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동창회 19]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난 적이 없다! 이제 망상의 하느님에서 벗어나자!

by 최성철 posted Jun 07, 2019 Views 184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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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에서 하느님이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는 기적을 일으킨 적이 없다. 고대 부족적인 종교들의 경전에 기적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또는 자서전적인 이야기 아니라, 은유적이고 시적인 이야기들이다. 물론 종교와 신앙은 이런 기적을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니다. 종교의 믿음체계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상업적으로 하느님의 기적을 팔아먹고, 사람들은 거기에 속아넘어 갈뿐이다. 역사적 예수는 기적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않았다. 그는 물을 포도주로 만든 적도 없고, 물 위로 걸어간 적도 없다. 물론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느님도 아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팔아먹던 가짜 하느님, 만들어진 예수, 망상의 하느님 즉 유신론적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교회를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음에 대한 징조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사실상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잘 모른다. 단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말을 복사할뿐이다. 막연하게 하늘을 쳐다보지만 하느님은 거기에 없다. 또한 믿는다는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하지만 무엇을 믿고 있는지 잘 모르면서, 교회가 만든 공식(교리)들을 수동적으로 암송하고,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고 앵무새처럼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착각한다.

 

유신론적으로 이해하는 하느님은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었다. 기독교인들이 믿는 유신론적 하느님은 초자연적으로 전지전능한 존재이며, 이 세계 밖에 거주하면서 소위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간혹 이 땅으로 내려와 인간의 삶과 자연현상에 멋대로 간섭하고 조정한다. 이것도 유신론자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상상하고 믿는 망상일뿐이다.

 

오늘날 유신론의 종말을 보여주는 징조들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우선 우주진화 세계관의 현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기적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이 말의 뜻은 기적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21세기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우주의 운행 방식과 자연 현상과 인류 역사에 대해 하느님을 원인과 결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과거에 하느님을 질병과 건강문제의 주동자라고 믿었다. 질병은 하느님의 징벌이고 건강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과학은 병균과 바이러스를 발견했고, 항생제와 치료방법들을 개발하였다. 현대인들은 의학이 소위 죄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백인이나 유색인종이나, 여성이나 남성이나, 동성애자나 이성애자나,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배웠거나 못배웠거나, 모든 경계 넘어 동일한 효력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따라서 하느님은 질병에 대한 조정과 통제의 일을 상실했으며, 현대의학은 하느님의 종말을 고하고, 불치병이 초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기적의 시대를 끝냈다.

 

유신론과 하느님의 종말을 계시하는 또다른 징조가 있다. 과거에는 기후와 일기는 하느님의 손에 달렸다고 믿었다. 가뭄과 홍수, 산불, 토네이도와 폭풍우와 태풍, 지진과 쓰나미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대 천체학과 기상학과 지질학은 기후변화와 일기의 패턴과 지진과 화산활동의 원인들을 발견했다. 과학을 이해하는 현대인들은 이러한 천연재해들이 인간의 도덕적인 문제를 통제하기 위해 하느님이 조정한다는 유신론적 주장은 거짓이고 비상식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존재가 자연현상을 좌지우지한다는 믿음은 망상이 되었으며, 이 하느님은 설득력을 잃었다.

 

과거에는 하느님이 전쟁신 또는 수호신으로써 한 부족과 민족을 전쟁으로 이끌어서 적을 무찌르게 하거나 쳐들어오는 적을 섬멸했다. 한편 이 하느님에게 불성실하거나 믿음이 적으면 신의 노여움을 사서 전쟁에서 참패를 당한다. 그러나 현대무기가 개발되면서 전쟁의 성패는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지 않고 어느 편이 더 최신의 강한 무기를 보유하느냐에 달려있다. 또한 운동경기의 승부는 하느님의 계획과 아무 상관 없이 오로지 시합하는 날에 운동선수들의 기량에 달려있다. 전쟁과 운동경기 전에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승패는 무기와 기량에 달렸다. 하느님은 전쟁과 운동경기에서 할 일이 없어 무용지물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익숙했던 하느님의 보호와 평안으로 돌아가고 싶다 해도 이제 더 이상 과거로 돌아 갈 수 없다. 오늘날 교회 내부와 외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대 부족적인 하느님 개념 밖에서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교회 나가는 사람들은 과학계와 신학계와 철학계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생명과 세계와 하느님의 의미에 대한 논쟁에 귀를 기울이기는 커녕 못들은체 또는 모른체 또는 거부하거나 부인하면서 찬송가와 설교문과 기도문에서 고대 부족적인 종교언어를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21세기에 그 종교언어들의 의미가 상식적인지에 대해서 솔직하게 생각해 보는 것을 금지하거나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온갖 정보들을 접하면서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맹신해왔던 유신론적 신념들이 이성적이고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렀다.

 

프로이드와 함께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큰 줄기를 만든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융(Carl Jung)은 이미 반세기 전에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더 이상 유신론적인 신화적 교리들에 매달릴 수 없기 때문에 반신화적 즉 무신론적 추세가 보편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사람들이 과학적 합리주의를 인식함으로써 유신론적 신화를 억지로 믿는 것에 지칠대로 지쳤으며, 사람들은 기적을 믿기 위해서 지성을 희생할 수 없었다고 선언했다.

 

기독교 교회는 유신론의 정의와 하느님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단순히 비유신론자(nontheist)를 무신론자(atheist)로 단정해 버린다. 쉽게 말해, 유신론을 거부하는 것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더욱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무신론자로 치부하며, 무신론자는 마치 하느님의 징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취급된다. 오늘날 우주진화 세계관에서 유신론적 하느님 즉 창조주 하느님, 최후 심판의 하느님, 전쟁 수호신 하느님, 자연의 법칙을 깨트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인격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느님, 성서근본주의의 하느님, 이분법적으로 차별하는 부족적인 하느님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급증하고 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들을 무신론자라고 정죄하고 교회에서 추방하려고 한다. 교회의 믿음체계를 떠나 인도주의를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교회가 정죄하는 무신론자 기독교인들과 인도주의 기독교인들은 잃어버린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깨달음의 참된 인간으로 사람답게 살려고 한다. 이들은 수동적인 종교인이 되기보다 자율적인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 예수의 정신이라고 인식한다. 또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하느님 개념을 탐구하여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고, 분단과 혼돈 속에 빠진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통합적인 공동체로 다시 세우려고 한다. 오늘 우리 사회를 보다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무신론자들 인도주의자들이다. 오히려 유신론적 종교인들은 폭력적인 분노로 자신들의 믿음을 보호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을 분단과 테러와 불신으로 어지럽히고 있다.

 

유신론적 하느님을 거부하는 소위 무신론자들과 인도주의자들이 급증하면서 주류 기독교와 유대교는 쇠퇴하고 있다. 한편 소수의 신경질적이고 공포와 분노에 가득한 근본주의적이며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부흥하는듯한 현상은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음으로 생존의 위기에 빠진 기독교인들의 생사의 몸부림이다.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 남북의 평화통일을 반대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과 미국 남부의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극우 기독교인들과 이스라엘의 극우 나타냐후 수상 지지자들이 부족적이고 호전적인 정통주의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자신들의 국가와 세계를 분단시키고 있다.  

 

과거에 유신론적 하느님이 수호신으로써 인간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이 하느님이 살아있고 건재하며 모든 것들을 통제하고 조정한다고 믿고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려던 것이 더 이상 설득력과 효력이 없다. 사회와 세계는 급속도로 무신론적 세계로 변해 가는 현상들이 드러나고 있다. 극단적인 예로, 과거에 수세기 동안 북미와 유럽의 쇼핑몰들은 일요일에 법적으로 문을 닫았다. 그러나 30-50년 전부터 세상의 세속화 물결에 쇼핑몰은 일요일에 문을 열기 시작했다. 과거에 큰 운동경기는 가급적이면 일요일을 피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교회당은 텅텅 비었는데 대형 스타디움은 수만명의 관람자로 가득하고, 운동선수들은 마치 예배대상이 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어떠한 도움 보다 커피를 필요로 한다. 또한 일과 중에 소다수 음료와 식사 후에 초콜릿이 가미된 후식을 빠트릴 수 없다. 이렇게 카페인이 함유된 음료와 음식은 무소부재의 역할을 담당한다. 오늘 지구촌에서 알코올은 음식으로 분류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술집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금지된 장소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삶의 피로와 무의미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알코올에 의존한다. 또한 흡연습관도 감소하기는 커녕 증가하고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과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일 때 알코올과 흡연은 효과적인 완화작용을 한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생존의 고통을 극복하는 방식을 유신론적 하느님을 믿는 것 보다 문화적으로 수용된 삶의 양식에서 찾는다. 유신론은 원래 인간의 자의식의 충격을 다루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유신론적인 초자연적 하느님은 더 이상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방어벽이 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쇼핑과 알코올과 흡연과 운동경기와 텔레비젼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유신론의 죽음으로 동양적 명상, 요가, 뉴 에이지 운동, 심지어 식이요법과 fitness 운동에 이르기까지 제도적 종교의 대체물들이 보편화되고 있다.

 

인간의 자의식의 출현과 함께 인간은 자신의 한계성과 인생의 무의미함을 깨닫게 되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신론과 유신론적 하느님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 유신론은 힘을 잃고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다. 19세기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처음으로 신의 죽음을 선언했고, 1960년대에 급진적인 신학자들이 선포했다. 오늘날 유신론적 하느님의 죽음은 사회의 일반대중들의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고독과 충격과 이에 대한 히스테리는 여전히 남아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주류 교회들이 쇠퇴하는 한편 여전히 뻔뻔스럽게 거짓과 속임수의 축복과 보호와 안전을 상업적으로 팔아먹는 근본주의적 교회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병적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신학자 하비 콕스는 이미 60년대에 자신의 저서 <The Secular City>에서 경고하기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소위 대형교회는 무엇인가 잘못된 현상이라고 말했다.

 

유신론적 기독교인들이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그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실천적인 가치관 사이에 큰 모순점들이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유신론을 멀리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결국 유신론은 죽었고, 유신론적 하느님은 할 일을 잃었다. 예를 들자면, 교회는 이혼과 낙태를 성서적으로 반대하지만 여론조사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자유롭게 이혼과 낙태를 시행하며, 이혼율은 증가하고 있다. 교회는 동성애가 정상이 아니고 비성서적이라고 가장 잔인하게 정죄한다. 그러나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과 북미의 캐나다와 미국은 동성애를 합법화했다. 특히 북미의 주류 기독교 교단들은 동성애자들에게 목회자 안수를 허용한다. 미국 의학회의 발표에 따르면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며, 사람들 중에 11명 중 한 사람이 자연적으로 동성애 성향을 갖는다. 가톨릭 교회에서 안수받은 신부들 가운데  높은 동성애자 비율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동성애자들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제도적인 종교들의 유신론적이고 초자연적이고 미신적인 설명들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으며, 사람들을 충분히 만족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불안과 혼돈 만을 가증시켰다. 인간의 자의식이 등장하면서 인간은 죽음의 두려움과 무력감과 취약성과 무의미함과 고독감이라는 충격에 정면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다. 종교는 인간의 자의식의 충격을 솔직하게 상식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유신론적 하느님이 인간의 충격을 완화시켜주던 방법들은 상업적이고 정치적으로 사람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참된 인간성을 말살하고, 오히려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는 가증되었다. 따라서 지구촌에 전쟁과 테러가 끊일 날이 없으며, 빈부차별, 성차별, 성적본능차별, 인종차별, 종교차별로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고통 속에 암담하게 살아가고 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들이 자의식의 충격으로 만든 유신론적 하느님은 더 이상 필요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원초적으로 인간은 자율성과 창조성과 가능성과 잠재력이 있다. 또다시 유신론적 하느님을 만드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죽은 하느님은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기독교인들은 옛 신화의 하느님, 성서문자주의의 하느님, 초자연적인 하느님, 유신론적 하느님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구원의 길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의미, 인간의 의미, 생명의 의미, 우주세계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탐구해야 한다. 새로운 이야기가 절실히 필요하다! 

 

[필자: 캐나다연합교회 은퇴목사, 전직 지질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