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이 외치는 소리 (행 9:1-6, 계 5:11-14, 요 21:1-19)
2019.05.05 / 부활절 3, 어린이주일
[어린이와 같은 삶, 변화는 들음으로부터]
오늘은 부활절 셋째 주일이요, 5월의 첫 번째 주일로서 어린이주일입니다. 따라서 부활절 성서묵상을 어린이주일과 관련된 주제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어린이와 관련해서 주신 두 개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첫 번째는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마 18:3-4)
두 번째는 어린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제재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주신 훈계의 말씀입니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다.” (막 10:14-5)
예수님은 어린이와 같은 사람을 두 가지로 이해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요,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신을 열고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외부 환경의 자극에 자신을 열어놓고 쉽게 받아들입니다. 주변 세계에 민감하고, 배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에게 마음을 열고,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나라가 움터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문화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귀를 닫고,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몰입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마치 세계가 없어도 자신은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 지 느끼지 못하도록 하고, 이 세상의 슬픔이 자신을 얼마나 비탄에 빠뜨릴 수 있는 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마음을 열면 알게 되고 이해할 수 있는데, 서로 귀를 닫고 듣지 않습니다. 마치 듣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입을 닫고 잠시 침묵기도를 드려보십시오. 5분 동안만 침묵을 유지하면, 그 사이에 자신의 맘을 스쳐가는 수많은 영상과 소리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밖의 많은 세계가 자기 안에서 메아리치는데, 평소에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의식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도, 자신의 생각과 말은 이 세상과 끊임없이 교감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무엇을 듣고 있는 지를 인식하고, 어떻게 말하는지를 깨닫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스스로 들여다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혹세무민의 소리에 현혹되거나, 진실을 외면한 세상의 소란에 넋을 잃고 말 것입니다. 자기 관심의 벽을 넘지 못하고, 다가오는 하나님나라의 소식에 귀를 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세 개의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할 만한 세 사람을 보게 됩니다. 바울과 요한과 베드로인데, 이들은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나라의 소식을 받아들입니다. 그들이 경험한 것은 하늘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신실한 태도 가운데 하나는 듣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가 자기 마음 밭에서 움이 트고 솟아나면, 거기서부터 하나님나라가 시작됩니다. 하늘에서 울린 소리는 사실 자기 마음에서 솟아난 소리이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들은 소리, 사도행전 9장 1-6절]
사도행전 9장의 본문은 사도바울이 경험한 회심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 사건은 율법종교에 매여 살던 사울이 삶의 방향을 바꾸어서 예수운동을 하는 전도자 바울이 된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된 계기는 하늘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그의 인생사에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바울은 나중에 자신이 왜 예수운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증언할 때 이 사건을 언급합니다. 사도행전 22장과 26장에 두 번이나 나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며칠을 걸어서 거의 도착하게 되었을 때,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깜짝 놀라,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런 뜬금없는 소리를 들은 바울은 난감했겠지요. 이때의 심정을 다룬 22장 10절을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합니다.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다.” 사도행전 26장에 있는 바울 자신의 증언을 따르면, 그 내용이 보다 분명합니다.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행 26:16)
이 사건을 경험한 바울은 이전에 자신을 이끌던 행동목표를 잃고,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이 회심사건을 종교적인 개종이나 윤리적인 회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했다거나, 도덕적인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경험한 이 사건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게 한 사건이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듣고, 자기 모습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남을 위협하고, 살기를 띤’ (breathing threat and murder) 사람으로서, 예수의 ‘길’(道, ὁδός)을 걷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묶어서 끌고 오기 위해서 다마스쿠스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마스쿠스는 국경 너머에 있는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부터 하루에 백 리씩 걸어서 일주일가량 가야 도착할 수 있는 먼 곳입니다. 바울은 그 긴 길을 포악한 마음을 품고 걸어갔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자기 종교에 대한 충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뙤약볕이 내리는 길을 걸어가면서, 그는 종교적 율법이 인간성을 먹어치운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때가 차자, 하늘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늘에서 들여온 이 소리는 어쩌면 바울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였습니다. 사도행전 22장을 보면, 바울은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은 그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늘에서 울려오는 음성은 바울 자신을 향한 물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왜 예수의 도를 믿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끌고 가려고 다마스쿠스를 향하고 있는가?’
스스로를 향한 이런 의문이 생겼을 때,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에게 진실하고자 했던 본래의 모습을 잃고 사는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지금 채우고 있는 것은 낡은 율법이요, 자신은 그 율법이 만들어낸 증오와 분노에 의해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앞이 캄캄해지고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울린 소리를 듣고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봐 온 세상에 대해서 눈이 멀자, 지금 자신을 움직이는 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을 움직여 갈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율법에 지배당한 삶이 아니라 하늘의 초대를 받은 삶을 꿈꾸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경험을 보면,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것과 자신을 발견하고 삶을 분별하는 것은 동전의 앞뒷면에 해당되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과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서로 분리된 일이 아닙니다.
[요한이 들은 소리, 요한계시록 5장 11-14절]
요한계시록 5장의 본문은 두 개의 노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천사들이 부른 노래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만물이 함께 외친 소리입니다. 그 내용은 ‘죽임 당한 어린 양이 힘과 지혜와 영광과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노래는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갇힌 상태에서 환상 중에 들은 소리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크게 보면 네 개의 환상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의 환상으로서 그 무대는 하늘궁전입니다. 중앙에 보좌가 있고, 거기에 어떤 분이 앉아 있습니다. 그 주위로 흰 옷을 입은 24명의 장로들이 둘러 앉아 있고, 그 옆에는 눈이 가득 달린 날개를 각각 여섯 개씩 가진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찬양을 하고 있는 하늘 예배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에 관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하늘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중앙보좌에 앉은 분의 손에 들려있는 두루마리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두루마리를 감싸고 있는 일곱 개의 봉인을 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풀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고뇌에 빠진 요한에게 장로 한 명이 다가와 말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사자’(leōn)와 같은 힘센 사람이 있다고, ‘다윗의 뿌리에서 나온 사자와 같이 존재’가 봉인을 풀어서 그들의 답답함과 슬픔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사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그곳에 있었지만 주목받지 못하던 어떤 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이었습니다. 이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받아들자, 장로들은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하늘과 땅의 노래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인 언어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하지만 묵시문학이라는 장르가 가진 특성을 이해하면, 그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묵시문학은 위기의 시대에 신앙공동체를 지키려는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벌어질 일에 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어둠의 시대에 역경을 뚫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두고 먼저 고려할 사항은 ‘두루마리의 봉인을 풀 자격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문제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운명의 열쇄를 누가 쥐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암시합니다. 역사의 방향과 사람들의 운명에 관한 열쇄를 도대체 누가 갖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로마제국의 억압을 당한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우리 시대의 난제를 풀어갈 수 있는 존재인가?
당시 로마제국의 질서는 너무도 분명한 현실이었고, 그 현실은 참담했습니다. 요한은 처참한 현실에서 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슬픔에 빠졌습니다. 장로는 과거가 전해준 믿음을 따라 ‘다윗의 뿌리에서 나올 사자와 같은 존재’를 것을 기대했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있었지만 보이지 않던 미미한 존재가 등장합니다. 그는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이었습니다. 어린 양이 일어나 두루마리를 받아들자, 새로운 노래가 시작되고, 하늘의 천사와 땅의 모든 피조물이 노래를 찬양을 부릅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모두 ‘어린 양이 놓은 새 길’을 걷겠다는 다짐을 담아서 ‘아멘’ 하고 예배를 마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어린 양에 대한 찬양’은 그 동안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에 대한 찬양과 경배가 맹목적으로 구성되고, 심지어 종교적 숭배가 억지로 강요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성서의 가르침이 억압의 수단이 되고, 해방의 메시지가 율법종교의 틀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이 본 이 두 번째 환상에 담긴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1장 9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지금 밧모(Patmos)라는 섬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언 때문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자기 시대의 모순과 어둠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의 절망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요한이 환상을 봅니다. 하늘과 땅의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먼저 나타나고,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두 소리는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세계의 운명을 십자가에 달린 ‘어린 양’이 쥐고 있다는 외침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민중들의 바람이요 꿈이었습니다.
인생에서 추구되는 대표적인 일곱 가지의 사항들,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축복을 받을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 요한은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 자격을 정치 지도자도 아니요, 사자와 같이 용맹한 자도 아니라, 오직 죽임을 당한 어린 양에게서 찾고 있음을 본 것입니다. 요한은 어둠과 절망 속에서 이런 민중적인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꾼 꿈은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이사야 예언자의 믿음이었고, 그것이 신앙공동체의 비전이 되었습니다. (계 21:1)
[베드로가 들은 소리, 요한복음 21장 1-19절]
요한복음 21장 본문은 제자들이 경험한 부활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두 개의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전반부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스승을 만난 일곱 제자의 이야기요, 후반부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길을 잃을 제자들이 다시 부름을 받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스승을 잃은 제자들은 생업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먼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베드로와 같은 선택을 합니다. 그들에게 부활절 이후의 삶은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밤 새워 노력했는데도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본문의 표현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사람을 낚는 일에서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 좌절의 자리에 스승이 오십니다. 그리고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따른 제자들은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때 눈이 떠져서 선생님을 알아보게 되었고,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들어 스승을 향합니다. 예수님은 밤새 수고한 제자들을 위해 생선을 굽고 빵을 준비하여 만찬을 베풉니다. 제자들을 위로하고, 성찬으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베드로와의 대화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먼저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은 그치지 않고 세 번이나 이어집니다. 그러자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받은 베드로는 그만 고민에 빠지고 맙니다.
베드로가 고민하는 이유를 대화 중에 사용된 표현에서 찾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페’였는데, 베드로는 우정을 뜻하는 ‘필리아’로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도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가페오’(agapeo)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또 다시 내가 ‘필레오’(phileo)합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물음이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네가 정말로 ‘필레오’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고민에 빠집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고민을 언어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랑’을 의미하는 동사, agapeo와 phileo는 큰 차이 없이 혼용되기 때문입니다. (요 5:20, 11:3, 36, 20:2) 대신에 베드로의 고민이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것은 스승이 잡혀가던 날 밤, 세 번씩이나 그와는 상관이 없다고 부인했던 비겁한 모습과 연관됩니다.
그날 이후 베드로는 자책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찾아와서 허탕을 치고 있는 삶을 위로하고,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거듭되는 이 질문은 베드로에게 이어지고 있던 ‘실패와 좌절’을 넘어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고심에 찬 마지막 대답을 마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주신 말씀은 ‘나를 따르라’(Ἀκολούθει μοι)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이제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길을 걸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말씀은 베드로의 마음에서 솟아난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세 곳의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늘과 땅의 소리를 듣고 갈 길을 찾은 세 사람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오늘 무슨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권의 어지러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그들이 외치는 혹세무민의 소리가 최근 높아졌습니다. 군사독재의 시대를 앞잡이처럼 살아온 자들이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성실함이 우리 시대를 불구로 만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가혹한 시기를 한 세대 넘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돈이 주인이 된 시대이기 때문에 학문연구가 되었든, 언론보도가 되었든 민중들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젊은이도 늙은이도 불행을 먼저 경험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지리멸렬의 시대를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사람들이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무엇이 우리가 일구어가야 하는 문명의 진보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함석헌 선생의 글을 잠시 묵상해 보겠습니다.
“진보주의의 용감한 현대인이여, 지금쯤 너의 생각을 돌이켜보아도 좋을 만한 때가 되지 않았나. 이때까지 돌진하여온 것이 반대 방향으로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볼 만하지 않은가. 진보! 너는 얼마나 많은 젊은 생명을 먹어치운 ‘몰녹’이냐. 인간이 죽기 위하여, 짐승 중에 어느 짐승보다도 더 참혹히 죽기 위하여 진보하느냐, 문명(을 일구)느냐? 진보는 그런 것일 수는 없다. 도살수가 있는 곳이 우리의 앞일 수는 없다. 이 차마 볼 수 없는 역사의 비극을 무위로 끝나지 않게 하는 일이 있어야 진보다. 이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의 뜻을 속 시원히 풀어주어, 우리로 하여금 모든 노력이 무용한 일이 아니요, 모든 피가 값없음이 아님을 설명하여주는 이가 서있는 곳이 우리의 나갈 앞이어야 한다. 아니다. 우리의 죽은 자들을 다시 살려주는 자가 있지 않는 한, 우리가 거기를 갈 곳이라 할 수 없다.” (잠깐 후에 오시는 이, 1947년 9월, 「저작집」 19:98)
요한이 본 환상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어린이와 같이 마음을 열면, 하늘과 땅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당신의 꿈을 마음에 심어주십니다. 사람이 귀로만 듣지 않고, 마음으로 무언가를 듣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어린 양과 같이 작은 존재가 이 역사의 봉인을 풀 자격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놀라운 지혜입니다. 요한이 들었던 그 만물의 외침이 우리 마음에도 솟아나, 푸르른 오월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만물이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약동의 계절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마음을 열고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고단한 삶을 사는 이웃들의 소리, 아름답게 노을 지는 자연의 소리, 부활의 언덕을 오르는 역사의 숨소리, 이 모든 소리가 맘에서 솟아오를 때, 우리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맘에서부터 세우는 복된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