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음 (사 50:4-9a, 빌 2:5-11, 눅 23:1-49)
2019.04.14. 종려주일
[종려주일 묵상]
오늘은 종려주일로 고난주간의 시작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갈 당시의 예루살렘은 식민 질서의 모순이 중첩된 곳으로서, 억압과 풍요, 지배와 저항이 교차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을 향해 어린 나귀를 타고 가는 예수님 일행과 그 초라한 모습을 보고 환호하는 군중들, 그리고 다가오는 예수의 체포와 심판과 죽음의 장면을 그려보면, 이 마지막 일주일이 마치 인생의 압축이자 역사의 압축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하는 예수님의 일행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생명을 억압하는 체제를 타파하고 극복하려는 도전과 모험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거대한 체제를 향해 돌격하는 그들이 의탁한 것이 고작 어린 나귀였다는 것은 그들이 꿈꾼 구원과 해방이 여타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을 향해 쏟아졌던 군중들의 환호가 얼마가지 않아서 조롱과 배신으로 변할 때, 우리는 현실에서 반복되는 익숙한 좌절이 예수의 일행에게도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낙담케 하는 것들마저도 마침내는 구원의 요소로 바뀌면서, 죽임과 파멸의 도구 십자가를 구원과 희망에 대한 상징으로 변화시키는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제자 유다의 배신마저도 구원의 계기로 품어내고, 십자가에 못 박는 군인들의 비난까지 모두 고난의 품에 녹여내는, 역설적이고도 두터운 구원사의 드라마를 우리는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을 미리 그려보는 종려주일에 우리는 예수의 길이 한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구원의 길, 해방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의 행진이요, 인류의 모험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구원과 해방의 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옮기는 예수의 고단한 발걸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과정을 아무리 눈을 뜨고 지켜봐도 하나님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 순간 만일 하나님이 예수와 동행했다면, 그는 고난과 수치를 당하는 사람들의 동반자였지, 기적을 일으키는 신은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주변에 일렁이는 신의 그림자는 사람들이 기대하던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를 향해서 ‘너를 구원해보라’고 말할 때, 만일 신이 거기 있었다면 그는 모욕을 감당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걷는 구원의 길에, 적어도 오늘날 교회를 가득 채운 신의 목소리는 한 번도 울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신봉하는 전지전능한 기적의 신은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런 신은 예수와 무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적의 신은 이스라엘이 포로기를 거치는 동안 이미 죽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5주기가 다가옵니다. 한국교회는 이 큰 재난과 슬픔에 상처를 더하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성장과 축복을 선사하는 힘의 신을 숭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신앙은 더 이상 그런 방식으로 진행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기독교 신앙은 가라앉는 배를 들어 올리는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겨진 신에게 절을 올리는 행위를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대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으며 수천수만 번의 저항을 감당한 부모들과 그들의 곁을 지켰던 사람들이 죽어간 이들을 어떻게 이 사회 속으로 부활시키고 있는지를 볼 때 교회는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세월호의 죽음과 비극에 얽혀있는 사람들이 조롱과 저주와 비난과 진압과 모욕과 가난과 좌절 속에 날마다 죽어가면서도, 어떻게 이 땅을 마침내 구원의 길로 인도해냈는지를 깊이깊이 들여다보는 데에서 우리는 오늘 이 땅에서 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을 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종려주일에 예수의 길을 묵상하는 우리의 과제라고도 하겠습니다.
[예수의 길, 새로운 길, 누가복음 23장 1-49절]
누가복음서의 본문은 예수께서 심판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룹니다. 본문이 길다보니 주목할 만한 대목이 많습니다만, 내용을 크게 세 장면으로 나누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식민질서의 지배자들이 보여준 모습이요, 둘째는 그것에 맞서 일어난 혁명운동과 군중들의 기대에 관한 것이요, 마지막은 예수가 걸어간 길이 가진 특징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생각해볼 것은 지배질서를 대변한 로마총독 빌라도와 유대 왕 헤롯입니다. 본문에서 빌라도 총독은 합리적인 사람처럼 등장합니다. 그는 세 번이나 예수를 옹호하며, ‘내가 보기에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면서 그를 기소하려는 사람들과 맞섭니다. (4, 15, 22절)
이런 묘사에는 빌라도에게 예수 처형의 혐의를 덜어주려는 복음서 기록자의 특별한 동기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여전히 로마 체제를 견뎌야 하는 당시의 상황에서, 무리한 적대관계를 피하고자 했던 신생종교의 고충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로마총독이 그렇게 정의로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서의 기자는 앞에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 제물에 섞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습니다. (눅 13:1) 그것이 냉정하고도 잔학하게 식민 질서를 유지해간 로마 총독의 본 모습이었습니다.
이들과 결탁한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식민세력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자신들의 경력을 쌓아온 이들은,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자생한 토착왜구처럼, 자기 민족을 억압하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것이 습속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헤롯이 보여준 비열한 모습과도 같습니다.
누가복음서 기자는 12절에서, 헤롯이 예수를 조롱하고 화려한 옷을 입혀서 빌라도에게 보냈을 때, 이전에 원수였던 그들이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묘사에서 권력자들의 습속이 드러납니다. 이들은 무고한 자를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불의한 권력을 이어갑니다. 이들이 숭상하고 전파하는 힘의 종교는 화려하고 장엄하지만, 구원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지배체제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혁명운동가 바라바를 언급합니다. 그는 ‘폭동과 살인’ 죄목을 가졌는데, 여기서 ‘폭동’으로 번역된 단어 ‘스타시스’(stasis)는 혁명과 봉기를 뜻합니다. 그는 살인이 동반된 혁명을 일으키다 잡혀 와서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사람들로부터 매우 존경받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라바’(barabba)라는 이름은 합성어로서, 아들을 뜻하는 ‘바르’(bar)와 하나님을 친근하게 부르는 ‘아바’(abba)가 합쳐져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그 혁명가의 본명이라기보다는 별명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총독이 명절에 죄수를 석방하는 관습을 따라 누구를 놓아줄 것인지를 묻는 장면이 생략되어 있는데,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일한 장면을 보면, 빌라도가 군중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내가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바라바 예수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요?” (마 27:17) 바라바 역시 본명은 당시의 남성들에게 흔한 이름 ‘예수’였고,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고 불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라바를 살려 달라고 하였고, 그는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그가 살아났다는 데 주목하지 않습니다. 복음서가 주목한 궁극적인 중요성은 바라바가 살아난데 있지 않고, 예수가 죽은 것에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향해 걸어간 독특한 방식의 예수의 길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서는 바라바가 살아나게 된 경위보다 죽어간 예수의 경로에 주목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바라바를 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었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 있지만, 불가능한 해석은 아니라고 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예수의 동선 자체가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해석되지 않는 내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길은 후대에 교리적으로 단순화된 해석보다는 훨씬 더 생생한 진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서가 그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있는 그대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며, 죽음이 앞에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변호하지 않고 피동적으로 움직입니다. 마치 생의 의지가 없는 듯이 행동합니다. 권력자들에게는 핍박과 조롱을 당하며, 민중들에게는 버림받습니다. 이로써 복음서 기자는 바라바와는 다른 예수의 길을 그려내고, 그것이 바라바마저도 살리는 길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물론 그 길은 알려진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중들은 바라바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는 예수의 마음을 알아준 단 한 사람을 선정합니다. 그는 예수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 의미를 올바로 해석한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둔 예수를 보며,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한 로마 백부장입니다. (47절) 복음서 기자는 모두가 예수를 조롱하고 멸시하면서 죽음으로 몰아갈 때, 그 흐름에 반기를 든 사람을 아이러니하게도 억압자였던 로마 군인으로 택했고, 그의 입술을 통해서 십자가의 진실을 전합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무력하게 죽은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것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라’고 하는 그 시대의 상식에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는 로마군인의 입술에 진리를 담아 말하게 함으로써, 경건과 진리에 관한 당대의 상식을 뒤집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불행에 관한 비극적 서술이 아니라, 시대의 죄악을 이겨가는 길에 관한 깊이 있는 증언입니다.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개인적인 형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죄악이 얽혀 있습니다. 식민지배라는 근본적인 범죄가 있고, 진리를 말하는 자를 향해서 조롱과 멸시를 퍼붓는 시대의 환멸이 있으며, 거짓에 가담하여 스스로를 타락시키는 사람들의 실패가 십자가에 얽혀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은 예수가 걸었던 십자가의 길이 가진 의미를 곱씹고 곱씹다가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었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속량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진 것으로 해석합니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바쳤다’고 고백합니다. (롬 5:8, 고전 15:3, 갈 1:4) 그리고 그것이 십자가에 대한 기독교의 대표적인 해석이 됩니다.
이런 교리적인 해석은 역사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보낸 마지막 일주일 동안 예수의 마음을 주도한 것이 ‘인류를 대속하려는 염원’이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더 큰 신학적인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기 위해서 의인의 죽음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모독하는 주장이 될 것입니다. 이미 천 년 전에 삐에르 아벨라르라는 신학자가 그런 신은 ‘피에 굶주린 야만적인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안병무 역시 “다른 사람 대신에 아들이라도 죽여야 하는 그런 하느님은 예수의 하느님이 아니다”고 말합니다. (민중신학이야기, 91)
그렇다면 마지막 일주일 동안 예수를 사로잡은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를 통해서 생겨난 새로운 길이 구원의 길이요 해방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요? 이런 물음 역시 신학적 해석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을 우리는 빌립보서에서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빌립보서 2장 5-11절]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신앙인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원문대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던(was) 마음을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있게(is) 하십시오.’
바울이 해석한 예수의 마음은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그 마음을 통해서 구원을 여는 새 길이 놓였다고 봅니다. 그것이 죽음의 체제에서도 생명력 있게 새로운 공동체를 지어가는 마음이요, 새 세상을 열어갈 마음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바울의 설명이 나중에 교리적으로 굳어지면서 오해가 생겼는데, 그것을 해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해의 출발은 6절에 나오는 단어에서 비롯됩니다. 예수가 어떤 분인가를 설명하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읽은 새번역은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녔다’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잘한 것입니다. 개역성경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번역하고, 공동번역은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라고 합니다.
‘본체’나 ‘본질’은 적절한 번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후대에 발전한 삼위일체론이라는 교리에 영향을 받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원문은 여기서 ‘모르페’(morphē)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겉모습을 뜻하는 것이지 그 존재의 특성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주장하려는 것은 ‘예수의 본질이 하나님과 같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5절에서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은 택도 없는 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바울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처럼 보이는 예수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모습을 갖고 있어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품은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깨달은 그리스도의 마음은 세 가지입니다. 비우고, 낮추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비운다(empty)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를 비운(ekenōsen) 마음을 가리켜 바울은 ‘케노시스’(kenosis)고 하는데, 이 케노시스야말로 그리스도를 해석하는 기독교의 원리요,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기독교 윤리의 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비우는 것은 기득권층의 정신적 체중감량 활동이 아닙니다. ‘비운다’는 것을 마치 스토아학파처럼 군림하는 지배자의 자기성찰 정도로 보거나, 에피쿠로스학파처럼 더 큰 행복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은 바울에 대한 모독에 가까울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군림하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안달이 나서 예수를 믿는 것은 종교의 파산이라고나 하겠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비우는 것을 종(doulos)의 모습으로 자신을 바꾸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낮추는(humble) 것이요, 낮춘다는 말은 수치를 감내하는(humiliate)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기를 비우는 것은 순종하는(obey) 것입니다. 바울은 순종하는 마음을 가리켜 ‘후페쿠스’(hupékoos)라고 표현했는 데 그것은 ‘듣는다’(listen to)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바울은 순종하는 것을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예수의 마음에서 찾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말대로 예수의 마음을 품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고, 순종하며 사는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삶은 어떤 삶일까요? 그 삶은 밑바닥 인생이지요. 인생 파탄이요, 역사의 끝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하지만 그때부터 하나님은 시작한다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문명은 바로 그런 삶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바로 그런 예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고, 모든 무릎을 그 이름에 꿇게 하고, 모든 입이 가리켜 주님이라고 부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종교의 선전이거나, 훗날 기독교가 지배종교가 되어 범하게 된 제국주의적 책동이 아닙니다.
바울은 식민지배로 파괴된 삶이 회복되는 생명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우고, 종처럼 낮추고, 하늘의 뜻에 순복하는 사람들이 등장해야 한다고 보았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찾았습니다. 바울이 잘 그려낸 것처럼, 예수는 누구보다 구원을 열망했고, 구원의 삶을 바라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간 분이었습니다. (빌 2:12)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에 품어야 할 마음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고난 속의 깨달음, 이사야 50장 4-9a]
새로운 생명은 고난의 시절에 일어난다고 보는 것은 오래된 지혜입니다. 마치 예수의 수난을 미리 앞당겨 본 것처럼, 바울보다 수백 년 전에 제2이사야는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사 50:6)
이것은 포로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이사야는 그 삶이 버림받은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한 삶이었다고 배웁니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포로기에 얻은 지혜요, 수난에서 피어난 새로운 방식의 믿음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이 모두 꺼지고 나서야 깨닫게 된 역사의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지배의 지혜가 아니라 돌봄의 지혜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깨우친 사람’(limmudim)처럼 말하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귀를 열어 주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을 거역하지도 않았고, 주께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성서의 신앙공동체가 세월을 지나가며 얻어간 지혜는 분명합니다. 믿음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는 방향으로 자라났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듯한 암흑과 같은 시절에 도리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이 포로기에 생겨난 새로운 믿음이었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 복음서가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 역시 고난이 많은 민족이었습니다. 분단과 전쟁의 상처로 인해 지금도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 불편한 과거를 감추려는 사람들로 인해 아직도 역사의 밤을 사는 암담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치욕과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순종한 예수가 있었습니다. 그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늘 이 시대에도 태어나면서 어둠을 부활의 아침으로 바꾸어 갈 것입니다.
고독한 예수의 맘에 맺힌 그 믿음이 우리 마음에도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합시다.
[파송사]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치욕과 고통이 지배하는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얻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고, 순종한 예수를 본받읍시다.
그 때 우리들의 삶이 새로 지어질 것입니다.
거기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역사의 새 아침도 밝아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