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 되어주는 교회 | 김희헌 | 2019-07-14

by 김희헌 posted Jul 14, 2019 Views 32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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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이 되어주는 교회 (7:7-17, 1:1-14, 10:25-37)

2019.07.14 성령강림절 여섯째 주일

 

성령강림절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우리들의 맘을 밝혀주시기를 빕니다. 또한 우리 교회에도 지혜를 주셔서 새로운 시대의 선교방향을 잘 정립해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기를 빕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 성령이 인도하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성경은 어떤 삶을 가리켜 거룩한 삶이라고 말할까요?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 코데쉬(holiness) 또는 카도쉬(holy)는 속된 것으로부터의 구별을 뜻합니다. 거룩한 백성, 거룩한 사람, 거룩한 음식, 거룩한 날 등은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19:23, 3:13, 왕상 9:3)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이것입니다. 왜 그것들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며, 속된 것들과 구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거룩함에는 온전한 면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을 뜻하는 헬라어 하기오스(ἅγιος)의와 진리로 온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1:75, 17:17, 고후 7:1)

그렇다면, ‘거룩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는 구별(separation)이요, 다른 하나는 온전함(integrity)입니다. 이 두 가지는 형식과 내용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구별이 거룩의 형식이라면, ‘온전함은 거룩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종교적으로 경건한 형식을 가졌어도, 그 안에 의와 진리를 갖추지 못한 경우에는 거룩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종교적으로는 경건의 모양이 있지만, 경제적으로 탐욕스럽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며, 문화적으로 차별적인 태도를 취하는 종교, 그것은 마치 돼지발에 진주가 달린 것과 같은 기이한 느낌을 줍니다.

거룩한 삶이란 믿음과 행함이 진리 안에서 조화롭고, 경건과 실천이 정의를 일관되게 추구하는 삶의 온전성을 갖습니다. 만일 종교가 온전함에 대한 감각을 갖지 못하면, 스스로를 거룩하다고 구별하면서 위선과 교만에 빠지고, 믿음의 이름으로 차별과 혐오를 일삼게 됩니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썩은 정치에 침묵하고 복종하는 종교는 내용이 없는 공허한 형식종교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8:6)

성령이 인도하는 교회, 거룩한 신앙공동체는 스스로를 세상과 구별하는 형식종교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세상 속에서 진리와 정의를 밝히는 일에서 온전한 종교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준 대표적인 예언자가 아모스입니다.

 

[예언의 기준 / 아모스서 77-17]

아모스는 다섯 개의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데, 그 가운데 두 개를 이번 주일과 다음 주일에 생각해보게 될 것입니다. 이번 주일은 세 번째 환상인 다림줄 환상입니다. ‘다림줄(ănāḵ, plumb line)추를 달아 늘어뜨려서 벽의 기울기를 측정하는 도구입니다.

아모스가 활동하던 당시의 상황은 상대적인 번영과 평화를 누리던 때입니다. 사람들은 자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 속에서 위기를 봅니다. 여기서 다림줄은 그 사회가 얼마나 기울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주목할 점은 다림줄 환상에서 아모스는 앞에 나오는 메뚜기와 가뭄에 관한 환상을 보았을 때와는 다른 태도를 취합니다. ‘메뚜기로 인한 재앙가뭄의 재앙을 환상으로 보았을 때 아모스는 하나님에게 항변합니다. “주 하나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야곱이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는 너무 어립니다.” (1:2,5)

하지만 다림줄 환상을 볼 때에는 왕에 대한 심판과 성소의 파괴를 언급합니다. (8b-9) 그것은 메뚜기나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와는 달리, 기울어진 사회의 불의와 위선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괴하는 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회 질서와 제도가 기울어져 있는데, 이런 죄악을 모른 체하면서 구원을 설파하는 종교는 위선적이라는 것이 아모스의 신학입니다.

아모스와는 대결하는 사람은 베델의 제사장 아마샤입니다. 베델은 왕국의 성전(temple)이자 임금의 성소(sanctuary)로 알려진 곳입니다. 여기서 아모스가 예언을 하자, 아마샤는 왕에 대한 반란을 선동하고 있다고 아모스를 고소합니다. 그는 심지어 아모스를 조롱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예언을 권력의 하위개념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아모스는 그에게 답변합니다. 자신은 시골 농부일 뿐이며, 예언을 밥벌이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아마샤가 억압적인 제도를 유지함으로써 기득권을 지키는 세력을 대변하며 그 시대의 죄악에 가담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이 가능했던 것은 그 시대의 다림줄을 봤기 때문입니다.

성서를 읽는 우리는 묻게 됩니다. 우리 시대의 다림줄은 무엇인가? 우리 시대가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분단시대의 다림줄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 신자유주의 시대의 다림줄은 일터에서 쫓겨나는 노동자들입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고용노동부 산하의 최저임금위원회가 2020년의 최저임금을 8,590원으로 결정했습니다. 작년보다 240(2.87%) 오른 액수로서, 외환위기 때와 비슷한 인상률이라고 합니다. 이로써 소득주도성장을 하겠다는 촛불정부의 핵심정책은 포기되었다고 하겠고, 서민들보다는 재벌들의 이해에 더 충실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재벌들이 어떻습니까? 작년 2018년에 국내 3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은 67조원이 늘어서 950조원에 달했습니다. 5대 재벌만 하더라도 49조원이 늘어난 666조원입니다. 그 증가율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2.7%)보다 세 배나 많은 7.5%입니다. 왜 이토록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을까요?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특혜를 주고, 노동자들에게 저임금 노동을 강요한 결과이지요.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은 작년에 월급 이외에도 928억 원의 배당금을 번 반면, 현대자동차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임금마저도 체불되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경영인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강도로 부른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의 지식은 자본을 독점하는 행위를 능력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성서의 예언자들은 그것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강도짓으로 볼 것입니다.

우리교회에서 머잖은 곳에 생가를 두었던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삶을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자본 자체가 죄악은 아닙니다. 감리교인이었던 그는 많은 재산을 팔아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자본이란 헌신의 도구로 사용되면 해방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을 위해 독점화된 자본은 사회의 구조악을 유발합니다. 구조악(structural evil)이란 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죄악의 체제를 말하는데, 기독교 신학은 그것을 가리켜 원죄(original sin)라고 말합니다.

원죄는 인류의 조상이 지은 죄가 생물학적으로 유전된다는 비과학적인 주장이 아니라, 인간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심층성에 관한 신학적 인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도나 선택과는 상관없이 이미 죄를 짓고 있는 속박상태에 놓인 현실에 대한 인식입니다. (마조리 수하키, [폭력에로의 타락], 34)

그런 상황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마음의 법과 싸우는 어떤 법이 나를 죄의 법의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7:24)

종교인이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절망감을 느끼기 때문에 손쉬운 선택을 하는 조류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것은 사회적 짐을 약자에게 더 많이 지우는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악의 소용돌이요, 절망의 악순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아모스의 환상이 필요합니다. 짓밟히는 사람들, 무시되는 사람들을 통해서 시대의 다림줄을 보는 하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삶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초대는 거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뒤바뀐 질문 / 누가복음 1025-37]

누가복음서의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 알려진 내용입니다. 이 비유는 영원한 생명(ζων αώνιον)’에 관한 물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런데 이 중요한 물음의 진정성에 대해서 복음서 기자는 의심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의 단어에서 비칩니다. 하나는 묻는 사람이 율법 교사였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그가 예수를 시험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표현입니다.

질문의 주인공인 율법교사율법학자로 번역된 부류의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율법교사(lawyer)로 번역된 헬라어 노미코스(νομικός)율법학자’(scribe)로 번역되는 그람마튜스(γραμματεύς)와는 다릅니다. ‘율법교사노미코스는 복음서에 딱 두 번 등장하는 집단입니다. 한 번은 마태복음에서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를 통해서 왕의 탄생소식을 듣고 당황한 헤롯이 자문을 얻기 위해 소집한 집단이 바로 노미코스입니다 (2:4).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해서 14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대적해서 논쟁하는 집단이 바로 노미코스입니다.

누가복음서 기자는 이들을 위선적인 사람들의 대명사로 그려냅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대화를 미리 보면 이렇습니다. 율법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까지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렇다. 너희 율법교사들에게도 화가 있다! 너희는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면서, 너희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너희 율법교사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 (11:46,52)

이런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게 영생의 길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복음서 기자는 그들이 예수를 시험하려고했다 말합니다. 여기서 시험하다는 뜻의 단어(ekpeirazo) 역시 복음서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단어입니다 (성서에서 총 4번사용).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당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4:7, 4:12).

자 그렇다면, 위선적인 사람이 간교한 의도를 갖고 영생의 길을 물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어떻게 가르치는지 이해한대로 말해보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는 토라의 계명을 따라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6:5, 19:18).

그는 추상적인 답변을 잘 했습니다. 그러자 복음서 기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구체적인 이야기로 끌고 갑니다. 율법교사는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강도만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이 불행한 사람을 대하는 세 사람 ,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의 다른 대응방식을 말해준 다음 되묻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시오?

이 이야기의 흐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질문의 내용이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물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물음입니다. 자기 이웃이 될 수 있는 사람과 될 수 없는 사람을 가르는 물음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물음들도 그렇지요. 정치는 난민들을 이웃으로 여길 것인지를 묻고, 경제는 가난한 사람을 이웃으로 여길 것인지를 묻고, 종교는 성소수자를 이웃으로 여길 것인지를 묻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가리켜, 자기 시대의 율법에 종노릇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3:8-9)

예수님은 질문을 바꾸었습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지 않고, ‘누가 강도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는가?’하고 묻습니다. 그렇게 질문을 바꾸자, 편을 가르는 사람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 부각됩니다. 여기서 자비(ἔλεος)란 단지 연민의 마음에 그치지 않고, 악에 대한 능동적인 응답과 확고부동한 헌신을 동반합니다.

이 비유의 가르침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민중신학은 한 걸음 더 나갑니다. 그것은 이웃이 되어준다고 하면서자족하는 사람에 머물지 않도록 하려는 신학적 장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묻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누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가? 다시 말해서, 이 비유에서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하고 묻습니다.

민중신학은 그를 강도만난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그의 존재로써 우리를 부르면서, 구원받는 삶으로 인도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종교적 영성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라고 할까요, 그 수준이 갈라집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개념을 빌리자면, 타율종교와 자율종교와 신율종교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외부의 힘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 타율종교,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이 자율종교라면, 다가오는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신율종교라고 하겠습니다. 정신이 덜 깨어난 보수종교는 타율종교요, 자신의 능동성에 도취된 근대종교가 자율종교라면, 강도만난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일렁이는 것을 보고 그 고통과 해방의 바다에 몸을 담그는 종교가 하늘의 다림줄을 분별한 신율종교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추구할 종교 또한 그 길이 분명합니다.

 

[주님께 합당한 삶 / 골로새서 11-14]

오늘 골로새서의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신앙공동체가 자라나기를 바라는 바울의 권면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 주에 보게 될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1:15-20)을 예비합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답고, 성도가 성도답기에 합당한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6). 그 삶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알게 해주셔서 (9),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라나고 (10-11), 마침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삶에 이르는 것입니다 (12).

이것은 참된 신앙이 가진 기본패턴을 보여줍니다. 하늘의 신령한 지혜가 마음에 담기면, 그것을 삶으로 열매 맺기 위하여 자라나며, 마침내 하나님에 대한 감사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율과 타율이 어우러진 신율적인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모스의 예언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러한 신율적인 신앙이 무엇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강도만난 사람, 짓밟힌 사람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것이 예수운동을 지탱하는 중심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를 구성한 여러 교회가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서로 갈등을 빚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것이 예루살렘 회의입니다. 이 최초의 교회 회의에 대한 기록이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옵니다. 이방선교에 대한 방식의 차이를 인정하고 합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일치를 이루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210절에 나옵니다. 그건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운동은 그곳에서 출발합니다.

진흙에서 연꽃을 피우려는 삶, 세속에서도 거룩함을 간직한 공동체는 영생에 관한 추상적 믿음에 머물지 않습니다. 역사의 다림줄을 분별하고,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있는 방안을 계속해서 묻습니다.

촛불정부가 세워졌다고 하지만 사회적 정의가 곧장 세워지지 않고 있지요. 정의는 자본주의 시장이 자율적으로 만들어내는 원리도 아니요,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행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약자들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하늘뜻펴기를 마치면서, 한 사람을 생각하며 침묵할 것은 제안합니다. 그의 처절한 몸부림은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알려줍니다. 현재 강남역 사거리의 교통통제탑 위에서 40일이 넘도록 단식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김용희 님입니다.

그는 삼성에서 노조설립을 추진하다가 해고된 노동자입니다. 며칠 전 오마이뉴스에 실린 그에 관한 기사는 삼성 10억 마다하고 곡기 끊은 남자, 극악무도한 일 겪었다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2019. 7. 9) 이 기사에는 지난 20여 년 동안 한 개인을 표적으로 삼아 자행한 재벌기업의 온갖 죄악이 나와 있습니다. 폭력배를 동원한 폭행과 납치 감금, 가족 협박과 아내 성폭행, 해외 전근 발령과 간첩조작, 회유와 기만 등 억울한 모든 일을 당한 그는 곡기를 끊은 지 8일째가 된 지난 610일에 철탑에 올라 지금까지 단식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생각하며 침묵하는 동안, 앞으로 우리가 걸어갈 믿음의 길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는 율법교사에게, 예수님은 강도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이 누구인지 되물었습니다. 율법의 종노릇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참여하면서, 복음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시대의 다림줄을 분별하는 하늘의 지혜를 우리 모두에게 내려주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