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 이성환 | 2019-06-30

by 이성환 posted Jul 02, 2019 Views 23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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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왕하2:1-2,6-14, 갈5:1,13-25, 눅9:51-62)

2019.06.30 성령강림절 넷째 주일

 

여러분, 인싸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인사이더의 줄임말인데 요즘 학생들과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말입니다. 사전적의미의 ‘내부자’,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라기보다 한 집단 안에 있는 주류,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인싸 중에 가장 중심에 있는 사람, 인싸 오브 인싸를 핵인싸라고 부릅니다. 저와 같이 살고 있는 초등학생들의 최고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핵인싸가 될 수 있을까?입니다. 엊그제는 저에게 아빠는 교회에서 인싸냐고 물어보더군요. 

 

뭐 아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표현하는 언어가 다를 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 집단에서 주류가 되고 싶어 하는 게 보통 사람이 갖는 욕망인가 봅니다. 이렇게 인싸가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은 어김없이 시장을 만나게 됩니다. 인사템이라는 게 생겼습니다. 인사이더와 이아템의 합성어인데요. 장난감, 학용품 등등 이거 하나 있으면 인싸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뿐만 아니죠. 춤, 음식, 책, 여행지 등등 다양한 것들이 인사템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인싸의 반대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아웃사이더, 줄여서 아싸라고 하지요. 과거 사용되던 왕따란 말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한 사회 안에서 주류가 되지 못하고 그 주변에서 떠도는 사람. 이런 의미겠지요. 자발적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류 집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인싸가 되고 싶어 합니다.

 

인싸는 인정을 갈망합니다. 그리고 인정을 받지 못한 아싸는 인정대신 무시를 받게 되죠. 이 인정과 무시는 각각의 부작용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과시와 혐오입니다. 인정을 받기위해 사람들은 때로 자기과시를 합니다. 요즘은 SNS를 통해 그게 아주 수월해 졌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무시가 확대되고 사회화되면 아싸, 다른 말로 하면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만들어냅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주제가 이 소수자들의 인권에 대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각설 하겠습니다만 이렇듯 다수의 사람들이 가고자하는 주류의 길, 과연 성서에서도 그렇게 얘기하고 있을까, 오늘 본문을 통해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가 느꼈을 외로움 / 누가복음]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두 가지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 일행이 사마리아 동네에서 배척받은 이야기와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먼저 예수는 공생애 마지막의 때가 온 것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예수의 행보는 크게 보면 갈릴리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노정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복음서 모두가 그렇게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작은 여행이라고 해야 하나요. 예수와 제자들의 많은 이동경로가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기도 하고 가버나움이라는 동네로, 사마리아 지역인 수가성으로, 이처럼 예수와 제자들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이동을 하면서 복음의 장정을 이어갑니다. 

 

이런 노정 가운데 예수는 이제 마지막 행선지인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 사마리아 마을에 잠시 머물기로 한 것이죠. 그런데 그 마을에서는 예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을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설명합니다. 정확하게는 어디로 가는 ‘도중’이어서가 아니라, 예수가 가려는 곳이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 일행을 거부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당시 유대사람들은 사마리아 동네를 비켜서 돌아갔으면 돌아갔지 그곳을 관통해서 간다는 것을 염두에 두질 않았습니다. 그만큼 유다와 사마리아는 서로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강했습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의 심장인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일행을 받을 수는 없었던 겁니다. 

 

이렇게 예수 일행은 사마리아 마을에서 배척을 받고 쫓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립니다. 쫓겨난 제자들은 화가 나서 예수에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저주를 퍼붓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말한 제자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다른 맥락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다른 마을로 가는 도중에 예수를 따르고자 나선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여기에 예수는 선문답 같은 말은 남기죠.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아마도 예수의 이 말은 사마리아 동네에서 무시당한 채 쫓겨난 예수의 그 외로움이 담긴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군중들은 많았지만 정작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비밀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죠. 그들 가운데에서 예수는 외로웠던 겁니다.

 

사마리아 동네에서는 배척을 당해 외로웠다면 이제는 당신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느끼는 벽과 같은 고독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주님을 따르긴 하겠습니다만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가겠습니다.’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이러한 요청에 예수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며 훈계합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대의에 내가 가진 것과 모든 관계를 복속시키는 것이 옳은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그 부름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주저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사람이겠지요. 

 

지난 성정의주일에 과거 독립운동가의 부인이 감내해야 했던 희생을 우리가 들은바 있습니다만 우리 교단에도 이와 비슷한 삶을 사셨던 신앙의 선배들도 계십니다. 제가 청년시절 다녔던 교회를 개척한 목사님인데요. 그분은 조선신학교 신학생 시절 전쟁이 나자 함경도에 있는 처자식에게 ‘알아서 잘 살라’는 전갈만 남기고 홀로 월남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마저 학교를 다니고 있을 무렵 사모님은 자녀들과 함께 목사님을 찾아 서울로 왔습니다. 산발이 된 머리에는 큰 보따리가 얹혀져있었고 아이들을 등에 업고 손에 잡고 그렇게 전쟁통에 남편을 찾으러 전국을 헤매 다녔다고 합니다. 

 

향린교회가 생길 무렵 그 목사님도 월곡동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예배당과 사택 겸 탁아소로 사용할 건물을 구입했고 사모님은 탁아소를 운영하면서 교회 일을 도왔습니다. 군부독재 시절 그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박정희 이 개OO’ 라고 욕을 했습니다. 점차 교인들의 발길은 끊겼고 교회 앞에는 중정요원들이 들고나는 사람들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탁아소도 운영하기가 힘들어 졌습니다. 

 

7,80년대 기독교회관에서 목요기도회를 마치면 종종 그 목사님은 강사분들을 집으로 모셔서 저녁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안병무, 서남동, 함석헌, 김재준, 문익환, 문동환 등 이런 분들을 모시고 집에 가면서 사모님에게 밥을 차려놓으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손님들이 떠날 때는 차비를 담은 봉투를 하나 씩 드렸다고 합니다. 이 증언은 그 교회 60주년 기념예배 때 그 목사님의 아드님이 했습니다. 그런 사건들이 나를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했다고 말이죠. 

 

이렇게 보면 예수는 예수대로, 또 예수의 가르침과 부르심에 갈등하고 번민하는 제자들과 우리들은 또 우리들대로 외로운 존재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열왕기하]

 

오늘 열왕기에 나오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보면 오늘 복음서의 내용과 공통점이 보입니다. 오늘 본문인 열왕기하 2장은 엘리야의 계승자가 된 엘리사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엘리사가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의 계보를 잇는 후계자임을 강조하는 것이죠. 이에 앞서 엘리야와 엘리사의 첫 만남이 기록된 열왕기상 19장을 보면 오늘 복음서 본문이 인용했을 법한 구절들이 보입니다. 

열왕기상 19장 20절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버려두고, 엘리야에게로 달려와서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드린 뒤에,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돌아가거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그러느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소 쟁기질을 하던 엘리사가 엘리야로부터 겉옷을 건네받습니다. 당시 예언자가 자신의 후계자에게 겉옷을 건네는 것은 일종의 승계의식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돌아가거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그러느냐”라고 애매한 말을 하는데 학자들에 따르면 ‘가거라, 하지만 네가 해야 할 것을 기억해라’ 이런 정도로 해석하는 게 옳다고 합니다.

 

그 후에 엘리사는 돌아가서 소가 메던 멍에를 불태우고 소를 잡아 마을사람들에게 먹게 합니다. 본문에는 생략되었습니다만 아마도 엘리사는 부모에게 작별인사는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난 후 엘리야를 따라 그의 제자가 됩니다. 열왕기에 나오는 엘리사의 제자도를 누가복음 저자들이 예수를 통해 더욱 강화 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게 부르심을 받드는 진정한 제자의 도리이다’ 이렇게 말이죠. 

 

그러나 오늘 열왕기 본문을 통해 제가 느낀 것은 스승 엘리야의 믿음입니다. 하늘의 뜻에 순명하는 믿음. 예수 또한 그랬습니다. ‘당신 스스로 하늘 길에 오를 날이 되었음을 자각하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들고 날 줄 아는 믿음. 그것이 엘리야를 통해 우리가 바라볼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엘리야와 예수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떠날 때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 공을 이루고 그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가진 것을 내려놓을 때를 알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의 뒷모습,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뒷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의 앞모습을 통해 보지 못했던 진실을 알게 됩니다. 진실은 그 사람의 앞모습, 나타나는 현상만을 보고 가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뒷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 겁니다.

 

향린의 역사도 그래왔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구습을 타파하며 여기까지 온 것 아닙니까? 시대와 함께 씨름하면서 새로운 신앙담론을 만들어내고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치열한 투쟁을 거쳐 지금의 향린이 된 것 아닙니까.

 

태어날 때의 세포가 과연 우리 몸에 남아 있을까요? 그것은 이미 때로 배변으로 내 몸을 떠난 지 오래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지지 않으면, 과거와의 단절을 경험하지 않으면, 희생과 십자가를 두려워하고 외면한다면, 그 공동체는 건강해 질 수 없습니다. 

 

 

[결국 해방이고 자유다, 갈라디아서]

 

예수가 가르치고 바랐던 인간의 삶이란, 바울에 의해 이렇게 해석됩니다. 율법으로 부터 해방된 자유인!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자유한 삶입니다. 그 어떤 속박도 거부하고 내 삶과 신앙의 주인, 주체적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의지는 고결한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난 해방된 자유인이라고 말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의 영으로부터 얻은 그 자유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사랑하고 섬기는데 활용하라고 충고합니다. 또한 이기적 인간이 가지는 여러 가지 모순 즉, 타락, 우상숭배, 마술, 원수맺음 등으로부터 멀어지라고 경고합니다.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주류의 삶이었습니다. 갈릴리 민중의 삶이 그러했고 예수가 함께 먹고 마시며 어울렸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종국에는 십자가 형틀에서 최후를 맞이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는 심지어 인정 받기위해 몸부림치는 인정욕구에서조차 해방된 자유인을 꿈꾼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죠. 분쟁, 시기, 다툼, 파당, 이런 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만 술 취함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 여기에서 걸립니다. 저를 포함해서 향린의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이 목구멍에 턱, 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공생애 예수의 공동체와, 1,2세기 초기교회 공동체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들’이라는 욕을 먹었습니다. 이러한 점이 바울의 갈라디아서에 나온 가르침과 상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쉬운 것 먼저 해결하자면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은 디오니소스를 이야기합니다. 광란의 상태에서 제물을 산채로 뜯어 먹고 그 피를 마시는 광기어린 종교의 제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면 술 취함이란 무엇인가요. 말 그대로 술 취함입니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끊어야 할까요? 제 대답은 외경인 집회서에 나온 구절로 대신하겠습니다. 집회서 31장 27절에서 30절입니다.

 

절제 있게 마시면 술은 사람에게 생기를 준다. 술 없는 인생이 어떠하랴? 술은 인생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마셔야 할 때에 적절하게 마시면 술은 마음의 즐거움이요 영혼의 기쁨이다. 흥분해서 과격하게 마시면 영혼에 쓰라림을 가져다 줄 뿐이다. 어리석은 자가 술에 취하면 광기를 일으켜 스스로를 해치고 기운이 쇠진하여 부상을 입게 된다.

 

예수가 우리에게 전해준 해방의 영을 통해 우리가 맺어야 할 것은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은 없습니다. 예수로부터 해방된 삶, 자유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그저 그 해방의 영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해질녘 긴 그림자를 뒤로하고 걸어가는 예수와 제자들의 뒷모습을 그려봅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욕먹고 배척 받은 이들, 아웃사이더의 심정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지 모를 그들. ‘에이씨,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욕지거리를 하거나 분에 겨워 울고 있는 제자들. 그리고 그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고 있는 예수.

 

그 그림 안에는 좌절과 분노, 슬픔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시인 정호승의 표현처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산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이런 씁쓸한 마음으로 존재의 무게를 느끼며 정처 없이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닐 겁니다. 그러한 복잡한 감정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가슴이 있습니다. 그리고 해방과 구원의 복음을 향한 희망도 있을 것입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한 때 공을 이루었다고 해서, 흡족할 만한 권력과 물질을 쟁취했다고 해서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복음의 행진을 위해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생명과 정의, 평화의 가치를 위해 주류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들, 자발적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사람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역사 앞에서, 이웃과 동지들 앞에서 나를 비추어 보고 다듬어 나가는 사람들, 그들이 전진하는 만큼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다가 올 것입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의 영을 따라 

세상의 그 어떠한 가치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