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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부활, 평화를 보다 | 김희헌 | 2019-04-21

by 김희헌 posted Apr 21, 2019 Views 26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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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4-21

부활, 평화를 보다 (65:17-25, 10:34-43, 20:1-18)

2019.04.21. 부활주일

 

[부활, 현실을 넘는 상상]

부활주일을 맞아 함께 예배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금년에는 부활절의 의미가 또 새롭게 다가오는 듯합니다. 그것은 사회적 어둠이 갈수록 짙어지면서, 부활의 아침을 열어야 한다는 염원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촛불혁명의 열기가 식어가면서 개혁의 성과는 나오지 않는 반면, 수구세력들의 퇴행적인 활동이 커지고 있습니다. 또한 작년부터 풀려가던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평화가 쉽게 오지 않는 현실을 답답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오럴 헤저드라고 할 수 있는 무분별한 발언이 반복되면서 사회적인 신뢰관계가 크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수구정당에 속한 의원들은 세월호 참사 유족들을 향해 막말을 퍼부었을 뿐만 아니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부르며, 유가족을 비하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태를 가리켜 적반하장이라고 부르지요. 적반하장이란 도둑놈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뜻입니다.

어제 광화문광장에서는 국정농단으로 나라를 파탄으로 몰아간 세력들이 반성은커녕 도리어 촛불시민이 세운 현 정부의 남북평화체제 구축활동을 폄훼하는 발언을 쏟아놓았습니다. 긴 분단체제를 살아오면서 우리 사회는 평화를 압살하는 자들이 도리어 평화를 대변하는 것처럼 여기는 적반하장의 역사가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된 이유는 친일과 독재로 얼룩진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지 못하고, 미래를 향한 대담한 상상력이 역사를 주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뒤죽박죽이 되어서, 과거는 현재의 발목을 잡고, 현재는 과거에 묶여 미래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역사에 대한 윤리를 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과거를 올바로 기억하지 못한 사회는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으며, 이해관계에 함몰되어 진실을 외면하는 사회는 고통스런 현재를 겪을 수밖에 없으며, 상상력을 잃은 사회는 더 나은 미래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를 위한 윤리가 사실에 대한 기억이라면, 현재를 위한 윤리는 진실에 입각한 실천이요, 미래를 위한 윤리는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앞르로 적반하장의 세력들을 씻어내기 위해서는 현실을 뛰어넘는 대담한 상상력을 펼쳐가야 합니다. 그것을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이 역사 속에 부활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언이란 2천 년 전에 벌어진 과거를 소환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평화를 오늘에 심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먼저 평화를 생생하게 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절, 요한복음 201-18]

요한복음이 기록한 부활절 아침의 주인공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10절까지 전반부는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 빈무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돌아간 남성 제자들의 실패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후반부는 부활하신 예수를 본 마리아가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다는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여성이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는 어린이와 여성들이 성인남성의 소유물처럼 취급되는 남성중심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늘 예수님과 동행했던 제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후대에 남성중심의 교회 권력구조가 형성되고 난 다음에는 여성제자들을 향한 신학적 모함이 있기도 했습니다. (591, 교황 그레고리 1세는 막달라 마리아를 가리켜 회심한 창녀라고 표현함) 그러나 기록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매우 탁월한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1896년에 이집트에서 발견된 [마리아복음서]를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권위 있는 제자로 묘사됩니다. 그 이야기를 잠시 하면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마리아에게 요청합니다. “자매님,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주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듣지 못한 것을 들려주기 바랍니다.” 그러자, 막달라 마리아는 당신들에게 감춰졌던 것을 말해주겠다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안드레가 반문합니다. “내게는 그 가르침이 생소해서, 주님께서 그 말을 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소.” 베드로도 맞장구를 칩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베드로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주님에 대해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레위가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이야기는 끝납니다. “베드로 당신은 지금 마치 적이라도 되는 듯이 마리아와 다투고 있소. 그런데 만일 주님께서 그녀를 소중하게 여기셨다면, 그녀를 거부하고 있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그녀를 잘 아시지 않았겠소?” (The Nag Hammadi Library, 525-7)

결국 이 복음서는 교회가 정경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탈락하여 점차 잊혀갔습니다. 그 과정은 교회가 여성 지도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고, 그것을 개혁하고자 했던 개신교 가운데 일부는 아직도 여성들에게 안수를 주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이 기독교는 적반하장의 종교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복음서는 부활절 아침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남성 제자들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9-10). 그러나 마리아는 선생을 만날 때까지 슬픔의 자리를 지킵니다. 그리고 스승을 잃은 좌절의 자리에서 마침내 부활한 스승을 다시 보게 됩니다. 그녀는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는 것과 주님께서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녀로부터 부활의 소식이 펼쳐집니다.

 

[베드로의 설교, 사도행전 1034-43]

사도행전의 본문은 베드로가 로마군인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예전에 베드로는 율법에 사로잡혀서, 이방인과 어울리기를 꺼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차별과 배제를 담은 율법 너머에 있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어느 민족에 속한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만민을 위한 것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이제 베드로에게 복음은 이제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는 것이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차별이 없는 복음이라고 하여 모두에게 다 열려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흗날에 살리시고, 나타나 보이게 해주셨습니다. 그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여 주신 증인인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0-41)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만민의 권리가 아니라, ‘증인’(martus) , 자기 운명을 걸고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의 설교는 이중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차별이 있는 율법과 대비하면서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평화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사람들은 선택된(chosen, 41) 증인들뿐이라고 강조합니다.

베드로의 이 주장은 값싼 은총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우리를 고민에 빠뜨립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이 담긴 이 세계에는 차별과 배제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사람은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예수가 이끄는 곳으로 자기 운명을 걸고 나아가는 사람(martyr)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의 겉모습은 신비이지만, 속 내용은 대담한 상상이자 도약입니다. 여기서 부활을 교리로 대하는 사람들의 오류가 생겨납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신비에 정통한 듯이 행동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교리적으로 믿어버림으로써 실제 삶으로는 안심하고 나태해집니다.

기독교는 본래 교리에서 출발한 종교가 아니라 예수의 삶에서 태어난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삼라만상을 깊은 뚫어다 본 설명적 교리로서 시작했다면, 기독교는 예수가 삶으로써 보여준 설명적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지나 부활에 이른 예수의 몸 자체가 역사를 위한 시()가 되고, 예언의 상상이 되며, 우주를 떨리게 하는 음악이 된 사실을 깨달은 데서 출발한 것이 기독교입니다. 따라서 그 몸에 참여하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이요, 그 핵심은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과 함께 걷는 평화의 길입니다.

 

[평화를 향한 세 가지 상상, 이사야서 6517-25]

그리스도의 평화를 그려내는 예언자적 상상력의 뿌리에 이사야의 비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서 65장에는 평화에 관한 세 가지 상상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17절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상징되는 우주적 재창조에 관한 상상입니다. 이것은 제3이사야로 알려진 예언자의 사상적 특징으로서, 성경의 마지막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평화사상입니다.

둘째로 21-22절에서 그려진 평화로운 일상은 많은 예언자들이 말한 평화의 실체입니다. (4:4, 28:26, 3:10) 낙원에서의 영원한 삶을 제안 받은 오디세우스가 그것을 뿌리치고 집을 향해서 발길을 돌리듯이, 자기가 심은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그 그늘에서 쉴 수 있는 일상은 가장 직접적인 평화의 상태입니다.

세 번째는 25절에 나오는 생태학적인 재창조입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먹고, 소와 곰이 함께 놀며 서로 해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상상은 새로운 관계방식에 관한 놀라운 비전입니다. 이것은 제1이사야로부터 물려받은 평화사상입니다. (11:6-9)

평화에 관한 이 세 가지 사상은 참 된 평화가 지녀야 할 세 가지 요소를 말해줍니다. 평화는 현실을 이끌어가는 이상(ideal)이어야 함과 동시에, 그것이 환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맛보는 상태(state)여야 하며, 또한 자기만의 자족이 되지 않도록 서로간의 관계(relation)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평화에 대한 상상이 없어도 현실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서 도리어 보지 못하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철들면서 도리어 볼 수 없게 된 것이 많아진 경우입니다.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평화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예수의 평화를 맛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영원한 이상을 품고, 생명을 살리는 새로운 관계를 일구도록 부름 받은 것이 인간이 경험하는 생명의 신비요, 하늘의 축복이라 하겠습니다.

현실의 소란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평화를 마음속에 그려내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십시오. 죽음을 이긴 예수를 통해서 평화를 맛보십시오. 아무리 어두운 현실이라 할지라도 평화를 그려내십시오. 거기에서 새 하늘 새 땅을 향한 믿음의 행진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모두를 이끌어주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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