사관 홈페이지에 실린 것입니다. 마치 그런 게시 자체가 무슨 메시지를 주는 듯 했습니다. 이 강연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납니다. 새로운 시대가 이미 시작된 것을 느끼게 합니다.

지난 70년간 계속된 한반도의 전쟁과 반목을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작년에 트럼프 대통령을 싱가포르로 이끌었습니다. 목표를 향한 그의 끊임없는 노력이 제가 오늘 이야기한 모든 것들을 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때 입니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싱가포르에서 보여준 비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강연은 정치인의 선전이라기보다는 미국 씽크탱크 내부자들의 논의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날 강연의 사회는 Robert Carlin이라는 사람이 맡았습니다. 미국 CIA 동북아시아 담당국장(1989-2002)을 역임한 사람인데, 대북협상 수석고문을 맡기도 했고 최근까지 (20183월 헬싱키회의, 남북/북미 정상회담을 조율하는 남북미 3국의 실무회의 포함하여) 거의 모든 북미회담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배석자 중에는 북미대화를 촉발시키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핵전문가 Siegfried Hecker 박사가 있었습니다. 북한이 201011월에 영변 핵시설을 공개한 적이 있는데, 미국을 대표해서 온 사람이 바로 해커 박사입니다. 그가 영변에서 원심분리기 2천 개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돌아간 지 딱 4개월 만에 북미 간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20113월 독일 에힝겐)

강연을 마치고 질의응답 하는 과정에서 비건 대표는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을 했습니다. 언론보도를 통해서도 잘 알려진 그 내용은 이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전쟁을 끝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전쟁은 사실상 이미 끝났습니다 (over and done). 우리는 북한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고, 북한 정권의 전복을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미래를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비핵화를 토대로 했으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기회이고, 우리가 북한과 나누게 될 논의 내용입니다.”

이런 소식을 접하고 나니, 우리 사회는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에 관한 결정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졌습니다. 가시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이지, 이제 전쟁과 갈등의 시대는 지나갔다고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지난 시대의 질병이 뿌리 깊게 남아있습니다. 낡은 세계관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예언과 꿈이 날개를 활짝 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리와 평화가 감추어진 분단 시대의 늪을 빠져나와야 합니다. 어둠이 길었던 것만큼 예언과 꿈을 드높이 하여 새로운 방식의 삶을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예언자가 환영받지 못하던 시대 / 누가복음 421-30]

복음서가 기록된 때는 진리가 숨쉬기 힘든 억압의 시기였습니다. 제국의 억압 아래에서 평화의 꿈은 질식되었고, 불안한 마음으로 그저 연명하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병든 시대였습니다. 해방을 꿈꾸는 예언은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회당에서 오래전 예언자 이사야가 선포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억눌린 사람과 포로 된 사람의 해방을 선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예언서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환영받기보다는 마치 평지풍파를 일으켰다는 듯이 갈등이 촉발되고 격화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예언의 내용과 실제적인 삶 사이의 간격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읽은 후에 예수님은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반응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서로 관심하는 지점이 달랐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목한 점은 오늘 이루어진 말씀이었으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은 은총의 말씀’(logois tes charitos)을 이루어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언을 그저 과거의 것 또는 먼 미래의 것으로 여기지 말고, 오늘 여기서 이루어진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에게 요구한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했던 일을 여기 당신 고향에서도 해보라는 것(23)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 삶을 변화시키기보다는 그저 기적이 벌어지기를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그것은 구원의 사건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서 일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벼랑으로 끌고 가서 밀어버리려고 했습니다.

이들을 격분시킨 것은 자신들이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실상 진실한 이야기였습니다. 문제는 낡은 질서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방과 구원의 말씀을 이루어가지 못하는 자신들의 삶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도리어 예수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며 거칠게 위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한 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십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옛 시대가 아무리 새 시대를 억압해도 결코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 같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간 자리에는 여전히 21절 말씀의 여운이 남아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오늘 이루어졌다.방금 읽은 예언의 말씀이 곧장 이루어졌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요청합니다. 이 말씀은 시도됨으로써 바로 실현되어버리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머뭇거립니다. 어떻게 그런 새로운 삶이 도입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기적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물을 것입니다. 오늘 네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과연 무엇인가?

 

[혼란을 극복할 가장 좋은 길 / 고린도전서 131-13]

우리가 읽은 바울의 편지는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오늘날 결혼식에서 읽혀지는데, 만일 그런 모습을 바울이 와서 보게 된다면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이 편지는 고린도 교회의 목회적 위기상황을 배경으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12장을 보면, 바울이 여러 가지 은사를 소개한 후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비유를 듭니다. 그것은 여러 은사를 가진 지체들이 서로 한 몸을 이루지 못한 상황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대표적인 은사는 방언, 예언, 지식, 믿음, 4가지였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은사의 부족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은사의 남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3장은 그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바울은 본문 직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바울이 제시한 가장 좋은 길사랑입니다.

13장은 세 단락으로 구분됩니다. 먼저 1~3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4가지 대표적인 은사를 사랑과 비교합니다. 방언과 예언과 지식과 믿음을 소개한 후에, ‘그런데 사랑이 없다면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각 절마다 세 번 똑같이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사랑이 없다면(agapēn de mē echō)이라는 표현입니다.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사랑입니다. 만일 사랑이 없으면, 것은 방언도, 예언도, 지식도, 믿음도 도리어 문제의 근원이 됩니다.

4-7절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잘못을 극복하는 길에 관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서로 파벌을 조성해서 싸우고 (3:3), 상대방을 얕보고 무례하게 대하며 (4:7, 5:6), 세상적인 지식과 권력을 자랑하며 교만과 자만에 빠지며 (4:18, 5:2, 8,1), 정의롭지 못한 태도(6:8) 가졌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잘못을 극복하는 길이 사랑에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인내와 친절, 소박한 진리에 담긴 따스함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읽어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 사랑 위에 영원한 희망이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마지막 8-13절에서 말합니다. 새로운 변화에 대한 모든 기독교적 상상의 원동력이 사랑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가치가 위대한 예언이나, 방언의 능력이나, 지식의 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소유하면 자신을 영원히 지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꾸로 생각합니다. 가장 오래 지속되는 힘은, 남기지 않고 베풀어지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지혜에 담긴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모두 베풀어서 자기에게 남아 있지 않은 사랑이 가장 오래 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대한 불신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마저도 고린도교회에서 남용되던 은사와 같이 주장되고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요구되어지는 사랑은 오래 참지 못하고, 친절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달고 교만과 무례를 범합니다. 자신이 실행하지 않고 남에게 요구되는 사랑은 도리어 소란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가페를 일으키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사랑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사랑을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사랑이 다만 내 안에서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자신이 사랑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자기에게서 일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엇을 관철시키기 위해 애쓰는 주체가 되려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 참된 신앙일 것입니다. 그것이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길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소명, 주어지는 것의 생명력 / 예레미야 14-10]

예레미야서 본문은 소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을 내어놓은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소명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이 부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보통사람들과 같이 두려움과 불안을 가진 예레미야를 부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두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합니다. 말을 잘 할 줄 모르고,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적 소명은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비롯됩니다. 거절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직 어리다고 하지 마라. 내가 보내면 너는 가고, 내가 명하면 너는 말하면 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은 무언가를 이루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받는 것입니다. 소명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중요한 것들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밖에서 오는 것이요, 받는 것이요,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굳이 말하지 않고, 삶 자체를 들여다봐도 우리 삶의 중요한 것들은 모두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삶을 대표하는 네 가지 현상인 생로병사만 하더라도, 우리가 애써서 쟁취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게 되는 것은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요,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삶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태어나서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의 축적된 희생 위에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은 누군가 앞서 닦아놓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누군가의 희생과 선행 덕분에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참된 삶을 살도록 이끄는 부름은 내 안에서 비롯되기보다 밖에서 옵니다. 그것이 이웃의 얼굴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다는 우리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소명에 관한 이야기는 자기의 능력으로 인생을 개척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우리 시대의 문화를 극복하는데 지혜를 줍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세뇌하는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수동적인 자세는 게으르거나 무능한 것처럼 여겨졌고, 가만히 있는 것은 나태요 무관심이며, 심지어 죄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만사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믿고, 그것이 발전과 성숙을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민, 3의 인생, 19-20)

이런 사회에서 번성한 종교는 믿음까지도 자기 힘으로 성취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그렇게 성취되면 사실 자기가 원하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되기 쉽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영성은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능동성에 있기보다는, 자기와 깊이 연결된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것에 대해 열려있는 민감성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인간은 단지 동물적 본능의 노예처럼 살아가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가 소유한 지능만을 따라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보다 복합적인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맺은 관계와 어떤 결과에 대한 예견 속에서 자기 본능까지 조절합니다. (윌리엄 제임스, 심리학의 원리, 3:1935, 2033) 그것은 우리의 몸과 외부세계가 경계선을 긋기 힘들 정도로 이어져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영혼 저 깊은 곳에 새겨진 내적인 힘, 인간으로 하여금 진화하도록 이끄는 동력은 단지 본능이나 지능이 아닙니다. 자신의 전 인격을 무언가를 향하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도록 이끕니다. 그것이 사랑에 실패하면서도, 결국 사랑의 길로 나서게 하는 힘입니다.

삶의 큰 실패를 맛보았지만 여전히 희망의 시를 쓰고 있는 한 시인의 시를 읽어드립니다.

힘들게 쌓아올린 지식은 사라지고, 지혜는 남아 / 지혜의 등불은 사라지고, 여명이 밝아오는 정의의 길은 남아 / 정의의 깃발은 사라지고, 끝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 길에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남아 / 사람은 사라지고 그대가 울며 씨 뿌려놓은 사랑, 사랑은 남아.

새로운 시대는 사랑으로 열립니다. 이 사랑을 확인하는 복된 설 명절이 되기를 바라며, 또 힘을 얻고 주의 말씀을 삶에서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여러분이 알고 있는 새 시대의 예언이 있다면, 오늘 이루어 가십시오. 여러분이 체득한 사랑이 있다면, 오늘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실행되며 곧장 이루어지는 예언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피어날 수 있도록 삶을 열어 사랑이 깃들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