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저희는 지금 사순절 다섯째 주일의 힘든 고갯길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심과 수난을 앞두고 마지막 시간을 어렵게, 어렵게 예비해 가신 것과 같이 저희도 이 한국 땅에서 어둡고 힘든 세월 중에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한 점의 불씨가 강원도 속초 고성의 산불로 이어져 강원도의 봄은 잿더미가 되고, 국가재난사태가 선포됐습니다. 마을 자체가 여러 곳 없어지고, 불탄 숲이 복구되려면 10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저희의 마음도 까맣게 타서 내려앉았습니다. 저희의 부족함과 아둔함 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 가족과 일생 동안 일궈온 삶의 터전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산불 지역의 안타까운 동포들에게 함께 하옵소서. 그곳에서 당신께서 새 길을 열어 보여주시길 기도합니다. 저희의 이 기도를 들어주소서.
하나님, 늘 4월은 힘들고 잔인한 시기라고 하지만, 저희는 저희가 경험했던 4월의 몇몇 죽음을 잊지 못합니다. 44년 전 1975년 4월 9일에는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계자 8명이 정치적 사형 선고 하루 만에 서대문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서도원·김용원·이수병·우홍선·송상진·여정남·하재완·도예종, 이렇게 8분은 이제 재심 결과 모두 무죄가 확정되었지만,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되살릴 길은 없습니다. 이들이 숨진 4월 9일은 국제사회에서 ‘사법 암흑의 날’로 규정되었습니다. 그 암흑을 저희는 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죽음은 더 있었습니다. 그 사법살인의 이틀 뒤인 그해 4월 11일, 수원의 서울대 농대에서 김상진이라는 젊은이가 “어두움이 짙게 덮인 저 사회의 음울한 공기를 헤치고 죽음의 전령사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다”고 외치며 박정희 유신독재에 항거해 할복으로 자신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또 한번 어두움이 한국사회에 내려앉았습니다. 그 사이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질 때와 같은 고통이 우리 사회를 뒤덮었습니다. 암흑은 끝 간 데 없이 세상을 휩쓸고, 독재는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숨 막히는 나날이었습니다. 하나님, 독재의 암흑 속에서 죽어간 이들의 영혼들을 받으시고, 저희가 그들의 죽음 속에서 영생의 씨앗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그 힘든 세월을 견디고 저희가 2019년의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촛불혁명의 힘으로 이제는 어두움을 걷어내고 민주주의를 원위치로 되돌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통일의 과제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세상은 마구 逆進하고 있습니다. 아슬아슬하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결국 결렬로 끝났고,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정권은 혹시 제 풀에 주저앉은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사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철지난 구 정치세력들이 다시 자기 세월을 만난 듯 후안무치하게 날뛰고 있습니다. 전두환은 자신이 1980년 광주에서 한 일을 무조건 부인하고, 박근혜의 충복이었던 황교안은 자신이 박근혜 정권에서 한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반성하지 않은 채 ‘지지율 1위’에 도취되어 기고만장합니다. 태극기부대는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국민이 세운 정권은 경제의 덫, 인사의 덫에 걸려 세상의 逆流를 막을 힘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 봄이 봄 같지 않고, 온 세상에 다시 어두움이 내려앉았습니다. 까맣게 탄 것은 강원도만이 아닙니다. 오는 11일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일이지만, 이제 입을 열어 삼일운동 100년, 시민혁명 한 세기, 대한민국 민주공화제 100년을 기억하고 기릴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암흑에 뒤덮였는데, 민주주의는커녕 박정희의 악령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데, 저희가 무엇을 기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이 한반도와 대한민국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어두움을 물리칠 힘을 저희에게 허락하옵소서.
하나님, 저희가 오늘 예배 후에 제직수련회로 모입니다. 향린의 미래를 위한 저희의 지혜를 모으고자 합니다. 그것은 결국 이 암흑의 세상을 이기기 위한 지혜를 모으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저희의 안타까운 심정에 함께 하시고 저희의 주장이 되셔 서 마침내 새 하늘 새 땅에 이르는 길로 저희를 이끄소서.
이제 당신의 지혜를 간구하며 저희의 입을 닫습니다. 저희의 까맣게 타들어간 심령에 한 줄기 빛으로 오시옵소서.
(침묵)
2000년 전 고난의 길을 피투성이가 된 채 헤치고 나아가 마침내 승리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