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하늘뜻펴기

주님을 의지하는 삶 | 김희헌 | 2019-02-17

by 김희헌 posted Feb 17, 2019 Views 286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19-02-17

주님을 의지하는 삶 (17:5-10, 고전 15:12-20, 6:17-26)

2019.02.17 (주현절 7)

 

[포스트모던 시대의 종교와 자기만의 신]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아십니까? 제가 생각하는 답을 알면 실망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제직회가 있는 날입니다. 우리 교회의 창립정신인 평신도교회의 장점을 계승하기 위한 논의하는 과정에서, 제직회를 새롭게 하자는 취지를 갖게 되었고 그 동안 여러 준비를 해왔습니다. 부서장 워크샵을 하고, 오늘은 아침부터 봉사부와 여러 신도회원이 함께 주먹밥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예배를 마친 다음에 직분을 맡은 제직들은 식당에 올라가지 마시고 자리에 남아 제직회에 참석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제직회의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신앙공동체를 구성해가는 원리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체는 아닙니다. 특히 평신도 교회라는 이상을 가진 신앙공동체개인이 가진 능력과 자산의 산술적 조합이 아니라, 교권적 제한으로부터 벗어나 믿음의 참된 자유를 누리려는 실험을 계속해야 한다고 봅니다.

향린의 교우들에게 익숙한 말 가운데 하나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입니다. 홍근수 목사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홍목사님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예수와 민족을 보면 이런 소회가 담겨있습니다.

내가 미국에서 배운 최고의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의 의미이다. 나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 예수를 믿는 목적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예수가 바로 인간을 자유하게 하기 위해 오셨고, 또 인간들이 그러한 자유하는 존재가 되어 살도록 가르치셨으며, 그것 때문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고 믿는다.” (홍근수, [예수와 민족], 110-11)

이렇게 신앙인으로 사는 길을 자유인이 되는 것에서 찾았던 홍목사님은 향린교회에 부임하여 그 정신을 펼치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의 정신은 억압의 시대, 모던적 저항이 필요하던 시기에 해방의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자유인이 되라는 것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라는 말입니다. 신앙의 자유는 정치적 자유와는 결이 다릅니다. 정치적 자유의 특징은 합리적 일관성에 있지만, 신앙의 자유의 특징은 역설적 역동성에 있습니다. 정치적 자유는 모든 사회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일컫는 것이요, 이 세상 안에서’(in)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는 멍에를 쓰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역설적 자유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매임으로써 얻게 되는 이 세상으로부터의’(from) 자유입니다. ‘자유인으로 살아가라는 말은 신앙의 자유에 관한 말입니다.

그런데 모던적 저항의 시대를 달군 자유인라는 해방의 언어가 소위 포스트모던 시대라는 오늘날에 와서는 다른 뉘앙스를 준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자유인은 두 가지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도적 속박을 극복하려는 해방의 기운을 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신념에 충실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울타리라고 하는 상대적 제약을 불가피하게 안고 있습니다. 이런 자유인에게 종교는 무엇이고, 신은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자기만의 신]이라는 책에서 던진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아직 신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 그는 긍정적인 대답을 합니다. 근대 계몽주의가 무신론의 시대를 몰고 왔다면, 그 근대적 정신의 한계와 폐해를 극복하려는 탈근대로 불리는 오늘날에는 거꾸로 다시 종교가 귀환하고 있다고 그는 평가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종교는 이전 시대의 종교와 다릅니다. 과거의 종교인들은 자신을 하나의 종교 전통에 편입시키는 방식을 선호했던 반면, 오늘날의 종교인은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여러 종교 전통을 가로지르고, 자신의 이상과 부합되는 가르침을 여러 전통들 속에서 취사선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의 종교인들은 두 가지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가치를 체득하였기 때문에 어떠한 외부의 권위보다도 더 큰 명령을 자기 안에서 듣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결정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에 깊이와 정당성을 부여하는 일에 진지합니다. 울리히 벡은 그 진지함의 장면을 자기만의 신과 대화하는 모습이라고 봅니다.

자기만의 신을 가진 이들은 오랫동안 한 종교 전통에 충실했던 사람들보다 덜 영적이거나 덜 윤리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이 탈근대 시대의 종교인은 중세의 자아도취적인 종교인이나 근대의 이기적인 종교인보다도 더 자기성찰적입니다. 그리고 한 전통에 충실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품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 시야가 세계시민적입니다. 이들은 절대적이고 신비로운 실재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영적인 사람들이며, 또한 세계시민적 이상을 추구하는 보편적 윤리성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기만의 신을 가진 사람들의 시대는 맹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적 실험이 여간해서는 시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혼자 하는 자전적인 독백신과 나누는 대화로 여겨지기 때문에 개인과 신의 관계가 교란되고, 결국 그 종교정신에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지평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생겨난 가나안 교인현상, 다시 말해서 교회에 나가지는 않는 종교인이 많아진 현상은 단지 비윤리적인 교회에 대한 환멸의 경험 때문만이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측면에서는 자기만의 신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시대가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시대를 지나가는 종교는 자기성찰적 능력을 갖지 않고서는 존립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신앙공동체는 자기중심적 편협성을 버리고 세계시민주의적이상을 공동체적 실험 속에서 녹여내야만 합니다. 우리 교회가 추구할 방향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평신도교회를 추구했던 창립정신의 영향으로 교회 내의 권력을 평등하게 하려는 감수성이 민감합니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개방적인 정신을 장려하는 문화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 평등주의의 이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공동체적 실험을 어떻게 전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민 가운데 제직회를 새롭게 하자는 마음이 모였다고 봅니다. 한 해 동안 그런 노력을 하면서 믿음의 공동체를 더욱 굳게 세워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생명의 신적인 기원 / 예레미야 175-10]

오늘 예레미야서 본문은 두 가지 모습의 삶을 대비하여 보여줍니다. 5-6절은 저주받은(ārūr/cursed) 삶을 묘사합니다. 그는 사람을 의지하며 자기 힘을 ’(basar/)에서 찾음으로써 야훼로부터 마음이 멀어진 사람이다. 그 삶은 광야의 가시덤불 같아서 ’(towb/)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메마른 사막에서 살게 될 것이다.

7-8절은 축복받은(baruk/blessed) 삶을 말합니다. 복을 얻은 사람은 주님을 믿고 자신의 확신(mibtach/confidence)을 야훼에게서 찾는 사람이다. 그는 물가의 나무처럼 뿌리를 강으로 뻗으니 그 잎이 언제나 푸르고, 더위가 와도 염려가 없고 가뭄이 와도 걱정이 없으니 열매 맺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대조가 사람에 대한 불신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를 응시하고 있는 이 예언자가 염세주의에 휩싸여 인간에 대한 회의감에 빠졌을 리 없고, 신비주의에 골몰하여 역사를 잃어버렸을 리가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사람을 의지하며 자기 힘을 육적인 것에서 찾지 말라고 하는 것은 역사의 죄악을 치유하는 동력을 삶의 가장 근원적인 생명력이 있는 곳에서 찾으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삶에서 신성에 잇닿아 있는 곳에서 얻은 힘으로 생명과 역사의 문제를 헤쳐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의 마음에는 평화를 얻으려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의 문제의식과 해결방식이 옳은지 물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문제는 인간이 푸는 것이지, 왜 신에게 의지하여 풀려고 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제기는 신이 인간을 지배하던 중세가 끝나고, 인간이 신을 극복했다고 믿게 된 근대적 정신세계에서는 익숙한 것이라 하겠습니다다.

근대의 합리적 정신은 신의 지배를 극복한 인본주의 시대의 도래를 찬양합니다. 그것은 과거에 신이 인간을 지배하던 시절, 실제 신성한 무엇이 인간의 정신을 주도했다기보다는, 신의 이름으로 국가나 종교가 인민 위에 군림했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적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이런 생각이 분명해진 근대 세계에서 종교는 사회의 종속변수가 되었고, 신성은 삶에서 차근차근 밀려났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삶에서 신적인 요소가 사라져가자 생명은 깊이의 차원을 상실해갔습니다. 신성을 잃은 자연은 인간의 욕망대로 파괴되었고, 신을 잃은 인간은 도구적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인간 안에 불타는 염원과 마음에 맺혀 있는 신적인 계기들은 무시되고, 인간의 영혼을 규율하는 것이란 단지 이해관계일 뿐이라는 편협한 사고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신을 잃은 인간의 심장이 무엇을 향해 맥박치고 있는 지를 말하는 것도 흥미를 잃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가 민족의 파멸을 앞둔 사람들에게 들려준 신의 메시지는 육적인 것에서 자신의 힘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는 다름이 아니라, ‘삶에는 신성한 기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0절 말씀입니다.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는 분은 주님이요, 각 사람이 그 행실과 행동에 따라 열매 맺도록 하는 이는 바로 야훼다.” 생명의 깊이에서 신적인 기원을 보는 지혜는 오늘 우리에게 더욱 필요합니다.

 

[제자들을 깨우는 평지설교 / 누가복음 617-26]

누가복음의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의 활동을 다루고, 뒷부분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이 둘을 분리시켜 이해하기보다는 서로 연결된 것으로 보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의 치유활동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치유의 능동적인 주체가 되지 않고 수동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를 둘러싼 무리들이 상황을 주도합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는 두 집단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12제자가 포함된 큰 무리(오클로스)를 이룬 제자 집단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곳에서 모여든 수많은 백성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동일했습니다. ‘예수로부터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는것이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있을 때 이들의 행동을 촉발시킨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더러운 영(unclean spirits)으로 인해 고통당하던 사람들이 고침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무리들(오클로스)이 예수에게 손이라도 대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예수의 능력이 나와서 만지는 사람들을 낫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갈망과 행동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장려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뒤이어지는 예수의 가르침과 연관 지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예수님에게 몰려들어서 예수에게 손이라도 대려고 했던 무리들은 오클로스입니다. 이들은 예수에게 몰려든 두 집단 가운데, 제자 그룹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제자로 불린 이들이 취했던 행동은 앞 다투며 예수를 만지려는 것이었습니다. 뒤 이어진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로 이들, 제자 그룹에 속한 오클로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평지설교>로 알려진 이 가르침은 마태복음 5장의 산상설교와 대조를 이룹니다. 산상설교는 축복만 다루지만, 평지설교는 축복과 저주를 함께 말합니다. 여기서 축복을 받는 사람은 세 부류입니다. 지금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그 뒤에 이어진 말씀처럼, 사람들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고, 배제와 모욕을 당하며, 자신들의 이름이 악하다고 내팽개침을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런 일들은 참된 예언자들이 당했던 비일비재한 일로서,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화를 당할 사람 역시 세 부류입니다. 지금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대대로 거짓 예언자들에게 해오던 발림 말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질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해당됩니다.

가난한 이들이 떠돌고, 굶주린 이들이 배제당해 내몰리며, 약자가 모욕당할 때, 모든 이들에게 좋은 말을 듣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예수님은 불특정 다수에게 이 말씀을 하지 않고, 자신을 따른 오클로스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으로 들은 사람들에게는 삶의 과제가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것은 축복을 향해 예수에게 달려들기보다는, 자기 삶의 방식을 새롭게 지어내는 것입니다.

 

[잠자는 시대의 첫 열매 / 고린도전서 1512-20]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관한 바울의 주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부활이라는 주제는 근대과학의 시대를 거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부활은 자연과학적 입증의 문제라기보다는 인문과학적 상상력에 더 가까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을 자연과학의 눈으로 보면 그 뜻을 캐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변혁적 상상력이 고갈된 정신에 있습니다.

부활이라는 기독교 교리는 육체로 복귀하는 사체소생(resuscitation)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죽음을 이겨낸 어떤 변혁적 실체'에 관한 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혁적 실체를 가리켜 바울은 44절에서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나중에 복음서에 기록될 설화들, 예수의 죽은 육체가 사라진 빈 무덤에 관한 많은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은 시대, 잠자는 사람들 가운데 일어난 부활의 첫 열매를 어떻게 맺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지배를 뚫는 길, 죽음의 힘을 폐지시키는 혁명적 정신과 연관됩니다.

바울은 12절에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부활은 육체적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철학적 진술이 아닙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 헬레니즘 문명에는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이어진다고 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을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적 죽음 자체가 모든 것의 끝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는 바울이 말하는 부활(ἀνάστασις/resurrection)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부활은 단지 죽음 이후에 있을 영혼의 사생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신 사이의 사랑의 연대를 뜻하고, 그것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동체적 연대를 촉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모든 죽은 이들의 부활 사이의 연관관계입니다. 바울은 13-17절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과 희망도 헛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총, 그 은총이 열어가는 세계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하나님의 은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현재적 고투는 의미를 잃게 됩니다.

바울의 이런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절에 나오는 그의 인생관을 참조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향해 살아가야 합니까?

여기서 바울의 두 번째 주장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20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들의 믿음이 헛되지 않을 수 있는 영원한 토대를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찾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읽어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만의 부활이 아니라 모든 이의 부활이요 (15:22), 마침내 죽음 자체를 폐지하는 것에 이릅니다 (15:26).

그리스도가 잠자는 이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이 말씀과 함께,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신앙 공동체에게 묵직한 과제를 던져줍니다. 부활의 주님을 의지하는 삶이란 잠든 시대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는 것이라는 권면입니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같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잠자는 시대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고자 하는 신앙공동체의 분투입니다.

 

이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이들의 기도와 합력을 통해서, 특히 교회의 각 기관을 이루는 제직들의 헌신을 통해서 신앙의 공동체로서 가져야 할 생명력을 더욱 생생하게 키워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파송사]

주님을 의지하여 살아가십시오.

자신의 믿음과 확신을 세상적인 성취에서 찾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깊은 곳에서 지어가십니다.

현재의 가난과 기갈과 눈물이 주님을 향하게 하십시오.

잠자는 시대에 부활의 첫 열매로 초대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길을 열어 가십시오


List of Articles
날짜 제목
2019-08-11 믿음으로 열어가는 평화 | 김종일 김희헌 | 2019-08-11
2019-08-04 아, 누가 나의 말을 기억하여 주었으면! | 김희헌 | 2019-08-04
2019-07-28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 | 조은화 | 2019-07-28
2019-07-21 그것은 물이 없어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 김희헌 | 2019-07-21
2019-07-14 이웃이 되어주는 교회 | 김희헌 | 2019-07-14
2019-07-07 평화로 가는 길 | 김희헌 | 2019-07-07 2
2019-06-30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 이성환 | 2019-06-30
2019-06-23 믿음이 나타날 때 | 김희헌 | 2019-06-23
2019-06-16 온 누리에 서로 사랑 |김가흔/ 조은화 | 2019-06-16
2019-06-09 성령이 이끄는 삶 | 김희헌| 2019-06-09 1
2019-06-02 생태적 신앙 | 김희헌 | 2019-06-02 1
2019-05-26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 김희헌 | 2019-05-26
2019-05-19 새 계명 | 김희헌 | 2019-05-19
2019-05-12 생명의 샘물 | 김희헌 | 2019-05-12
2019-05-05 만물이 외치는 소리 | 김희헌 | 2019-05-05
2019-04-28 의심하는 믿음 | 박재형 | 2019-04-28
2019-04-21 부활, 평화를 보다 | 김희헌 | 2019-04-21
2019-04-14 예수의 마음 | 김희헌 | 2019-04-14
2019-04-07 믿음의 꿈 | 김희헌 | 2019-04-07
2019-03-31 하나님과의 화해 | 김희헌 | 2019-03-31
2019-03-24 다함께 봄 | 조은화 | 2019-03-24
2019-03-17 아, 사람! | 김희헌 | 2019-03-17
2019-03-15 사랑 그건... | 정준모 / 정상희 / 김정원 | 2019-03-10
2019-03-03 역사의 변모 | 김희헌 | 2019-03-03
2019-02-17 주님을 의지하는 삶 | 김희헌 | 2019-02-17
2019-02-10 사람을 낚는 어부 | 김희헌 | 2019-02-10 1
2019-02-03 오늘 이루어진 말씀 | 김희헌 | 2019-02-03
2019-01-27 불가능의 가능성을 꿈꾸는 공동체 | 이성환 | 2019-01-27
2019-01-13 사람,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 | 김희헌 | 2019-01-13
2019-01-06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 김희헌 | 2019-01-06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Next
/ 12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