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신앙 (행 16:16-34, 계 22:12-21, 요 17:20-26)
2019.06.02 / 부활절 7, 환경주일
[생태적 신앙의 몇 가지 원칙]
오늘은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절의 마지막 주일로서 다음 주부터는 성령강림절이 시작됩니다. 계절로는 봄이 지나가며 뜨거운 여름을 향해갑니다. 한국교회는 6월 첫째주일을 환경주일로 지키며, 우리들의 삶과 신앙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환경오염에서 비롯된 위기를 심각하게 느끼며, 욕망대로 살아왔던 소비적 삶을 돌이키고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에 대해서 모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표현하는 방법 가운데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 EF)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지구생태계에 미치는 인간의 영향을 ‘발자국’으로 표현했는데, 사는데 필요한 자원과 에너지의 생산과 폐기에 드는 비용을 토지면적으로 환산한 값을 말합니다. 20여년 전에 이 개념을 고안한 캐나다 경제학자의 계산에 따르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생태발자국은 1인당 1.8ha로 추산됩니다.
우리나라의 생태발자국 지수는 1995년에 그 기준점을 넘었고, 그 후에 가파르게 오르면서 2016년도에는 4.2ha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사는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구가 두 개 이상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오늘날의 문명이 더 넓은 생태발자국을 찍어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대체로 미국식 생활방식이 모델처럼 여겨지는데,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생태발자국을 가진 나라로서 9.7ha에 이릅니다. 만일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산다면, 지구는 다섯 개 이상이 필요할 것입니다.
환경문제의 불평등 가운데 하나는 환경을 망친 나라와 망가진 환경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나라가 같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사는 20%의 사람들이 지구가 가진 자원의 86%를 소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파괴한 환경으로 인해 생겨난 재앙은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이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환경문제는 우리 시대에 매우 중요한 ‘평등과 정의’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환경주일 하늘뜻펴기의 제목을 ‘생태적 신앙’으로 잡았습니다. 생태적 신앙이란 일차적으로는 환경문제에 민감한 신앙으로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생태적 신앙이란 ‘교리적’ 신앙과는 다른 것으로서, 삶을 관념적인 교리에 끼워 맞추기보다는 충만한 삶을 살도록 조화로운 가르침을 구성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생태적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이요,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는 교감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이런 신앙이 필요한 이유는 환경위기가 날로 심각해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교회가 교리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제 서울광장에서는 스무 번째 퀴어 페스티벌이 열렸습니다. 저도 여러 교우들과 함께 퍼레이드 차량을 따라 걸었는데요. 주변에는 혐오의 목소리를 높이는 기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아직까지 한국교회 대다수는 그런 목소리에 가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예배에 참석한 교우들 가운데도 불편한 마음을 가진 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추도예배를 드리러 고향집에 내려갔습니다. 어머니의 교회수첩을 구경하다가 고향 교회의 정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사에 대한 규정 가운데, ‘동성애를 지지하는 목사는 시무를 하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교회 정관에 목사의 신학적 견해를 규제하는 내용을 둔 것도 큰 잘못이려니와, 그것도 혐오규정을 두고 있는 것이 참으로 수치스러웠습니다.
한국교회가 시대흐름으로부터 멀어지며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죽음의 과정에서 지르는 단말마적인 비명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후예를 자처하는 무리들이 차별을 철폐하는 일에 힘을 모으지는 못할망정,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지 못하도록 용을 쓴다는 게 마치 죽음의 병리현상처럼 보입니다.
급변하는 세상에는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사회적 현상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가져야 할 상식적인 원칙을 정한 다음, 시간을 두고 경험해가면서 이해를 넓혀가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몇 년 전에 처음 퀴어 축제에 참석하면서 맘속에 일어나는 여러 생각을 네 가지로 정리해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을 교우들과 나눕니다.
첫째, 타인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자격이 피조물인 우리에 부여되지 않았다. 둘째, 혐오를 정당화하는 논리보다 혐오를 거부하는 논리가 예수의 기준에 가깝다. 셋째, 자신의 기준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보다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깨뜨리는 것이 영혼의 성숙에 이롭다. 넷째, 익숙하지 않은 것과 혐오해야만 하는 것은 구분 돼야 한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이 더 깊이 무르익어가기를 바라고, 또 신앙을 키워 갈수록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더욱 폭넓게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생태적 신앙을 갖추어가는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생태적 신앙이란 타자를 배려하는 가운데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어가는 마음이라 하겠는데, 그것이 깊은 갈등으로 소란스런 이 시대에 필요한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임의 체제를 무너뜨린 말, 사도행전 16장 16-34절]
오늘 사도행전 본문 16장은 마케도니아의 수도 빌립보에서 있었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유럽 최초의 선교지인 빌립보에서 생긴 일련의 사건은 예수의 복음이 전해질 때 일어나는 해방의 사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름 없는 한 여성 노예가 ‘구원의 길’에 대해 외치면서 시작되어,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과 얽혀가면서 확장되다가 마침내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본문은 정교한 구도를 갖고 있습니다. 먼저 죽음의 체제를 중첩해서 그려내면서 자연스럽게 독자들에게 묻습니다.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 물음은 또한 ‘누가 진정한 생명의 주인, 퀴리오스(Kyrios)인가?’ 하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로마의 대표적인 식민도시 빌립보에서 헬라어 ‘퀴리오스’가 가리키는 뜻은 분명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로마황제를 가리키는 말이자, 또한 자유민으로서 노예를 소유한 주인에게 붙여지는 칭호였습니다. 그 사회는 황제를 정점으로 구성된 신분체제로서, 인간을 노예로 만듦으로써 존속되는 질서를 가졌습니다.
이런 사회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단지 어떤 새로운 종교적 가르침이 전해졌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삶의 목적에 관한 새로운 꿈이 심겨졌다는 말이요, 어떤 새로운 삶의 방식이 도입되었다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은 예루살렘 회의를 마친 다음에 이루어진 본격적인 이방선교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삶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체제이며, 무엇이 삶에 구원을 불어넣는 예수운동의 특징인지를 보게 됩니다.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바울 일행이 기도하러 가는 도중에 한 여성 노예(paidiskēn)를 만납니다. 이 여성은 여러 주인들(kyriois)에게 큰 돈벌이가 되는 노예였습니다. 당시 빌립보 사회는 그런 사태를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본문은 그녀를 가리켜 ‘귀신 들려 점을 쳤다’고 표현하는데,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그녀에게 ‘피톤의 영’(πνεῦμα Πύθωνα, the spirit of Python)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피톤’(Python)은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로의 화살을 맞고 죽은 거대한 뱀을 일컫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성은 신에게 죽임당할 운명을 가진 뱀처럼 그 사회의 신화적 구도에 사로잡혀서 꼼짝 못한 채, 여러 사람들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여성이 바울 일행을 보고나서 그들에게 ‘구원의 길’(hodon sōtērias)이 있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용한 점쟁이여서라기보다는 여러 주인들에게 착취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녀는 바울 일행을 몇날며칠 동안 뒤좇아 다니면서 그들이 ‘구원의 길’을 이 도시에 전하고 있다고 외칩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바울은 ‘슬프고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diaponeomai) 결국 그 여인을 사로잡고 있는 ‘영’을 꾸짖어 내쫓습니다.
귀신에서 해방된 그 여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돈벌이 수단을 잃게 되어 더 비참하게 되었을까요, 아니면 해방된 새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본문은 그녀의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그녀를 둘러싼 잔인한 먹이사슬의 관계로 시야를 넓혀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이 여성 노예가 귀신에서 해방되자, 그녀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관원에게 끌고 가서 고소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시민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당한 풍속’(unlawful ethos)을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맞습니다. 노예를 더 이상 노예로 부리지 못하게 만든 바울의 행위는 당시의 풍속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바울과 실라는 옷이 찢기고 매질을 당한 후에 손과 발을 묶인 채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여기까지 본문은 점점 넓은 세계로 시야를 옮겨가면서 불변의 제도처럼 견고하게 보이는 죽음의 체제를 보여줍니다. 맨 처음에는 주인에게 삶을 착취당하는 여성 노예의 삶을 통해서, 그 다음으로는 그녀를 둘러싼 세계의 비정한 문화와 착취제도를 통해서, 그 다음으로는 그 체제를 흔드는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매질과 감옥을 통해서 빌립보 사회의 암담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어디에서부터 이 어둠이 걷힐 수 있을까요?
그 이야기는 감옥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둠이 가장 깊은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드린 기도와 찬양에서 새로운 희망이 피어납니다. 함께 묶여 있던 사람들도 그 기도와 찬양을 듣고 있을 때,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면서 ‘감옥의 터전’이 흔들리고, 감옥 문이 열릴 뿐만 아니라 죄수들을 묶은 수갑과 차꼬가 모두 풀립니다. 죽임의 체제를 유지하던 모든 수단들이 해체된 것입니다.
잠에서 깬 간수는 죄수들이 모두 달아난 줄로 알고 자결하기 위해 칼을 빼들었습니다. 바울이 그에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 바울의 이 말은 그 때까지 견고하던 대결구도를 무너뜨립니다. 도망가는 게 당연했을 죄수가 도리어 간수를 살리다니, 그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간수는 등불을 들고 뛰어 들어가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무서워 떱니다.’
왜 간수가 죄수 앞에서 무서워 떨었을까요? 그것은 바울의 말이 새로운 세상을 불러오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대로 있으니, 자신을 해치지 마오!’ 바울의 이 말은 자신을 내어주면서 상대방을 살리는 말입니다. 예상을 뒤엎은 이 말에 감복한 간수는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오.”
간수는 그대로 따릅니다. 바울 일행을 모셔다 상처를 씻어주고,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고 잔치를 벌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이 과연 새로운 삶일까요?
빌립보에서 시작된 예수공동체에게는 그랬습니다. ‘예수를 퀴리오스로 믿는다는 것’은 당시의 세계와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바울의 사상에 따르면, 노예에 대한 주인의 착취가 없고,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의 차별이 없으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이 없는 세계를 의미했습니다. (갈 3:28) 그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삶을 의미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런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꿈을 거의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예수에 대한 믿음을 ‘차별과 억압’의 구실로 삼기까지 합니다. 다시 율법의 종교가 되고, 다시 성전의 종교가 되면서 예수가 그토록 무너뜨리고자 했던 낡은 중보(仲保) 종교의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절 마지막 주간을 보내면서 부활예수를 믿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함석헌 선생의 가르침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의 단 하나의 목적이야말로 중보를 없애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씨알의 설움,” [함석헌 저작집], 6:90)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예수를 빙자한 억압적인 율법을 만들고, 그것을 중보(仲保)로 삼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교회의 행태를 비판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예수의 이름을 가졌지만, 그 내용으로 ‘차별과 억압’의 율법을 말하는 것은 종교가 벌이는 ‘협잡’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모신다는 것은 어떤 종교적 율법을 신주단지처럼 떠받들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산다는 것은 제 술에 취해 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억압과 차별을 거부하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흑백논리로 이루어진 제도를 짓기보다는, 무지개 빛깔로 빛나는 삶을 가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차별과 배제로 얼룩진 이 세계의 기반을 흔드는 새 시대의 노래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6장의 가르침입니다. 요한복음의 가르침은 더욱 분명합니다.
[조화로운 공동체가 지닌 결속의 신비, 요한복음 17장 20-26절]
오늘 요한복음서 본문은 13장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고별설교>의 결론입니다. 17장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이 말씀은 공동체적인 결속에 담긴 신비와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서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의 모습은 두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때로는 삶을 지켜주고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지만, 때로는 삶을 규제하는 달갑잖은 것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결속을 맺는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집단이나 사회가 한 몸뚱이를 이루는 방식은 크게 보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복이고, 다른 하나는 조화입니다.
만일 ‘정복’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가 되는 일은 강자가 부과하는 멍에를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겉으로는 하나인 듯하지만, 그 실제 관계는 복종과 파괴입니다.
반면에 ‘조화’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가 되는 것은 서로를 용납하고 포용하는 일이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생명을 길러내는 요람이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 공동체를 이루느냐에 따라 종교와 문명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인류는 오랫동안 ‘정복’의 관점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것이 지배관계를 확대하는 것이요, 약자들을 수탈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문명의 동력을 개발주의와 소비주의에서 찾았고, 결국 세계를 파괴하다가 자신마저 죽음의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자본주의가 지나온 문명이 그러합니다.
앞으로 추구될 문명은 이전과는 다른 방향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과정신학자 존 캅은 지구를 생각하는 열 가지 생각(2018년)이라는 책에서, ‘정복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문명을 일구어온 삶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교정할 수 있는 첫 번째 가르침을 ‘만물의 관계성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찾으라고 권합니다.
추구해야 할 미래는 보다 ‘생태적인 문명’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며 해방의 관계를 이루는 삶입니다. 이 삶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생태적 신앙입니다. 생태적 신앙을 가진 공동체는 자신들만의 공간에 고인 물이 되지 않고, 시대를 호흡하고 교류하면서 생명력 있는 운동을 벌여나갈 것입니다.
[화답하는 신앙, 요한계시록 22장 12-14, 16-17, 20-21절]
요한계시록의 본문은 성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먼저 오시는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자 마지막이며, 시작이면서 끝‘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언제나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교 영성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찾는 일이 쉽지 않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의 약속과 신앙공동체의 고백이 서로 어우러집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겠다’(erchomai) 하고 약속하고, 공동체는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Amēn erchou Kyrie Iēsou) 하고 화답합니다.
주여 오소서! ‘에르쿠’(erchou)라는 기도는 신앙공동체의 가장 원초적인 간구입니다. 사도요한이 봤던 모든 환상도 ‘에르쿠’라는 외침의 반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6:1,3,5,7) 그리고 이 기도에 힘입어 살았던 사람들은 선과 악이 뒤틀린 고통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자신을 먼저 씻고(14절), 생명의 물을 목말라하며 (17절) 살아갔습니다. 그것이 본문 14절과 17절의 가르침입니다.
종교의 본 모습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나 결과물에 있기보다는 마음의 신실함(pistis)에 있습니다. 하지만 강건한 종교는 그 진실을 심정에서 구하지 않고,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그 마음의 진실이 정의와 평화였음을 드러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갈등과 대립으로 시름하고 있습니다. 대립의 평행선을 그으면서 사는 방식으로는 미래를 지어낼 수 없습니다. 자기 욕심을 줄여가지 않으면 우리 삶은 지속가능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물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듯이, 생태적 믿음으로 거듭난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 평화의 세상이 지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거룩한 영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 힘과 지혜를 주시기를 빕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바울이 전한 말씀을 전합니다.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 이 말은 삶에 구원을 주는 말이었습니다.
대결과 갈등으로 얼룩진 이 시대에 필요한 생태적 신앙을 지어갑시다. 혐오를 녹여낼 믿음의 열매를 가꾸어갑시다. 주님의 은총이 무지개처럼 빛나는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