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변모 (출 34:29-35, 고후 3:12-4:2, 눅 9:28-36)
2019.03.03 (주현절 마지막 주일, 예수변모주일)
[예수의 변모와 역사의 변모]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로서 이번 주 수요일부터는 새로운 신앙의 계절인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한 절기가 마무리되는 주현절 마지막 주일을 많은 개신교회는 ‘예수변모주일’(transfiguration Sunday)로 삼고 기념해왔습니다. 복음서의 기록 가운데, 산 위에서 변화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관한 의미를 묵상하는 주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절기를 구분하는 전통이 교파마다 다르지만,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의 변모사건을 기념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는 개신교 전통은 신앙생활에 무언가 암시를 준다고 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뒤이어지는 ‘그의 수난’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는 점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많은 오류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은 ‘승리를 통한 지배’에 있지 않고, ‘수난을 통한 구원’에 있다는 믿음을 지켜왔다고 하겠습니다.
주초에 성경본문을 묵상하며 하늘뜻펴기의 방향을 구상할 때만 해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변모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앞으로 한반도에서 펼쳐질 새로운 시대를 축복하는 말씀처럼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지난 목요일 하노이에서 있었던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양국 정상이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회담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성경본문의 말씀을 다시 읽고, 어떻게 들려오는지 마음을 새롭게 쏟아야 했습니다.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과물 없이 마치게 되어 많은 분들이 허탈감을 느끼며, 평화가 쉽게 오지 않는 한반도의 엄중한 현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타결에 근접했던 이번 회담의 경험이 앞으로 이어질 만남에서 긍정적인 토대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현재 상황을 동트기 전의 어둠으로 봐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새로운 국제관계를 지어가는 과정에서 보다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과 다짐이 우리 사회에 더 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공고한 체제가 불현 듯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역사의 모습입니다. 일제 식민지배가 무너지고 해방이 찾아왔듯이, 이 길고긴 분단체제도 무너지고 마침내 평화와 통일의 시대가 환히 열릴 것입니다.
문제는 분단체제를 견뎌오던 옛 방식대로 새로운 시대를 지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질곡으로 빠뜨리는 사회적 불평등과 승자독식의 비정한 삶의 문화가 어둡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어둠을 걷어내면서, 서로 돌보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고린도후서 3장 18절이 말하는 것처럼,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며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해 역사가 전진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참으로 가슴 벅찬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앞으로 굴러가는 역사의 모습에서 감춰졌던 하늘의 뜻을 읽어 내고, 종교는 계시처럼 밝혀진 역사의 그 환한 얼굴에서 메시아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오늘 성경본문에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그것을 한 개인의 사건으로 읽기보다는, 그를 둘러싼 시대와 역사의 사건으로 읽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늘의 계시로 빛나는 얼굴 / 출애굽기 34장 29-35절]
출애굽기 34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내려온 모세와 그를 산 아래에서 맞이한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산에 올라가서 사십 일 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던 모세가 마침내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들고 내려옵니다. 그때 모세의 모습에 대해서 본문 29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알지 못하였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모세의 얼굴에서 영광스러운 광채가 빛나자 사람들은 모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나님과 대화할 때는 그것을 벗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 공동체가 하늘의 계시를 율법으로 받은 시내산 계약과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그 형식은 모세 개인의 삶에 있었던 특이한 경험에 관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공동체 안에서 경험된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전체 흐름을 이끌어가는 두 가지 상징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세의 빛나는 ‘얼굴’(panim, face)이요, 다른 하나는 그 얼굴을 가린 ‘수건’(masveh, veil)입니다. 앞에 나오는 빛나는 얼굴은 비교적 그 뜻이 분명합니다. 하늘의 뜻을 삶의 좌표로 삼은 개인이든, 하늘의 부름에 응답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역사의 어떤 순간이든 간에, 빛나는 얼굴은 이 땅에 임한 하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수건’의 상징은 분명치 않습니다. 출애굽기 34장의 맥락을 보면, 수건은 땅에 임한 하늘의 영광이 사람들을 해치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모세의 배려조처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또 다른 본문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는 바울의 해석을 고려하면, ‘모세가 수건을 자기 얼굴에 두른 이유’는 난해한 문제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모세가 수건을 쓴 이유를 가리켜,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가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13절)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해석의 차이가 생겨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자 하는 모세의 심정을 바울이 오해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모세의 사건으로부터 천오백 년이 지난 후에 재조명된 바울의 해석에는 다른 무엇이 담겨 있는 것일까요? 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심리적 동기에서 찾기보다는, 역사가 변모해가는 모습에 주목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역사에 나타난 빛나는 얼굴과 그것을 가리는 베일]
지난주에는 삼일운동 백주년을 기념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제국의 시대를 접고 민(民)이 주인이 되는 시대를 열고자 했던 우리 민족 분투의 역사를 생각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백 년의 기간 동안, 우리 민족의 역사에는 마치 하늘의 영광이 깃든 것처럼 환하게 빛나던 얼굴이 최소한 다섯 번 나타났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영광으로 인해 생겨났지만 결국 그 영광을 가리는 수건처럼 작동하는 일 또한 이어졌습니다.
역사에 나타난 빛나는 첫 번째 얼굴은 8·15 해방입니다. 나라를 빼앗긴 36년의 한과 설움을 씻는 함성이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그런데 해방의 영광을 가리는 수건이 등장합니다. 해방군처럼 진입한 미군이 민중들의 요구를 짓밟고 군사 통치를 통해서 남한사회를 자기 입맛대로 재편성한 것입니다. 결국 미군정 3년 만에 분단이 제도화된 <48년 체제>가 탄생하고, 뒤이어진 한국전쟁의 비극적인 여파로 인해 남한사회는 어둠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두 번째 빛나는 얼굴이 등장합니다. 4·19혁명입니다. 미국에 기대서 장기집권을 꿈꾸던 이승만 숭미사대주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곧 이어 민주적 열망이 담긴 역사의 얼굴을 가리는 수건이 등장합니다. 혁명을 가장한 군인들이 벌인 5·16 쿠데타입니다. 이들은 반공을 국시로 삼고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사회를 공포로 몰고 갔습니다.
세 번째로 등장한 역사의 빛나는 얼굴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입니다. 한 철학자는 그 운동을 가리켜 ‘한국역사에 기록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타인의 고통에 목숨을 걸고 응답하려는 용기에 기초한 연대의 공동체’를 우리 사회로 하여금 경험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김상봉, 철학의 헌정) 불과 며칠 동안의 해방 공간을 만든 후 이내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서 점령당했지만, 이 시민항쟁은 이후의 정치세력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여 군사적인 수단을 활용하는 것을 단념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네 번째 얼굴은 1987년의 유월항쟁입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이 시민항쟁은 군인들에게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오며 <87년 체제>로 불리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갖춘 사회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자유의 바람을 타고 밀어닥친 신자유주의 경제는 약자와 빈자들에게는 거의 재앙적인 세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역사의 얼굴은 2016년과 2017년 사이의 겨울에 있었던 촛불혁명입니다. 이 시민혁명은 민주주의 운동사에서 매우 특이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서로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삶이 자기 땅에서 유배된 상태라는 것을 점차 깨달아갔고, 마침내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존엄한 시민으로 완성되어가면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혁명을 부지불식간에 전개하였습니다.
촛불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절망의 사람들에게 스스로 뛰어넘을 것을 요청하고, 그 도약은 타자의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들려오는 어떤 부름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 운동의 독특한 모습이 되어, 미래를 구성하는 새로운 영감을 이 세계에 불어넣었습니다.
이렇게 지난 일백년 동안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분투 속에서, 하늘의 진리가 빛나는 역사의 얼굴로 등장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하늘의 영광을 감추고,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싸매는 수건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분단입니다. 현재 한반도에서 펼쳐지는 평화의 흐름은 이 수건을 걷어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단이라는 수건에 꽁꽁 묶인 한반도는 서로 38선 너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월을 오래 살아왔습니다. 분단은 민족의 정신을 질곡으로 몰고 갔고, 그 여파를 오늘날에도 여기저기서 봅니다. 지난 금요일, 삼일절 백주년을 기념하는 날에 벌어진 태극기부대의 집회에는 그 동안 우리 역사의 진실을 가렸던 많은 수건들이 등장했습니다. 반공, 한미동맹, 건국절, 빨갱이 등 낡은 시대의 율법을 기록한 문자들이 우글거렸습니다.
역사적 진실에서 멀어진 그 모습에 기댄 타성의 정치와 율법의 종교가 여전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너울을 벗고 자유를 입은 삶 / 고린도후서 3장 12절 ~ 4장 2절]
고린도후서 3장에서 바울이 모세를 비판한 것은 어떤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삶을 산 모세를 폄하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기보다는, 자기 시대를 향한 어떤 문제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아는 것은 쉽지 않지만, 오늘 본문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는 있습니다.
본문 14/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은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여기 나타난 바울의 문제의식은, 모세가 받은 하늘의 계명이 이제는 율법이 되어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계시로 받은 빛나던 약속이 문자적 계명이 됨으로써, 그 해방의 약속이 도리어 삶의 제약과 굴레로 변해버리는 사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 일은 단지 모세와 바울 사이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에서 일어나는 비극입니다. 한 때는 하늘의 영광을 담은 해방의 말씀이 시대가 흐르면서 율법의 계명으로 전락하여 삶을 옭아맬 때, 새로운 길을 어떻게 놓을까? 바울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의 해결책은 진리를 감추는 수건, 그 ‘너울’(kalumma, veil)을 벗겨버리고, 자유의 영을 호흡하면서 율법 너머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16/17절의 말입니다.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서면, 그 너울은 벗겨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해방의 성취가 또 다른 올가미로 변해버리는 역사의 비극을 견뎌내는 길을 바울은 자유를 주시는 하늘의 영을 따라 살아가는 삶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의 영광에서 다음 단계의 영광으로 그 자유의 폭과 깊이를 넓혀가는 긴 과정이라고 바울은 보았습니다. 그것을 1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너울에 가려져서 생긴 무지와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을 바울은 영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찾았습니다. 그 삶은 하늘에서 밀려오는 역사의 은총에 힘입은 것이지만, 또한 그 삶을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4장 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diakonia)을 맡고 있으니,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직분’으로 번역된 단어는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입니다. 그것은 ‘섬기는 삶’입니다. 수건으로 진실을 가린 채 군림하지 않고, 자유의 영을 따라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역사의 비극을 이겨내는 길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소망을 갖고 담대하게 살아가자고 고린도의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고후 3:12)
[변화산 위의 두 모습 / 누가복음 9장 28-36절]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변모사건은 일개인의 신비와 거룩에 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변화된 삶을 살고자 하는 신앙공동체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누가가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 기도하는 중에 그 모습이 변합니다. 얼굴의 모습만이 아니라, 그 옷도 눈부시게 희고 빛이 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의미는 예수님의 옆에 나타난 두 해방자로 인해 분명해집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빛나는 ‘해방과 예언의 시대’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와 함께 대화를 나눕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누가복음 본문에는 그 대화의 내용까지 나옵니다. 이 대화의 주제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 즉, 그의 떠나가심’에 관한 것이었다고 31절은 말합니다.
여기서 ‘떠나가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엑소도스’(ἔξοδος)입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이루실/성취하실(pleroo, accomplish) 것은,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하듯, 제국의 질서를 벗겨내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그 일은 가나안을 정복한 출애굽과 같이 또 다른 지배를 위한 탈출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한 운동입니다. 새로운 문명은 바로 그것을 통해서 열린다는 것이 예수의 믿음이었습니다.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의 의미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은 아직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스승이 기도 중에 역사의 해방 전통과 대화할 때, 제자들은 잠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진리를 가리는 상징이 ‘수건’이었다면, 복음서 본문에서 그것에 해당되는 것은 제자들의 ‘잠’입니다. 제자들은 잠을 이기지 못하고 졸다가,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내뱉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들은 역사에 등장한 하늘의 영광을 초막에 모시겠다는 가당치 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잠에 빠진 시대, 잠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잠을 자도록 만드는 종교와 언론, 이들은 사람들이 율법과 문자를 넘지 못하도록 초막을 짓고 머물게 만듭니다. 자유의 영이 인도하시는 대로 생동하는 역사를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에게 해방의 역사는 구름처럼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리가 울릴 때 해방의 실체는 확연해집니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하늘 말씀과 함께 모든 구름이 걷히며 환상은 사라지고, 예루살렘에서 있을 예수의 길이 또렷해집니다.
누가복음의 이 증언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찬양이라기보다는 우리를 진리로 이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의 변모사건은 구원사역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혀줍니다. 시대의 율법에 갇힌 잠에서 깨어나 자유의 영이 이끄시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기 원하는 우리는 이 역사가 걸어야 할 해방의 행진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역사의 빛나는 얼굴을 가리는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나 너울을 벗고 자유를 입은 삶으로 초대하는 하늘의 은총은 더욱 신실하게 펼쳐질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안겨주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 모두의 삶과 이 신앙공동체의 앞길에 있기를 바랍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변모하는 역사의 모습에는 하늘의 계시가 담겨 있습니다. 역사 속에 정의와 평화를 넓혀 가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화해와 통일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영을 따라, 길었던 분단의 너울을 벗고, 서로 돌보고 서로 섬기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힘차게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