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 가는 길 (왕하 5:1-14, 갈 6:7-16, 눅 10:1-11,17-20)
2019.07.07 성령강림절 다섯째 주일
저는 지난주 화요일부터 어제까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화해와통일위원회에서 주관한 제4차 평화협정 국제캠페인에 참여하고 돌아왔습니다. 러시아와 터키와 그리스, 세 나라의 교회 지도자 및 관련 정치인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사이에 한국에서는 북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있었지요. 하노이 회담 이후 답보상태에 놓인 상황이 답답했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길을 열어 가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이번 여행은 그 동안 거의 접해보지 못한 동방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배우는 기회였습니다. ‘정교회’(orthodox church)로 알려진 동방교회는 전 세계적으로는 약 3억 명으로서 전체 기독교인의 15% 정도를 차지합니다. 동방교회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였지만, 조금 낯선 친구였지요. 본래 하나였던 교회가 1054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대분열’(the great schism)을 하게 되었고, 서방교회의 갈래에서 생겨난 개신교회는 동방교회의 전통으로부터는 멀어져왔습니다. 하지만 동방교회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회원교회가 되면서 지금은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는 중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1세기를 갓 넘긴 짧은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2천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동방교회의 전통과 영성을 대하면 많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정교회의 긴 역사와 그 무게를 담은 기독교 교회의 깊이 있는 영성을 접할 수 있는 여러 곳을 방문했습니다. 오늘 하늘뜻펴기는 그런 경험과 관련하여 전하고자 합니다.
사실 종교와 여행은 중요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울타리를 넘어서는 관심에 있습니다. 종교는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 신을 향해서 마음을 쏟아내는 것이라 하겠는데, 그런 마음은 자기가 지금 접하고 있는 세계보다 더 위대한 세계가 존재하는 것을 느끼는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행은 자기 울타리를 넘어서 다른 세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그렇게 보다 넓은 세계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자기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의미와 가치를 느끼고 배우게 됩니다. 종교의 성숙은 여행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모스크바에서 시작되었는데, 저는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평화와 신학> 창립행사로 인해 일행보다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거기서 진행된 일정에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정교회의 전통과 영성이 깃든 터키와 그리스의 몇몇 지역을 돌면서 그 유구한 역사와 문화에 깊이 매료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도시 자체의 매력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대신 ‘정교회의 재발견’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이번 여행을 통해 배운 것 가운데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종교영성의 깊이와 방향에 관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종교의 역사가 깊을수록 영성의 방향은 보다 분명해지는데, 터키 이스탄불에서 그것을 느꼈습니다. 오늘날에는 터키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이스탄불에 있는 기독교는 소수종교로서 차별을 당지만, 그곳의 기독교는 어쩌면 역사의 영욕을 모두 누린 종교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이스탄불에 있는 정교회 총대주교좌 교회에서 예배드렸습니다. 세 시간 넘게 항상 동일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개신교 신자들은 다 도망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바르톨로메오스 총대주교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분이 한국방문단을 맞으며 읽으신 ‘환영사’의 일부를 교회 1층 게시판에 붙여두었습니다.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환영사의 말미에 교회의 교리가 체계화되던 4-5세기에 기독교 사상을 주도한 두 신학자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두 신학자 모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를 역임한 분들인데, 평화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먼저 신학자 그레고리오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열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 요한 크리소스토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평화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평화에 대한 간결한 말씀인데, 성경의 본질적인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의 수도원 도시 메테오라에서 한 경험입니다. 이 도시는 돌산으로 이뤄졌는데, 9세기경부터 수도자들이 바위에 뚫린 굴속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며 모여들면서, 11세기부터 본격적인 수도원이 건립되기 시작한 곳입니다. 수백 미터 높이의 암벽 위에 이십여 개의 경이로운 수도원을 건축해 놓았는데, 그 가운데 두 곳을 방문했습니다. 우리 일행을 맞아주신 수도원장님은 정교회 수도생활의 특징에 대해서 말해주셨습니다. 수도생활에는 두 가지 덕목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나는 ‘겸손’이고, 다른 하나는 ‘회개’입니다. 이 두 덕목은 단순지만,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아주 복합적인 영성을 필요로 합니다.
이 영성을 얻어가는 과정은 ‘기도와 금식’과 같은 종교적인 행위만도 아니요, ‘학문과 예술’로 가꾼 문화적 소양만도 아니요, ‘행위의 성찰’로 일구어낸 도덕적 기질만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진 인간정신이 자아내는 표현이 회개와 겸손입니다. 그것은 심리적 차원만이 아니라 전 인격적인 힘이요, 개인의 영혼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조화롭게 변화를 이루어내는 지혜입니다. 회개와 겸손이 종교의 목표라 할 수 있는 평화를 지어낼 기본 역량이라고 정교회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정교회 방문에서 얻은 두 가르침으로 인해 평화순례를 더욱 의미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성경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평화의 공간을 만드는 사람 / 열왕기하 5장 1-14절]
오늘 열왕기하서의 본문은 나아만이라는 시리아의 장군이 엘리사를 만나서 병을 고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각도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야기를 읽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어떤 이는 엘리사와 같은 위대한 예언자는 간단한 처방 하나로도 사람들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할 것이고, 어떤 이는 나아만의 모습을 보면서, 제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한들 거만해서는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교훈을 발견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요? 우선, 어떤 인물에 주목해야 성경의 가르침을 잘 드러낼 수 있을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여덟 명 이상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아만 장군입니다. 그는 왕이 아낀 인물이요, 용사로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지만, 나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소식을 듣고, 자존심 때문에 돌아서고 맙니다. 거만하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장군이 취할 법한 행동이지만, 그의 모습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엘리사는 어떤가요? 그는 시리아 왕의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이 초조해하는 것을 알고, 왕과 나라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웃나라 군사령관이 자기를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가보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서 간단한 지침만 전달합니다. 그런 대접을 받은 나아만은 화를 내고 맙니다. 엘리사가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오늘 이야기의 가르침은 그를 통해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왕들은 어떤가요? 그들은 보통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에 해당합니다. 이야기 밖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에서는 병든 신하에게 호의를 베푼 시리아의 왕이든, 시리아왕의 편지를 받고 근심에 빠진 이스라엘 왕이든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그러면 주인공이 될 법한 등장인물들은 거의 지나가고 이제 몇 명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 사람에게 주목하게 됩니다.
첫 번째로 이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은 사람은 나아만의 집안에서 시중들던 전쟁포로 소녀입니다. 그녀는 나아만이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자 ‘사마리아에 있는 예언자를 만나볼 것을 권합니다. 이 소녀는 가장 작은 사람이었지만, 그녀가 사는 세계에 숨 쉴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주목할 사람들은 나아만의 부하들입니다. 이들은 엘리사의 종의 말을 듣고 분을 참지 못한 나아만이 치료를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자 충고를 합니다.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했어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몸이나 씻으시라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들의 말은 지혜롭습니다. 나아만은 총사령관으로서 특별한 권리를 누리기 원했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권리는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의 부하들은 생명을 살리는 진정한 권리를 얻을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이들에게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바로 이 이야기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삶이란 ‘새로운 공간’을 짓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길을 열고, 이전의 관계방식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가능성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평화를 세우는 위해서는 관계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방식, 그들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관계를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평화의 길을 여는 일은 왕이나 장군이나 심지어 예언자가 하지 않고, 작은 사람들이 합니다. 성서는 낮은 곳에서 보는 시선이 중요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평화의 길은 낮은 곳에서 열리고, 작은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이 평화로 가는 길에 관한 성서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평화를 위해 필요한 것 / 누가복음 10:1-11,17-20]
누가복음서 본문은 70인의 제자를 파송하는 이야기인데, 이 기록은 예수의 복음이 확산되는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미 세 공관복음서 모두 열두 제자를 파송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 10:1-42, 막 6:7-11, 눅 9:1-5), 그런데 누가복음만 유독 열두 제자의 파송이야기 뒤에 칠십 명의 제자를 파송하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성서학자들 대부분이 칠십 명이라는 숫자를 상징적인 의미로 봅니다. 그것은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성서의 숫자라는 것입니다. (창 10:2-31, 출 24:1, 민 11:16) 오늘 본문은 복음전도자가 지녀야 할 믿음의 윤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복음을 전할 제자들이 지켜야 할 신앙윤리는 단촐하고 단호해 보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평화의 길로 이끄는 것은 ‘현혹하는 욕심’에 있지 않고, ‘진정으로 필요한 것에 관한 분별’에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욕심’과 ‘필요’를 구분하기 힘든 생활양식을 갖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의 무한 증식을 목표로 여기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줄 알면서도 자신들의 필요를 채울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것은 욕심입니다. 과도한 양의 물질적 자원을 가지려는 것이든, 과도하게 존중받으려는 마음이든, 그것은 욕심일 뿐입니다. 거기에 새로운 삶의 가능성은 싹트지 않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바라며 일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기도 합니다. 냉정한 국제관계 속에서 평화협정을 위한 종교인들의 활동은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미대사관 앞에서 평화기도회를 갖는 것 역시 정치적인 영향력으로 보면 미미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며 하신 말씀처럼, 그것은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촛불이 하나 씩 켜지고, 평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온 세상이 밝아지고 모든 깃발이 펄럭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두 평화가 있기를 비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제자들을 평화의 사역으로 부르실 때, 예수님은 당신의 꿈을 제자들의 마음에 담아서 파송합니다. 그것은 매우 신비로운 일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진실과 사랑으로 이어져서, 함께 정의와 평화를 세우기 위해 일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지 않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필요에 대해서 관심하고, 다른 사람들의 바람을 자신의 행위에 담아내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생명의 진화와 문명의 발전을 추동하는 힘이라고 봅니다.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감동이 이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평화협정에 관한 우리들의 요청과 바람을 들은 사람들이 자신들도 한반도를 위해서 기도를 이어가겠다고 답할 때였습니다. 한 사람의 요청과 꿈이 다른 사람들의 기도 속에 담긴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 위에 피어나는 기적입니다. 평화는 이런 믿음 위에서 피어납니다. 인간에 대한 적대감이 지배하는 토양에서는 평화의 나무가 결코 자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가장 단순한 삶의 방식으로 가장 근원적인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것이 복음적 삶이 갖는 진정한 권위입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제자들이 기쁨에 차서 돌아와 보고를 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인간세계를 병들게 하는 근원적인 세력까지 복종하게 만드는 삶의 방식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그들에게 묵시록적인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묵시록적 표현은 ‘현재를 진지하게 대하도록’ 하는 성서의 표현입니다. 중요한 것은 ‘귀신이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평화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평화의 복음을 진실로 믿어야 하고, 평화의 복음을 믿기 위해서는 그 복음이 주는 평화를 먼저 경험해야 합니다. 나뭇잎을 실제로 흔드는 바람처럼, 맘과 영혼이 떨리는 평화의 바람이 안에서 불어야 합니다.
[평화, 새롭게 창조되는 삶 / 갈라디아서 6:7-16]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바울의 목소리를 듣기 전에, 여행 이야기를 한 토막 더 하겠습니다.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아크로폴리스에 올라서 아테나 여신에게 바쳐진 파르테논 신전을 구경하곤 합니다. 저도 그곳을 올라 감상을 하고, 또 그 옆에 있는 아레오파고 언덕에도 올라가서 그리스 철학자들과 대화를 하는 이천 년 전의 사도바울을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아테네에서 1시간가량 이동을 하면 고린도(Corinth)가 나옵니다. 이곳은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을 하는 동안 1년 반을 머문 곳입니다. 고린도는 스파르타가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시작되는 입구에 있는데, 지형적으로는 병목처럼 좁은 곳이기 때문에 지금은 운하를 파서 에게해와 이오니아해를 이어놓았습니다. 예전에 운하가 없을 때는 두 바다 사이의 육로 로 배를 밀고 가기도 했다 합니다.
그렇게 각지의 문물이 교차하는 고린도에는 신화와 신전이 많았고,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갈등이 많았던 그 틈바구니의 역사에는 사연도 많았을 것입니다. 시지프스 신화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산(山) 부근에 가면 아폴로 신전의 유적이 있습니다. 잘 믿겨지지 않지만, 거기에는 바울이 설교한 장소라며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만들어놓은 곳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인상적인 장소는 고린도 인근의 작은 해변마을 겐그레아였습니다. 그곳은 바울이 유럽에서의 선교를 마치고 아시아로 돌아갈 때 배를 타고 떠난 곳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서원한 것이 있어서 머리를 깎았다’고 합니다. (행 18:18) 바울의 마음에 도대체 어떤 서원이 깃들었기에, 삭발을 하고 시 안디옥으로 돌아갔을까 궁금했습니다. 아마 반대방향으로 가면 당시 세계의 중심지로 알려진 로마가 있는데, 그곳을 향한 무언가 불타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보았습니다.
지금의 겐그레아는 평화로운 마을처럼 보였습니다. 작은 조약돌이 가득한 해변에는 맑디맑은 바닷물이 출렁이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소박한 모습으로 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평화를 이루기까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거쳤을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갈라디아서 6장 본문에서 말합니다. ‘육체에 심지 말고 성령에다 심고,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8-9절) 그것은 자신에게 주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육체에 심는 삶’과 ‘성령에 심는 삶’을 대비하여 설명합니다. 육체에 심는 삶은 율법에 매여서 겉모양을 꾸미는 삶이요, 성령에 심는 삶은 십자가를 긍지로 여기며 살아가며 자신을 새롭게 지어내는 삶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새롭게 지어지는 삶’에서 평화를 찾았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그것을 말합니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화로 가는 길에서 중요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람이 새롭게 지어지는 것입니다. 자기 시대의 율법 너머에서 빛나고 있는 평화의 가치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새로 지어내는 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교회도 사회도 그런 사람을 남기는 것이 존재의 이유이자 활동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살다보면 도리어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나침반은 평화입니다. 더 큰 평화를 향해 가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자기를 새롭게 지어가는 생명은 보다 더욱 정의로운 평화(just peace)를 추구해가고, 정의를 구할 때에도 보다 평화로운 정의 (peaceful justice)를 이루고자 자신을 새롭게 지어냅니다. 거기에 성경의 가르침과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평화의 일꾼이 되기를 빕니다.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평화로 가는 길에서 중요한 것은 새롭게 지어지는 것입니다. 시대의 율법에 매여 사는 삶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작은 몸짓으로 평화의 길을 여는 것이 생명이요 믿음입니다. 십자가를 긍지로 여기며 성령을 따라 삶을 지어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