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계명 | 김희헌 | 2019-05-19

by 김희헌 posted May 19, 2019 Views 278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19-05-1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새 계명 (11:1-18, 21:1-6, 13:31-35)

2019.05.19 / 부활절 5

 

[시대착오적 종교를 이겨내는 길]

종교가 저마다의 모양을 갖고 있지만 기본적인 가르침은 비슷합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사상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예언의 정신이라고 대답했습니다. (22:37-40)

경천애인의 가르침은 단순하지만, 그것을 시대적 요구에 알맞게 실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종교의 품격은 바로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입으로는 경천애인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차별과 배제를 일삼는 경우가 있습니다. 위선적 종교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위선적이기를 바라는 종교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의 위선(僞善)’은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는 피치 못한 사정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종교를 위선에 빠뜨리는 주된 원인은 정신의 지체와 감각의 둔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과 감각이 뒤쳐진 종교는 시대착오적인 태도를 갖게 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차별과 증오를 일삼는 위선적 행태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지난 달 부활절 연합예배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렸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 소속된 교단의 대표들과 이만여 명의 신자들이 예배드리는 자리에서 <선언문>이 낭독되었습니다. 그 내용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세속화와 정부의 낙태 허용, 독소조항을 그대로 둔 차별금지법 제정, 무분별한 이슬람 우대정책과 전통문화를 표방한 미신 종교의 허용을 반대한다.”

이것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주장입니다. 한국교회는 배타적 율법에 갇혀서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이 행동한지 오래입니다. 시대착오적인 정신이 기독교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마치 종교적 계명처럼 작동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는지를 묻다보면, 문자주의적인 성서해석의 문제점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문자 자체에서 찾는 것은 경전에 대한 충실을 가장한 신앙의 나태입니다. 나태한 신앙은 문자에 충실한 듯하지만, 실제로는 문자 자체의 딜레마를 견디지 못하고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십계명을 예로 들어보지요. 여섯 번째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다른 계명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살인금지 명령을 둘러싼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입니다. 그런데 만일 부모를 공경하지 않거나, 간음을 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에 기록된 대로라면, 죽여야 합니다.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하고, (21:15/17, 20:9) 간음한 사람도 사형에 처하라고 말합니다. (20:10)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제6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고 맙니다. 문자주의적 해석으로는 이런 딜레마를 풀 수가 없습니다.

문자와 율법에 갇힌 종교정신은 아둔함에 빠지는 것만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저지르는 일에 무감각해집니다. 존 쉘비 스퐁 주교의 책 가운데, 성경의 시대착오적인 폭력들(The Sins of Scripture, 2005)이 있습니다. 그 책은 기독교가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미명 아래 저지른 죄악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불량 신학을 유포하고, 성차별과 여성에 대한 억압을 부추겼으며, 동성애 혐오와 아동학대, 반유대주의와 인종차별 등의 죄악을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기독교가 어두운 역사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차별과 혐오를 경건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시대착오적 폭력은 성경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대착오적 감각을 가진 신앙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의미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과 문자 너머의 가르침을 깨닫는 것입니다. 믿음(pistis)이란 율법이 자기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은총에 내맡기는 것입니다.

모든 시대마다 자기 시대의 고유한 과제가 있고, 새로운 시대에는 또 다른 과제가 주어집니다. 종교가 살아갈 길은 스스로 거듭나는 것이요, 그 동력을 율법에서 찾기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에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서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 땅에 살던 사람들은 지독한 반북주의에 시달렸습니다. 예수의 고향 갈릴리는 상놈들의 땅으로 여겨졌고 (1:46), 북이스라엘의 옛 수도 사마리아는 혐오스런 고장으로 인식되어 사람들은 피해다녔습니다. 그것이 당시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렇지도 않게 남북을 오갔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배제되어야 할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여전히 옛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공동체에 들어온 비유대인들과는 밥도 같이 먹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매인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며, 율법 너머로 나가자고 호소합니다. 그의 믿음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위대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 세계를 향해 있었습니다. (3:28) 바울의 이 믿음은 허황된 것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펼쳐지도록 자기 시대의 차별과 혐오를 떨쳐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의 기독교는 믿음을 율법의 하위개념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믿음의 모험을 벌이기보다는 율법이 가르치는 차별과 증오에 시달렸습니다. 율법에 묶인 교회는 기성체제가 불편해하는 존재를 맘껏 증오하고, 기득권자들이 먹잇감을 찾아 약탈할 수 있도록 적()으로 발명주었습니다.

서구 기독교의 역사를 보십시오. 12/3세기에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이슬람 세계를 약탈했고, 15/6세기에는 식민지건설을 위해 원주민을 살육했으며, 19/20세기에는 제국주의적 침탈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벌였습니다. 반복해서 일어나는 기독교의 이 발작은 언제나 성서의 계명을 들먹였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탐욕과 무지로 인해 빚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어둠을 지나고 나서 바울이 품었던 믿음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피어났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어떠한 율법도 식민지 건설이나,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차별과 혐오의 마지막 온상인 정서적 껄끄러움에 기댄 터부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주장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성소수자와 이슬람 종교에 대한 거짓과 왜곡입니다.

이것은 정서가 익숙해지기 전까지 감내해야 할 수치요 괴로움입니다. 한 번 경험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다시 경험하고, 두 번 경험하고도 깨우치지 못하면 세 번을 경험하면서 마침내 스스로 깨우쳐 가야할 우리 시대의 과제입니다. 이 과제를 해가며 우리가 기대할 할 것자기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는 것이지, 자신이 혐오하는 적들의 죽음이 아닙니다. 성령이 바람처럼 불어와 우리가 신앙의 모험을 벌일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기를 빌뿐입니다.

 

[생명의 길이 열릴 때, 사도행전 111-18]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은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 신앙인들이 어떻게 율법으로 얼룩진 자신들의 편견을 씻어갔는지를 보도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서 벌어진 갈등입니다. 그 이유는 놀랍게도 이방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교회는 유대의 율법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도 복음을 수용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문제를 제기합니다. ‘당신은 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음식을 먹었소?’ 이에 베드로는 자신도 역시 본래는 율법을 따라 살던 사람이었지만, 율법 너머의 세계로 이끄신 하나님의 일을 경험했노라고 증언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는 기도 중에 일어난 신비체험이요, 다른 하나는 로마군인 고넬료의 집에서 생긴 일입니다.

먼저 베드로는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와 같은 그릇에 각종 짐승이 담겨 내려오면서, ‘일어나서(anastas) 잡아먹어라하는 음성이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된 것이나, 정결하지 않은 것을 먹은 일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다시 말씀이 들려옵니다. 바로 이 말씀이 베드로를 율법의 사슬에서 풀어냅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9)

이 신비체험이 세 번 반복되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뒤집히는 경험을 세 번 한 베드로는 앞으로 맞게 될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됩니다. 그것은 로마 군인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의 말씀을 듣고, 고넬료의 집으로 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자신들에게 내렸던 성령이 이방인 중에서도 최악의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로마군인과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도 내린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경험한 베드로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면서 새로운 믿음의 논리를 갖게 됩니다. 17절에 있는 베드로의 고백은 율법의 굴레를 벗어난 깨달음의 탄성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 고백으로부터 기독교 선교의 전체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은 예루살렘의 초대교회에서 생긴 갈등상황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지막 18절에 있습니다. 1~17절까지의 내용은 바로 앞 10장에서 이미 나온 내용을 반복하여 해석한 것입니다. 본문이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은 18절에 나오는 사도와 신도들이 회심하는 장면입니다. 이들은 율법의 기준대로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고 베드로를 질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난 다음, 자신들의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침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

이들은 자신들의 율법을 고집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열어 가시는 생명의 길에 자신들을 엽니다. 자기 생각과 율법의 관습을 넘어서서 이방인에게도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사도행전의 공동체는 복음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고, 새로운 길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참으로 멋진 공동체입니다.

기독교의 비극은 예수의 복음을 율법의 굴레에 가두는 데서 생깁니다. 예수공동체를 이루겠다고 모이지만, 다시 율법의 굴레 속으로 미끄러지고 차별과 혐오의 정신에 중독됩니다. 그래서 예수마저도 잃게 됩니다.

 

[왜 새 계명인가, 요한복음 1331-35]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은 차별과 억압을 낳는 율법과는 다른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을 알려줍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 계명은 성경의 중심 가르침이자, 기독교 윤리의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공적 활동을 마치고, 제자들과 작별인사를 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중요한 전환기에 일어난 이 일은 예수공동체의 성격을 알려주는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그 실마리가 되는 두 단어는 영광’(doxa)새 계명’(entolē)입니다.

예수의 삶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은 이 세상이 추구하는 영광과 다릅니다. 그 영광은 본문 13장 앞부분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는 예수님의 모습(4-10)에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입니다. 이 영광은 낮아지고 낮아진 십자가를 통해서 얻게 됩니다. ‘낮아짐으로써 얻게 된 영광이라는 아이러니에서 모든 기독교적 상상력이 쏟아져 나오고, 윤리의 혁명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삶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은 합리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그의 영광에는 제자의 배신과 자신의 죽음이 결부되어 있으니, 미리 계획하여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3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이것은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 그 의미를 곧 알게 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약속합니다. ‘주님, 왜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해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을 영원한 불능의 늪에 빠지고 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기를 따라올 수 있도록 새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아가파테 알렐루스’ (ἀγαπτε λλήλους), 문자 그대로 본다면,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모세의 율법으로 알려진 계명입니다. (19:18)

그렇다면 예수의 계명이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계명일 수 있습니까? 우구스티누스라는 철학자는 예수의 계명이 율법의 계명과는 다른 종류’(kind)의 것이라고 말하고, 같은 시기에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였던 키릴로스는 예수님의 계명이 다른 계명보다 그 수준’(degree)이 훨씬 높다고 주장합니다. (Feasting on the Word, Year C, vol. 2, 470) 하지만 만족스런 대답이 되지 못합니다. 모든 계명은 언젠가 낡아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만, 그 정의의 관념 역시 시대가 흘러가며 낡아갑니다. 계명이 항상 새 계명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계명 자체를 새롭게 하는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일 사랑의 계명이라면 사랑 자체를 새롭게 하는 계명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계명이 새로운 것은 그가 드러낸 영광의 성격과도 관련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세상의 명예를 얻는데 있지 않고 섬김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이 주신 새 계명은 모든 시련의 극복이자 시작이 됩니다. 사랑하는 방식 자체를 새롭게 하는 삶은 아름답지만, 고통과 시련 또한 거기에 존재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목마른 사람, 요한계시록 211-6]

로마제국 안에서 예수의 새 계명을 안고 살아가는 신앙공동체는 시련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본문은 이 시련의 사람들에게 두 가지 비전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새 하늘 새 땅의 비전이요,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비전입니다.

새 하늘 새 땅의 비전은 이사야의 예언(65:17)을 계승한 것이면서도, 당대의 정신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헬레니즘 세계의 사람들은 하늘과 땅을 구분했습니다. 하늘은 영원한 반면 땅은 덧없고, 하늘이 진리라면 땅은 죄악이라고 봤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땅 만이 아니라 하늘까지도 새로워져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새 예루살렘을 어린양 예수의 신부’(numphē)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로마제국을 창녀’(pornē)로 표현한 17장과 대비되는 말입니다. 제국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세계를 꿈꾸면서, 어둠의 시대를 뚫고 나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비전입니다.

이 두 개의 비전과 함께 사도 요한은 보좌에서 울리는 음성을 듣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신실하고 참된 이 말을 기록해라.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

이 말씀은 불특정다수를 향한 말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만물이 새로워지는 세계를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제국의 질서에 속하지 않고, 어린양을 자기 삶의 시작(archē)이자 목적(telos)으로 둔 사람입니다. 바로 이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목말라합니다. 성서의 약속은 이 목마른 믿음에 부어진 생수와 같습니다.

 

신앙의 꿈을 잃어버리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작은 장애물들뿐입니다. 꿈을 잃은 종교는 율법종교로 전락하여, 예수의 새 계명이 아니라 차별과 배제의 율법에 묶여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이끌어가도록 할 것인지를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 우리 교회는 성평등부 신설에 관한 공청회를 열게 됩니다. 미투 운동 이후의 시대를 능동적으로 헤쳐가자는 취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논의를 해나가면서, 율법에 매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의 신앙공동체처럼, 복음을 새롭게 이해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을 보는 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용납하고 사랑하는 삶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얼마나 모험적인 신앙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되는지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옛 사랑의 율법에 매이지 않고, 사랑의 방식 자체를 새롭게 하는 믿음의 모험이 우리 모두의 삶에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