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낚는 어부 (사 6:1-13, 고전 15:1-11, 눅 5:1-11)
2019.02.10 (주현절 6)
[사람이 도구화되지 않는 세상을 향해]
설 연휴를 잘 보내셨는지요?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과 만나 정을 나누고, 살아온 지난 이야기를 함께 하는 시간은 삶에 활력을 줍니다. 음식을 준비한 분들은 분주한 시간을 보내다가 친척들과 헤어지고 나서야 쉬셨을 텐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제는 교회에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김판순 장로님께서 93세의 일기로 소천하신 것입니다. 지난주까지 교회에 오셨는데 황망한 마음이 그지없습니다. 감기가 폐렴으로 급속하게 전개되고, 어제 갑자기 심정지가 발생했습니다. 장로님을 추모하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오늘 오후에 가지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지난주가 또 다른 추모의 시간이었습니다. 작년 12월에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죽은 고 김용균 님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장례절차가 시작되기 전 수요일에는 우리 교회가 주관하는 기도회를 서울대학교병원 빈소에서 드렸습니다. 참석해주신 교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비정규직이라는 제도가 너무 익숙해져서 ‘한 사람의 죽음쯤이야’ 하는 비정한 마음도 습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 시대의 큰 죄악을 본 많은 사람들이 지난 두 달 동안 깊은 관심을 모아 주어서 정부가 해결책을 내놓도록 만들었습니다.
삶이란 참 신비롭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망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한편에서 일어나는 파장이 먼 곳까지 전달됩니다. 이 삶의 신비를 들여다본 지혜와 영성은 두 가지 모습을 띠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다양한 모습을 띠는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진실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 다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신비롭게 얽혀있다는 생각에서 삶에 대한 이해와 올바른 도덕관념이 생겨납니다. 다른 존재의 운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게 되면, 결국 자기 것도 잃고 맙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산업문명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다른 존재의 고통과 운명을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기는 사고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도구화하여 자본의 부속물로 여겨오는 동안,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에 비례해서 우리들의 삶은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생명에 맺힌 신성한 것들을 모두 상품화시켜서 삶을 돈에 귀속시키면서, 빈부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자연은 빠르게 오염되어 왔습니다. 자본을 통해서는 정의와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면서도 우리 문명은 덫에 걸려 있습니다. 삶의 평화는 어느 길로 오는 것일까요?
한반도의 시계가 다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될 2차 북미정상회담은 한반도에서 탈냉전의 분위기를 더욱 키워낼 것입니다. 그런데 분단 상황에서 기득권을 누려온 사람들은 이 분위기를 깨려 하고, 또 분단 현실에 익숙한 이들은 다가올 미래를 생존경쟁과 체제경쟁의 확장으로 대하려 합니다.
분단 상황에서 벌어진 이 경쟁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물론이요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 자체를 잃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통일의 길은 스스로의 삶의 방식을 돌이키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자본보다는 사람을 우선으로 여기는 방향이어야 하고, 체제보다는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는 길이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깨달은 지점 / 누가복음 5장 1-11절]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예수님이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도구화하는 시대에는 오해를 낳기 쉬운 위험한 본문입니다. 그 동안 기독교 선교는 복음을 미끼로 민중들을 낚아 올려서 성직제도와 종교기관를 비대하게 만드는 일에 더 관심을 갖는 정신적 실패를 거듭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오늘 하늘뜻펴기의 제목은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서는 무엇을 말하는지를 먼저 보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같은 이야기를 다루는 세 개의 공관복음서 가운데 우리는 누가복음을 읽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다른 두 복음서에는 없는 두 가지 내용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이야기의 배경설명이 있습니다. 1-3절이 그 배경인데, 먼저 예수님이 무리를 가르치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다음에 나올 제자의 길로 초대하는 이야기를 준비합니다. 둘째는 갈릴리 바다에서 생긴 사건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베드로가 제자가 된 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오늘의 주제는 이 두 개의 맥락에 비추어보면서 그 뜻을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에 있을 때, 무리들이 밀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달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전형적인 청중인 갈릴리 민중 ‘오클로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가난과 좌절을 깊이 이해했습니다. 가난한 그들의 존재는 예수의 일차적 관심이었고, 예수의 가르침은 바로 이들의 삶의 향상과 연관됩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들에게 삶의 향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예수님의 초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호숫가에는 배 두 척이 있었습니다. 한 척은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의 배였고, 다른 하나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배였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이 어부들은 바닷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올라서 그에게 뭍에서 조금 떨어지게 해달라고 요청한 다음에, 배에 앉아서 무리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이 주목하는 것은 그 가르침의 내용이 아니라 이어지는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말씀을 마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시오!” 그러자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리고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 떼가 걸려들었습니다. 자기 배만으로는 끌어올릴 수가 없어서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에게 엎드려 말합니다. 베드로의 말은 이야기의 맥락을 따져보면 어색합니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어떻게 거기에 고기가 많은 줄 아셨습니까, 아무튼 고맙습니다.’ 라고 대답했다면 자연스러웠을 텐데, 베드로는 이상한 고백을 하지요. “주님, 나에게서 떠나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 역시 엉뚱한 말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이것을 읽은 우리의 과제는 본문에 나온 이 함축적인 대화에 담긴 의미를 밝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대개 이 본문을 해석할 때, 기적을 경험한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기로 했다고 추정합니다. 그것은 기적을 일으킨 예수님의 능력에 집중하는 해석입니다. 정말로 베드로는 기적을 베푼 저 사람을 스승으로 삼고 사는 것이 어부로 사는 것보다 낫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요?
만일 우리가 그런 전제를 갖고 이 본문을 해석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두 곳 있습니다. 8절에서 하는 베드로의 말과 11절에서 하는 베드로의 행동이 그것입니다.
8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왜 자신을 가리켜 ‘죄인’이라고 표현했을까요? 기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예수의 능력을 의심한데서 오는 죄책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매끄럽지 않습니다.
11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행동을 한 번 보지요.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순종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할까요? 기적의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바닷가의 어부생활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만일 그렇게 해석한다면, 이들은 예수의 말을 오해했고, 결국 인생행로를 잘못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예수의 길은 그런 방식으로는 성공을 거둘 수 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낚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생업을 버리고 기독교 선교에 나서라는 말일까요? 베드로가 갑자기 선교의 사명에 불타는 종교인이 되었다는 말인가요? 그런 해석은 보다 핵심적인 사항이 간과되어진 형식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더 주목해야 할 지점은 누가복음이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지점인데, 그것은 베드로가 무언가를 깨닫고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건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를 만큼 큰 깨달음이 그 날 아침에 베드로에게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 실마리를 7절과 8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8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그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7절에 나오는데, 한글성경 번역은 오해를 주기 쉽습니다. 우리가 읽은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봤던 것은,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된” 장면입니다. <공동번역성서>도 비슷하게 해석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원문에 가까운 번역은 <개역개정>입니다. 이렇습니다.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베드로가 봤던 것은 ‘배 두 척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고기’가 아니라, ‘고기를 채웠더니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는 현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은 개역개정과 같은 방식으로 번역했습니다. KJV, NIV, NRSV 모두 이 부분을 ‘they began to sink’라고 번역합니다. 고기를 가득 채웠더니,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한 번 번역이 잘못되면 계속 의역을 하게 되는데, 9절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놀랐던 것을 가리켜 <새번역 성경>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라고 번역했는데, 여기에는 원문에는 없는 문구가 불필요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이라는 문구 그것인데, 이것은 오해만 낳습니다.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들이 놀랐던 것은 ‘많은 고기’가 아니라, 자신들이 해왔던 ‘고기잡이’(τῇ ἄγρᾳ τῶν ἰχθύων, the catch of the fish)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목격하고 깨달았던 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이 그 동안 삶의 목표로 두고 원했던 것을 이루었는데, 그 성취가 도리어 자기가 타고 있는 배, 즉 자기 존재의 기반을 침몰시키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청춘을 바쳐 ‘밤새워 애를 쓰면서’ 했던 바로 그 일, 그 일을 이루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도록 거두었는데, 그것이 도리어 자기 인생을 가라앉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본 것이지요. 이것은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베드로는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보이지 않는 삶의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간’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지혜요, 영성입니다. 그가 만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예수를 따라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고 한 예수의 말은 베드로를 움직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움직인 것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기적을 통해서 뚜렷하게 보게 된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한 성찰입니다.
베드로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Fear not!) 이 말씀은 삶의 방식을 새롭게 하려는 사람의 출발을 격려하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새 삶은 ‘사람을 낚는 일’입니다. 여기서 ‘낚는다’는 단어 ‘조그레오’(ζωγρέω)는 헬라어로 된 합성어입니다. 그것은 ‘생명/생기’(zoē)라는 말과 ‘잡는다’(agreúō)는 의미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산 상태로 잡는다’ (capture alive) 또는 ‘살게 하기 위해서 잡는다’(capture for life)는 뜻입니다.
보통 어부들은 고기를 죽이려고 잡고, 죽여서라도 잡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베드로를 초대한 것은 ‘살리기 위해서 잡는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사명이요, 새롭게 걸어가야 할 베드로의 길이요, 모든 시대에 추구되어야 할 문명의 자세입니다. 이 일에 초대 받은 베드로는 그 이름대로, 생명의 반석과 토대요, 교회의 그루터기가 되었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를 경험한 자리 /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베드로와 같은 경험을 한 또 다른 사람은 바울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는 그가 쓴 편지입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바울의 증언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기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담긴 진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역사적 사실’에 관한 것입니다. 기록시기를 고려할 때, 복음서보다 한 세대 가량 먼저 기록된 바울서신이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맨 먼저 나타나셨고, 그 다음에는 열두 제자들에게, 다음으로는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났고, 그 다음으로는 동생 야고보와 다른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자신에게 나타났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복음서의 기록이 마치 드라마와 같아서 그 이야기 자체에 빠져들게 한다면, 바울이 들려주는 부활의 증언은 담백합니다.
바울의 증언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부활한 지점’입니다. 바울이 강조한 내용이 8-9절에 나옵니다.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는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따르자면, 부활한 그리스도가 내려온 마지막 자리는 ‘가장 작은 사람’이 있는 곳입니다. 그 존재 가치가 느껴지지 않은 미미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그곳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고 내려갑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예수를 만날 그곳으로 내려가 교회를 지었습니다.
바울 역시 그리스도가 내려간 그 자리로 내려갑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그가 전향을 한 것입니다. 그 전향은 작은 곳을 향한 전향이요, 낮은 곳을 향한 전향입니다. 박해하던 사람의 처지가 박해를 받는 처지로 바뀌는 전향입니다. 그 전향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전향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를 찾는’ 전향입니다.
전향이 비난 받는 이유는 그 변심이 ‘크고, 높고, 힘 있는 곳’을 향하기 때문이요, 결국 그것으로 인해 자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전향은 다른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우주적 사건 속에서 ‘자신의 작음’을 깨닫고, ‘작아져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깊이 들여다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고, 자신은 그 세계를 살아가는 작은 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성찰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자신을 큰 존재로 간주하고 타인을 짓밟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삶을 들여다볼수록 전체 속에서 여러 관계를 맺고 있는 작은 자신을 보게 됩니다. 들여다보지 않으면 전체를 가려버린 자신의 크기에 넋을 빼앗깁니다. 대부분의 지혜는 이런 깨달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깨달음으로 바울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새 역사의 그루터기 / 이사야 6장 1-13절]
이사야서의 본문은 예언자로 부름 받은 소명에 관한 기사입니다. 천사들이 나타나며 하늘의 징조가 보일 때, 이사야는 곧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직감했습니다. 그 때 이사야의 마음에 든 생각은 자신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이사야가 그렇게 생각한 까닭은, 자신은 “입술이 부정한 사람으로서,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5절) 이것은 단순한 죄책 고백이 아닙니다. 자신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 자신이 속한 무리들의 삶이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은 ‘깨어난 사람’의 깨달음입니다.
자신의 부정을 깨달을 때 비로소 회복이 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불타는 숯을 가져와 입술에 대고 “너의 악(guilt)이 사라지고 죄(sin)가 씻겨졌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준비된 그 마음에 하늘의 고민이 들립니다.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이 하나님의 소리를 들은 이사야가 말합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hin·nî šə·lā·ḥê·nî, Here am I. Send me )
하나님이 전하라고 이사야에게 주신 말씀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몽매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듣기는 늘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늘 봐도 알지를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을 그 상태에 내 버려두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둔한 상태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그대로 두어서, 그 상태에서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묻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시렵니까, 주님?’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 모두 파괴되어 옛 문명이 몰락하고, 그 문명을 살던 사람들이 사라질(baar, consume) 때까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파멸이요, 모든 것의 끝은 아닙니다. 도리어 새로운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잘릴 때 그루터기가 남듯이, 거룩한 씨앗(zera)은 남아서 그 땅의 그루터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이사야가 예언자로서 받은 소명이 무엇이었는지를 봅니다. 그것은 옛 삶의 방식과 몽매한 문명이 몰락해가는 것을 촉진시키고, 새로운 시대를 일구어갈 거룩한 씨앗들이 그루터기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다가올 시대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새 시대의 메시지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새 시대의 그루터기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낚는 일입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를 세 사람의 깨달음의 눈으로 읽었습니다. 셋 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이야기입니다. 생명을 위해 ‘사람을 붙잡는 삶’으로 초대받은 이야기입니다. 이 하늘의 초대와 믿음의 응대가 우리 삶에서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람이 도구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풍요 속에서도 삶은 아득해졌습니다.
고기를 가득 실은 배가 가라앉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부름을 들으십시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