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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극우개신교의 출현

by phobbi posted Feb 02, 2025 Views 4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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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02-02

2025. 02. 02.

 

사회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F. Baumeister) 등은 사회적 배제의 좌절감이 타자에 대한 공격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국에서도 사회적 배제와 열패감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그런 이들의 일부가 증오를 통해 좌절감에서 탈출하려는 행보를 보였다. 바로 극우주의의 출현은 이런 상황과 관련이 있다.

 

개신교에서도 그랬다. 아니, 개신교는 이 시기 한국사회의 극우주의 활성화의 중심 역할을 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급부상한 인물이 전광훈이다. 개신교의 흐름을 주도하는 교회들은, 말했듯이, 세계화로의 체제 전환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성공한 이들이 대거 모여들면서 대형화된 교회들이다. 또 성공하지 못한 많은 교회들은 성공한 교회들을 모방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이런 흐름 속에서 좌절감에 빠져든 목사들과 신자들이 그 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했고, 그런 이들이 하나둘씩 전광훈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나아가 개신교 신자가 아닌 이들도 그들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개신교계의 비주류 인사였던 전광훈은 이렇게 범사회적인 극우의 상징이 되었다.

 

한데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 이들의 공간은 교회가 아니라 아스팔트였다. 전광훈은 이런 광장형 집회에 최적화된 인물이다. 집회는 명확한 중심이 있다. 스피커의 볼륨을 최대로 올린 마이크를 통해 그는 강렬한 메시지를 쏟아낸다. 적을 향한 욕설과 모욕적 발언, 혐오의 표현을 남발한다. 소란스러운 악기는 그의 거친 발언을 더욱 증폭시키는 보조장치에 다름 아니다. 청중은 중심에서 울려 퍼지는 거친 말에 환호하는 자의 역할을 맡는다. 광장형 집회는 이런 모습이다.

 

이 광장형 집회에 모여든 대중 가운데는 교회라는 종교의 장, 그리고 시민사회라는 사회의 장에 잘 통합되지 못한 소외된 이들이 넘쳐났다. 위에서 인용한 로이 바우마이스터 등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통합의 체계가 잘 작동하지 않는 장에서는 사회적 신뢰와 호혜성이 감소하고 그 자리에 분노와 증오가 폭발적으로 분출하곤 한다. 그런 분노와 증오를 고조시키는 데 전광훈 같은 이가 고함쳐대는 막말의 난장은 잘 어울렸다. 이런 극우 현상을 흔히 올드라이트현상이라고 부른다.

 

반면 아스팔트 극우현상과는 다른 새로운 극우 현상도 이 시기에 나타났다. 이 새로운 극우주의 현상이 물결치는 대표적인 장은 온라인 공간이었다. 해서 나는 이를 온라인 극우라고 부르고자 한다. 리더도, 중심 가치도 없는, ‘위반의 정치(politics of transgression)’로 점철된 담론장에서 조롱과 증오가 물결친다. 그런 곳에서 일어나는 극우주의 현상을 온라인 극우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개체화된 개인들이 키득거리며 혐오적 대상(으로 낙인찍힌 이들)을 향해 조롱과 야유를 퍼붓는다. 미디어 비평가인 박건일은 이런 극우행동의 동기를 주목경쟁(attention struggle)’이라고 말했다. 이념을 위해 주목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주목을 위해 이념을 추구하는것이 온라인 극우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한데 이런 주목경쟁의 사회심리는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이 일으킨 열패감 혹은 예감된열패감과 관련이 있다.

 

김진호 지음, <극우주의와 기독교>(홀가분, 2024. 4. 25.) 11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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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년 벽두에 일어난 서부지법 폭동 사태는 아스팥트 극우온라인 극우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김진호 목사의 분석에 따르면 극우주의는 결국 사회적 배제와 열패감으로 인한 소외에서 비롯된다.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 속에서 이미 패배했거나, 앞으로 계속 패배할 것 같다는 예감과 불안,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절망과 좌절, 계속되는 사회적 고립에 의한 외로움 등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폭동을 불러오고야 만 것이다.

 

큰 틀에서 보자면 지난 100여 년의 변화 속에서 우리 사회는 사회적 신뢰와 호혜성, 즉 서로 돌보고 품어주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 것이다.

 

상식을 파괴하는 폭력적 행위는 우리 사회에 매우 큰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런데 이런 폭력 사태를 치유하는 장기적인 길은 결국 우리 사회가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것이다. 헌정 질서를 유린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해치는 자들에게는 엄정한 처벌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불관용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더 근원적으로 파고들면, 결국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이 불러온 인간성의 상실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법률과 행정으로만 이끌고, 형벌로만 질서를 잡으려고 하면 사람들은 회피하기만 할 뿐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다. 도덕으로 이끌고 배려하는 마음과 태도로 사회적 질서를 잡는다면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알고 품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子曰 ;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論語』 「爲政3)

 

괴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괴물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격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동시에 앞으로 우리 사회가 똑같은 괴물을 만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도 심각하게 고민할 일이다.

 

 

 

 

- 향린 목회 91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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